[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yonho (Song) 날 짜 (Date): 1995년05월13일(토) 07시29분40초 KST 제 목(Title): 야스퍼스와 포괄자 사상 1 하나비에 제가 써 놓은 것인데 여기에 더 어울릴 것 같아서 옮겨옵니다. 불교를 철학으로 이해한다면 불교철학은 그 무엇도 아닌 인간 자신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인간을 이해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2500년을 내려오면서 불교 사상가들은 인간에 대한 거의 모든 사상을 탄생시켰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미 수천년전에 불교사상가들이 발견했던 여러가지 진리들은 서양에서는 20세기에 들어서야 겨우 그 윤곽을 잡기시작했으니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비트겐쉬타인의 언어분석학이 그렇고 융의 정신분석학이 그렇고 또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인간실존에 대한 이해가 그러하다. 이 글은 야스퍼스가 1949년 라디오 방송강연을 출판한 책의 일부분이다. (총 12장중 제 3장) 이하는 한국어 번역본 '지혜에의 길'(박 종후역, 형설출판사)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본인이 옛날에 읽으면서 붙여 놓았던 약간의 주석과 그 이후의 야스퍼스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연구도 소개하고자 한다. 포괄자(包括者, das Umgreifende) 주관-객관의 분열(Subjekt-Objekt-Spaltung) 오늘의 강의에선 나는 여러분께 한 철학적 근본사상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가장 어려운 사상가운데 하나이다. 이 근본사상은 본래적인 철학적 사유의 의미를 확실한 기초위에 정립시켜 주는 것인 까닭에 불가결한 사상이다. 이 사상은 비록 그것을 완전하게 전개하고 천명한다는 것은 까다롭고 복잡한 일거리라 하더라도 가장 간명한 형식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여기 그 사상의 윤곽이나마 그려보기로 하자. 철학은 무엇이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과 함께 시작하였다. 우선 세계안엔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사물들, 즉 가지가지 형태를 가진 무생물과 생물들이 존재하며, 이 모든 것은 왔다간 가곤한다. 그러나 본래적인 존재 즉 모든 것을 함께 묶어 두며,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있고, 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거기에서 생겨 나오는 그러한 존재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상하리 만큼 다양하다. 명예롭게도 최초의 철학자의 최초의 답은 '만물은 물이오, 물로부터 생한다'라는 탈레스의 답이다. 이를 이어서 만물은 본시 불 이라는둥, 공기라는둥, 무한정한 것이라는둥, 물질이 라는둥, 원자(atom)이라는둥 하였다. 또는 최초의 존재는 생명이며, 일체의 무생물은 이 생명에서 탈락해서 생겨나온 것이라고도 하며 또는 최초의 존재는 정신이며, 이 정신에 대해서는 사물은 현상이며 정신에 의해 말하자면 한갖 꿈으로서 산출된 정신의 표상이라고도 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세계관의 일대 계열을 보거니와, 사람들은 이 세계관들을 각기 유물론 (일체는 질료요 자연기계적인 생기이다), 또는 유심론(일체는 정신이다), 또는 물활론(만물은 유적적인 산 물질이다)이라는 명칭으로 그리고 또 다른 여러 관점들 밑에서 여러가지로 불러 왔던 것이다. 헌데 존재란 본래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주어진 답은 모든 경우에 한결같이 세계 내에 나타나는 어떠한 존재자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며, 이 경우 이 존재자는 그것이 만물의 근원이라는 특수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어느 것이 바르다고 할 것인가. 학파들이 서로 싸우는 가운데 수천년간에 걸쳐 행해진 철학적 논증은 이들 입각점 중의 어느 것이 참된 것임을 증명하지는 못했었다. 물론 각 입각점에 대하여 그 무슨 진실한 것이 즉 세계내에서 무엇을 보는 것을 가르쳐 주는 그러한 견지와 연구방법 같은 것이 나타나긴 한다. 그러나 만약 각 입각점이 스스로 유일한 것으로 자처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기의 근본견해에 의해 설명할려고 할 경우엔 그것은 그릇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 모든 견지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즉 그것은 이들 견지는 존재를 대상으로서 나에게 맞서는 그 무엇으로서 즉 내가 나에게 대립 하는 객관으로서 그것을 사념(思念)하면서 지향하고 있는 그 무엇으로서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의식적인 현존재의 근본현상은 지극히 자명적인 것이어서 우리가 그것을 전혀 문제삼지 않은 까닭에 우리는 그것의 비밀을 거의 감지 하지 못하는 터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유하기도,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도 하는 바 그 대상은 항상 우리와는 다른 것이며, 우리가 주관으로서 지향하고 있는 하나의 우리에게 맞서 있는 것 즉 객관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우리 자신이 말하자면 타자가 되고 또 항상 그와 동시에 우리는 하나의 사유하는 자아로서 다시 거기 있게 되거니와 이 사유 하는 자아는 자기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사유를 수행하지만, 그러나 그 자신은 객관으로서 적절하게는 사유될 수 없는 것 이니, 그 이유는 그것이 언제나 한결같이 모든 개관화된 존재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유하는 현존재의 이러한 근본상태를 우리는 주관-객관의 분열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깨어 있고 의식하고 있는 한 우리는 항상 이러한 분열상태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 속에서는 원하는대로 이리저리 뒹굴 수가 있겠지만, 그러나 항상 우리는 이 분열 속에서 대상적인 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 그 대상이 감성적 지각의 실재이건, 수나 도형과 같은 관념적 대상이건 공상적인 내용이나 또는 불가능한 것의 환상이건 간에 말이다. 대상은 항상 우리의 의식의 내용으로서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우리에게 대립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표현을 빌린다면 주관없는 객관도 없고 객관없는 주관도 없는 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