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yonho (Song) 날 짜 (Date): 1995년05월09일(화) 01시27분55초 KST 제 목(Title): RE:228, 231 - Guest님의 질문에 답하여. 어제는 새벽에 잠깐 키즈에 들어 왔다가 한잠 자고 선원에 가느라고 미리 써놓은 글 하나 달랑 놓고 말았는데 오늘은 새벽에 잠을 깼으니 본격적으로 손님의 글에 말꼬리를 잡고 늘어져 볼까 합니다. 원래 저는 배운게 머리로 따지고 드는 것 밖에 없어서 그렇게 도와 드릴 수 밖에 없군요. 저 역시 어디 좋은 글, 좋은 말씀, 그야말로 한소식하게 해줄 그런 법문없나 열심히 ㅤ쫓아 다니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여하한 좋은 것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소화를 못시키면 그림의 떡일 수 밖에 없습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법문아닌게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무정설법이니 유정설법이니 말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바람소리, 물소리, 바늘 떨어지는 소리, 애우는 소리 다 설법아닌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도니 부처니 진리니 부르는 그것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이세상에는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선문답중에 이런게 있습니다. 어느 스님과 제자가 길을 가다가 제자:스님, 진리에 들어가는 문이 어디에 있습니까? 스님:저기 폭포소리가 들리느냐? 제자:예. 스님:그리로 들어가거라. 제자:그럼, 폭포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는 어찌합니까? 스님:그리로 들어가거라. 바람소리, 물소리 다 설법아닌게 없다고 했지만 마찬가지로 바람소리도 안 들리고 물소리 안나는 그것도 역시 설법아닌게 없을 겁니다. 있는 것이 도의 작용이라면 없는 것 역시 도의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설법을 못 듣습니까? 뭔가 설법이 따로 있을 거라고 자꾸 찾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들어가는 문을 찾고 있는 한 그 문은 결코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찾을려고 하는 마음이 바로 그 진리요 또 진리에 들어 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문없는 문이라는 말이 나왔는가 봅니다. 어딘가 외부에서 찾을려고 하는 마음을 탁 놓아버리는 순간 진리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인데 우리는 업은 아이 3년 찾는다는 말대로 자꾸만 밖으로 밖으로만 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밖에 진리가 없는 것처럼 역시 안에도 진리는 없습니다. 그냥 그런거 다 포기해 버리면 얼마나 편합니까? 그럼 진리는 스스로 모습을 나타내니 그 놈은 상당히 변덕이 심한 놈임에 틀림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는 찾을려고 하는 마음을 놓아라 하는 말을 듣고 마음을 놓을 려고 하는 순간 그 마음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겁니다. 있어야 놓든지 말든지 할 텐데 놓을려고만 하면 이놈의 마음은 흔적도 없는 겁니다. 기껏 아까까지는 별 요상한 작용을 다 부리다가 막상 찾으면 없으니 이놈은 진리보다 더 변덕스러운 놈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님한테가서 있어야 놓든지 말든지 할거 아니냐고 투덜투덜 대면 스님은 마음을 놓아야 겠다는 그 마음까지 놓아라 합니다. 그런데 그말을 들으면 마음을 놓아야 겠다는 그마음이 또 어디 있는지 찾고 있는게 우리들 중생들이 하고 있는 짓이지요. 뭐 남들이 그러는지 안그러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같이 걸고 넘어졌는데 바로 제가 지금 그런 짓을 하고 있답니다. 아이구 이 돌대가리야, 그런 짓좀 안하고 살면 얼마나 편하냐! 위에서 중생이라고 했지만 중생도 이름을 중생이라고 붙여놓고 스스로 중생이라고 한정지으니 중생이지 따지고 보면 중생마음이나 부처마음이나 다 똑같은 한마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중생이 있고 부처가 또 따로 있는 것은 그렇게 다르다고 자꾸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중생이지요. 그냥 다르다는 생각, 그것만 탁 포기하고 나면 다시 중생이 부처고 부처가 바로 중생인것을 왜 이렇게 복잡하게만 따지고 드는지. 다른 사람 얘기가 아니고 제 얘깁니다. "ㅤ종교적으로 수준 높은 글들"을 찾고 계시는 어느 게스트님의 글에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다 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게스트님, 글들이 수준 높고 낮고는 다 게스트님 마음에 달린 거랍니다. 똑같은 것을 수준높게 받아들여 잘 이용하면 수준높은 거고, 거기서 아무 이득도 못 얻으면 쓰레기같은 글일 수 밖에 없는 것이 겠지요. 그런데 이왕 똑같은 글이 수준높은 글일 수도 있고 수준 낮은 글일 수도 있다면 왜 굳이 나쁜 쪽으로 받아 들이겠습니까? 이 세상은 다 마음먹기 달린 거라고 한다면 (일체유심조) 이왕이면 좋은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공부 하는게 따지고 보면 다 잘먹고 잘 살자고 하는 것인데. 앞으로는 아마 모든 글들이 게스트님에게 있어서 다 수준높은 글들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도랑치는 김에 가재도 잡는다고 말이 나온 김에 요위에서 '사회적 성취'에 대해서 언급하신 것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고 넘어 가겠습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논리가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저야 따지기 좋아해서 논리라고 하지만 마음으로 이해하고 계신 분들은 한 마디더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을 겁니다. 제가 앞의 제 글에서 사람들이 절에 가면 요상한 우상 앞에서 절이나 하고 복이나 비는 줄아는게 답답하다고 했는데 그보다 더 답답한 게 있답니다. 다 아시다시피 주자학을 생활철학으로 삼는 우리네 옛날 선비들은 불교를 한심한 종교라고 비난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불교를 믿으면 마치 썩은 고목나무, 또는 다 식어버린 재처럼 되어버려서, 요새식으로 말하자면 아무런 사회 활동도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역시 그 이유는 누구의 탓도 아닌 바로 불교인들에게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저역시 열반이라는게 말그대로 불이 꺼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라고 한동안 잘 못 이해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알고 보면 꺼진 건 집착이라고 하는 불 밖에 없습니다. 이세상에 일어나는 것 어느 하나 이 한마음의 작용아닌 것이 없습니다. 밥먹고 똥싸는 것도 그놈이요 놓을 마음 따로 있다고 착각하고 마음 찾아 다니는 것도 바로 이 한마음입니다. 이 한마음의 주인공이 시험도 보고 붙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는 겁니다. 이거 갖다 버리고 나면 정말 식어버린 재처럼 살아도 산게 아니고 죽어도 죽은게 아닌 이상한 상태가 되어 버릴 겁니다. 뭐 사실 버릴래야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마음을 쓰고 살지만 그 전부를 쓰고 사는게 전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한정해 놓은 그 일부만 쓰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것은 그 전부를 쓰고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먼저 나라고 한정해 놓은 그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지요. "뭔가 좋은 것이 따로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는 결코 좋은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뭔가 좋은 것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행복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건 자기 한테 속고 있는 것에 불과 합니다. 그거 하나 때문에 수많은 더 좋은 것들을 못보고 있는 겁니다. 그럼 뭐가 더 좋은 것이냐구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 세상에 있는 것 어느 하나 좋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자기가 한정해서 이것만 좋은 것이라고 집착하니까 나머지는 다 나빠진 것이지요. 사실 집착을 버리고 나면 좋고 나쁘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필요에 따라 쓰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고 하면 되는 것이지요. 불교인들이 빠질 수 있는 가장 큰 함정은 바로 마음의 본체만 찾을 줄 알았지 그 작용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말을 본체니 작용이니 하지만 사실 따로 떨어진 것이 물론 아닙니다. 마음의 본체만 찾으면 작용은 그냥 따라오는 것이라고 누가 그러지만 거꾸로 마음 잘 쓰면 그게 바로 마음의 본체를 찾는 활동입니다. 어떻게 하는게 마음 잘 쓰는 것이냐하면 집착없이 쓰는 겁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以生其心 -- 금강경)이라는 말처럼 마음을 내되 거기에 집착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보시가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는 작용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시라고 할 때 그건 쉽게 말해서 남을 도와 주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을 도와 줄 때 도와 준다는 생각을 하면 그건 진짜 보시가 아닙니다. 도와 주는 사람이나 도움을 받는 사람이나 전혀 이득이 없는 짓입니다. 도와 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착한 일 하나 했다는 분별심 하나 더 느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착한 일을 했다는 생각은 그 이면에 나쁜 일이라고 하는 개념을 논리적으로 가지고 있는데 그런 이원론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한은 그는 아무리 착한 일 많이 해도 역시 자기 자신의 좁은 울타리 안에서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착한 일 많이 해봐야 결국 그 울타리만 점점 더 높게 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원죄라는 것은 바로 선악과를 먹은 행위라고 하는 성경의 말이 한 층 가슴에 와 닿습니다. 선과 악이 구별되기 전에는 아담과 이브로 대별되는 인간은 그야말로 에덴의 낙원에 살고 있었지만 선이니 악이니 하는 이원론적인 사고를 가지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불행은 그 막을 올리고 인간은 에덴의 동산에 서 추방된 것입니다. 에덴의 동산이 공간적으로 따로 존재해서 신이 인간을 그 밖으로 내 몬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을 구별하는 순간 논리적으로 인간은 그 밖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성서에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본 따 창조했다고 했는데 이 말은 하나님도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고... 하는 육체적인 모습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이 그대로 가졌다고 이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성품은 어떤 것입니까? 바로 에덴의 동산에 살 때 인간의 모습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선과악이 없는 절대 평등의 경지에 사는 그러한 것입니다. 말이 또 옆으로 샜네. 돌아가서 남을 도와 주는 사람이 도와 주었다는 분별, 또는 집착을 가지고 있는 한은 결코 도와 주는 사람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도움을 받는 사람입장에서도 똑같은 이유에서 득이 되지 않습니다. 만일 도움이 받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그 생각에 묶여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설사 도움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인과의 도리는 결코 멈추는 일이 없어서 언젠가는 그 빚을 갚게 마련입니다. 즉 도와주었다고 하지만 빚만 안겨준 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빚은 이자까지 쳐서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이율은 도와 주었다고 생각하는 집착의 정도가 아닐 런지. 그래서 옛말에 부처님이 숱한 중생들을 제도하였지만 사실 한 중생도 제도한 것이 없다 한 것입니다. 인과응보라고 하는 말이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실상 더욱 중요한 건 남이 관계되건 안 되건간에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결국은 내 삶을 구속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만의 울타리에 갖혀서, 성경식으로 말해서 원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살고 있는 것은 다 우리가 지은 업보의 결과에 다름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무에 그리 나쁜 짓을 했느냐구요? 자꾸자꾸 분별심을 내면서 살아온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나쁜 것이든 아니든 간에 어쨌든 그렇게 쌓아온 분별심, 집착으로 인해 우리는 행복과 불행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도 불행을 원하지 않지만 바로 그 생각이 스스로를 불행에 떨어뜨리는 악업입니다. 행복이라고 하는 테두리를 지어 놓고 그속에서만 살려고 하니 그 밖은 전부다 불행인 것이지요. 그렇게 따지면 행복이 많겠습니까, 불행이 많겠습니까? 일시적으로는 그 행복의 울타리 안에서 만족하고 사는 듯하지만 세상일이란게 결코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서 (제행무상) 언젠가는 그 울타리 밖에 나와 서야 할 때도 있게 마련입니다. 우선 죽음이 그렇습니다. 살다 보면 병도 걸립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떠나 보내야 합니다. 주말에 실컷 놀고 났더니만 월요일에 시험이군요. 시험쳐서 일등만 해야 행복하겠는데 남들은 더 열심히 공부하는 군요. 백번 양보해서 어떤 사람은 일등만해서 매번 행복하다고 하더라도 나머지는 어쩝니까? 매번 꼴찌에서 왔다갔다 하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삽니까? 그리고 시험에 붙는 사람보다는 떨어지는 사람이 더많은 게 요즘 현실이지요. 이렇게 사는 것은 다 불행 투성이입니다. (일체개고)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세상은 어느 것 하나 나라고 집착할 것이 없는데 (제법무아) 그런 속에서 내 것이니 내 행복은 요만큼이니 하고 따지고 드니 논리적으로 불행하지 않을래야 불행하지 않을 수가 없는게 우리네 중생들 삶입니다.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나마 좀 다행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거짓 자기라고 하는 한계를 깨뜨리고 더 넓고 밝은 세상을 볼 수 있는 모티브가 주어진 사람입니다. 죽을 때까지 불행이 뭔지 모르는 사람도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자신의 울타리안에 갇혀서 그 넓고 밝은 세상을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불행한 삶을 산 사람입니다. 불교의 시작은 이 고통의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고통이 뭔지 모르는 사람한 테는 부처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너가 지금 행복하다고 느끼는 건 재수가 좋아서 지금 그 조그마한 울타리 안에 잠깐 서있는 것이지 바로 한 발만 내 딛으면 천길 낭떠러지라고 아무리 일러 주어봤자 행복의 단 맛에 취해 있는 사람한테는 쇠귀에 경읽기 입니다. 인간의 삶이란 불행인 듯 하지만 사실은 행복으로 가는 문앞에 서 있는 것이고 행복하게 사는 듯 하지만 불행이 코 앞에 닥쳐 있는 줄 모르고 사는 그런 새옹지마의 삶입니다. 그러니 꼴찌 한다고 걱정할 일도 아니고 시험 떨어졌다고 걱정할 일도 아닙니다. 그게 다 한마음의 주인공이 하는 일이거니 하고 그냥 맡겨 두십시오. 우리가 할 일은 그것에 매여서 스트레스 받고 술 퍼마시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서 자꾸자꾸 선업을 쌓는 일입니다. 그럼 그 결과로서 선한 댓가를 받을 것입니다. 인과응보의 도리에 따라. 어떻게 하는 것이 선업을 쌓는 것입니까? 시험 공부하되 걸림없이 공부하고 걸림없이 붙고 걸림없이 떨어지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일이 라는게 공부한다는 데 걸리고 붙는다는데 걸리고 떨어진다는 데 걸리고 하면서 분별심만 자꾸 키워온 악업이었다면 이제는 그 반대의 길을 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재료는 전혀 바뀐 것이 아닙니다. 학생이라면 공부하는 것, 시험 붙는 것, 떨어지는 것을 떠나서 무슨 삶이 또 있겠습니까? 그것 떠나서 어디에서 또 분별심을 버리는 연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사회에서 살면서 미워하고 걱정하고 분별하는 일을 해 왔다면 또 여기 이자리에서 사랑하고 기뻐하고 일체를 하나로 보는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시험치는 일은 논리적으로 경쟁하는 일입니다. 경쟁에서는 꼴찌도 있고 일등도 있습니다. 꼴찌는 꼴찌나름대로의 꼴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일등도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겁니다. (뻔하지 뭐. 공부안한 죄지) 그리고 꼴찌에게는 꼴찌 나름대로 그 상황으로부터 배울 게 있고 일등은 일등나름대로 거기서 또 배울게 있습니다. 뭘 배우느냐고 묻는 사람은 자기 머리 한대 때리고 야이 돌대가리야 하고 한번 복창할 것! 나처럼. 그리고 아홉줄 위를 볼 것. 그러니 일등했다고 자만할 일도 아니고 꼴찌 했다고 슬퍼할 일도 아닙니다. 그리고 보시한다고 일등할 거 이등해주고 꼴찌할 거 대신 해줄 것도 아닙니다. 다 업보 지은 대로 받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업보는 대신 받아줄 수 없다고 그랬답니다. 억지로 지어서 하는 일 치고 잘 되는 일 없습니다. 분수대로 열심히 일등하고 열심히 꼴찌할 일입니다. 경쟁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 말로 남 도와 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믿건 안 믿건 경쟁속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누구나 다 똑같이 해야 할 일 입니다. 모두 이 한마음의 주인공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스로 불자라고 여긴다면 그속에서 열심히 수행하세요. 무슨 수행하는 지는 이제 더이상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나라고 하는 집착이야말로 현대사회같은 복잡한 곳에서 생활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 입니다. 그 한마음 잘못내서 내가 옳으니 네가 잘못됐느니 하고 따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집착만 없어지면 사실은 내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고 경쟁에서 이겨도 좋고 져도 좋고, 다만 도리대로 최선을 다하고 한 것만큼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자칫 불교를 잘못 이해하면 경쟁에서 다 져주고 공부안하고 시험 못 쳐도 그만인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그건 순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치에 맞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이 돌아가는 도리를 무시하고 우리가 지어놓은 기준에 맞춰 살려니 온갖 문제가 다 생기는 것이지요. 나라고 하는 집착을 버린다는 것은 지금까지는 내가 분별심으로 지어놓은 판단 기준에 끼워맞추며 살아 왔지만 앞으로는 순리를 쫓아 산다는 뜻이라고 말을 바꿔놓아도 좋습니다. '내'가 있는 한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 도리가 뭐냐구요? 바로 인과응보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일등도 있고 꼴찌도 있고 붙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지요. 다만 일등에도 매이지 말고 꼴찌에도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불자이겠지요. 한참을 떠들었는데 한마디만 더. 인과응보라는게 참으로 무서워서 당장 '그래 이제부터는 집착하지 말고 순리대로 살아보자'하고 생각한다고 해도 지금까지 쌓아온 습관이라는게 하루 아침에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걸 좀 쉽게 말하자면 '그래 지금까지는 잘못 살았어. 앞으로는 좀 제대로 살아야지.' 하고 한마음 돌리는 건데 그런다고 당장 제대로 살아지지 않습니다. 저만 해도 근 30년 동안 머리로 따지고 드는 것만 배워와서 아직도 머리로 따지지 말아야지 라고 또 머리로 따지고 드는 건 뭐 당장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큰스님 같으면 그 따지고 드는 건 누구냐! 고 야단 치시겠지만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그게 ㅤ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지요. 불교에서는 그렇게 업보가 쌓이는 것을 훈습이라고 합니다. 고기싼 종이에 고기 냄새가 베듯이 그렇게 우리의 이 분별심이 형성되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없애는 것도 자꾸만 자꾸만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저처럼 머리로 따지고 드는 거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그게 더 힘듭니다. 어이구, 내 팔자야. 그래도 자꾸자꾸 연습하면 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으니까 절에도 가고 이렇게 글도 쓰고 그러지요. 처음부터 잘 안된다고 걱정할 것 없습니다. 안 되는 게 당연한 것이지요. 그게 인과의 도리이니까. 또한 자꾸 하다보면 되는 것도 인과의 도리입니다. 되게 하는 것도 한마음의 주인공이요 안되게 하는 것도 한마음의 주인공이니 그저 묵묵히 가면 될 일입니다. 두서없이 한참을 떠들고 나니까 저도 뭔 소리 했는지 헷갈리는데 이게 '[질문]사회적 성취에 대해.....'의 답을 찾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모래 Group Theory 시험인데 빨리 가서 공부해야지. :) 송 연호 합장. yonho@nayo.umd.ed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