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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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yonho (Song)
날 짜 (Date): 1995년05월07일(일) 22시17분01초 KST
제 목(Title): 절에서는 왜 절을 하는가?


  들어가며: 이글은  제가 하나비에 방금 올린 글입니다.  저는 문사수 
님처럼 마음에서 우러나는 쉽고도 향기로운 글을 쓰지는 못합니다.  왜
냐하면 순전히 어디서 줏어 듣고 머리로 따지고 생각해서 간신히 간신히
문장이나마 되도록 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감히 위의 손님
께서 불교에 대해서 해박하고 재미있고 유익한 글을 찾으신다기에 이글을
여기에 올려 놓는 것은 제가 그런 조건을 충족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요위의 육바라밀 질문과 대답을 읽고 겨우 용기를 내어서 입니다.  육바라
밀 중에서도 보시를 또 분별심 내서 따지고 분석하면 재시, 무외시, 법시
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법시(法施)는 자기가 아는 것을
능력껏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원효스님의 대승기신론소에서)  
그래서 배운 도둑질이나마 한 번 써 볼까합니다.
그런데 위의 손님께서 이보드의 글에 실망을 하셨다니 저로서는 이해를 
할 수가 없군요.  글의 가치는 그 글을 읽는 사람이 얼마만큼의 가치로 
받아들이는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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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에서는 왜 절을 하는가?
 
  내일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12시가 넘었으니 오늘이라고 해야겠
군요.  사실 음력  4월 초파일에 부처님이 정말로 탄생하셨는지 아닌지
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마 아닐 확률이  99.9%정도 된다고 봐야 할 것
입니다.  이 사정은 예수님의  생일이 12월 25일이 아닌 것과 동일합니
다.  그리고 그것이 음력 4월 8일이든 양력 12월 25일이든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오늘(어제군)  여기 
메릴랜드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님중 한 분 댁에서 물리학과  대학원생
들이랑 포스트닥터, 교수님들이 모여  간단한 저녁을 하고 삼삼오오 이
야기 하는 도중에  내가 절에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어느  아주머니 왈 
'젊은 사람이 그런데는 뭐하러 갑니까?'  이말은  그전부터 종종 들어온 
것이라 별로 새로울  건 없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답답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 말의  이면에는 절에 가서 하는 일이란 게 그
저 울긋불긋 치장한 건물안에 불상인지 뭔지 우상  비슷한 걸 모셔놓고 
절이나 하면서 기복하는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에 사는 원주민이 돌멩이나 나무에 대고  절하면서 수호신인양 
섬기는 걸 보고 우리가 저런 미개한 족속들 하고  깔보게 되는 것과 똑
같은 인식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교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이 현실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바로 불교, 또는 불교인의 탓
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불교가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은 필자가 위의 글들에서  시작
했고 또 끝없이 이어질 작업이지만 이 기회에 왜  절에 가서 절을 하는
지 한번 따져보기로  하지요.  우선 절을  하는데 누구한테 하느냐하면 
그 대상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그런데 이 '부처'라고 하는 용어는 상당
히 복잡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만 제대로  이해하면 불교공부 다 
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선 간단히  어원부터 살펴보면 우리가 
부처라고 말할 때, 때에  따라서는 고유명사를 의미하기도 하고 보통명
사로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고유명사로 쓰일 때는 물론 역사상의 실존
인물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처님이란 
말은 사실 불교에서  생긴 말이 아니라 이미 그이전 부터  인도에 존재
하던 단어였는데, 원시경전에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대각을 이루시고 그  전에 같이 수행하던 5비구를 찾아와서 이제  자신
은 부처가 되었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즉 부처란 말은 깨달은 사람
이란 뜻입니다.  이럴때의  부처란 말은 따라서 보통명사이고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처란 말을 
확대해서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 그 자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종종 사용
합니다.  즉 추상명사로서 사용되는 것인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부
처란 말은  사실상 이 추상명사로 이해  되어야 본래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석을 좀더  불교적으로 표현한 것이 이른바 삼신설이라  할 
수 있는데 논리적으로 따져서 부처란 말의 의미를  세가지로 나누어 놓
은 것입니다.  우선 진리 그 자체를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형상화시
켜서 법신불(法身佛)이라고  부르며 수행의 과보로써  깨달은 부처님을 
보신불(報身佛), 그리고 중생의  원력과 근기에 따라 방편으로 몸을  보
이는  부처님을 응신불(應身佛)  또는 화신불(化身佛)이라고  부릅니다.   
위에서 역사상의  실존 인물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응신불이며  열심히 
수행해서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되는 그 부처님은 보신불에  해당합
니다.  한참앞에 있는 본인의 포스팅에서(연수님의 왜 부처를 찬양하는
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했던) 석가모니  부처님을 보신불이라고 했
던 것은 본인이 착각한 것입니다.   하두 오래전에 공부한 것이라 잠시 
오해가 있었으니 양해하시기를.   그럼 왜 석가모니 부처님이 응신불이
냐하면 대승불교사상의 전개와 함께 불신관이 정립되면서  석가모니 부
처님이란 그전에는 부처가 아니다가  이생에 와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사실 태고 이전부터  부처였지만 다만 중생들에게 모두 부처님같이  될 
수 있다는 진리를 보여주기  위한 일대사 인연(一大事 因緣)으로 이 세
상에 오셨다는 사고 방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법화경 방편품)  

  원래 부처님이 생존하던 당시, 그리고 그 이후 얼마동안은 이러한 복
잡한 불신관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은 스스로를 
단순히 먼저 진리에의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이  있음을 가르쳐주는 스승
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초기경전인 아함경(중아함경)에 보면  어느 수
학자가 와서 묻기를 "어쩌구 저쩌구 ... 세존께서 설하신 대로라면 분명
히 무상안온(無上安穩)의 경지가  있으며, 그 경지에 이르는 길이  있고 
세존께서 지도자로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 경지에 이르는  자
도 있고 이르지 못하는 자도 있다니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친구여, 
여기 한 사람이 있어 그대에게 서울로 가는 길을 물었다고 합시다.  그
대는 그에게 길을 자세히 가르쳐 줄 것이오.  그렇지만 그가 반드시 서
울에 제대로 간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요.  서울은 분명히 있고 그대가 
길을 일러  주었는데도 어떤 자는 서울에  가고 어떤자는 가지  못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세존이시여,  나는  길을 가르쳐 줄 뿐이지 
그 이상 제가  더 어찌하겠습니까?"  "친구여, 그와  같소.  무상안온의 
경지는 분명히 있고  거기에 이르는 길이 있고 또 내가  스승으로 있지
만 내 제자 중에는  능히 그 경지에 이르는 자도 있고 또 이르지  못하
는 자도 있오.  그러나 그것을 내가 어찌하겠오.   나는 다만 길을 가르
쳐주는 사람일 뿐이니 말이오."  부처님의 참다운 의미는 이 이상도 이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이 복잡한 불신관(佛身觀)이  생기고 사람들이 마치 겉보기에 
아프리카 미개인 마냥 불상 앞에서 절하고  '나무아미타불' 하는 요상한 
주문을 외워대고 하는  것은 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불교가  변천해 온 
까닭입니다.  불교라고 하는 2500년을 흘러온 이 거대한 물줄기는 이제 
그 하류에서 바라보면  어디가 진원지이고 얼마나 많은 물줄기가  합쳐
져왔는지 모를 정도로 복잡하게  되어버렸다.  불교의 역사는 한마디로 
이단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시대에  따라 새로운 사상이 
생겨나고   지역에 따라  새로운 풍속이 들어오면서  성장해 왔습니다.   
오늘날의 불교에서 원래  부처님이 설하셨던 내용을 다 빼버려도  사실 
겉보기에는 별로  다른 것이 없을 정도로  불교는 많은 변천을  거듭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변천이  이단의 역사라고 하여도 그 이단을 과감
히 부르짖는 정신이야말로  불교에 항상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원동
력이 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예컨대 대승불교는 공사상이라고 하는 
새로운 사고 방식을  전개하였고 민중들에게 더 쉽게 접근하기  위하여 
선이니 염불이니 하는 새로운  수행방법들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새로
운 운동은  기존의 부파불교의  관점에서는 이단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 새로운 움직임이야말로 부처님의  원
뜻을 더욱 충실히  그리고 폭넒게 구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교의 
이해에 있어서 생겨나는 많은 혼란과 오해들은 불교의  교리 자체를 제
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역사
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정은 
기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불교와는 달리 기독교인 
자신들이 그 역사성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는데서  기독교을 둘러싼 
배타적인 논쟁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의 교리가 특정 
저서에 기술되어있는 특수한 역사적인 사건을 그  핵심으로 삼는다는데
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아이고 또 시끄럽겠네 *_*)

  불상을 모셔 놓고 부처님에게 절을 하는 행위도  역시 그러한 역사적
인 관점에서 이해를 해야 마땅합니다.  원시경전 어디를 찾아봐도 여기
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암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부처님은 자
신이 우상화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무척  경계를 하였고 또 엄격
하게 금하였습니다.  (우상이란 것은 자기 자신과 분리되어 외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말하는데  불상을 만들어 놓으면 사람들은 부처와  자
기가 별개의 존재인줄 알고 섬기려 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 그러하듯이.  이렇게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우상 아닌 것이 없지요.)  그래서 불멸후 꽤 오랜 기간 동안 불상은 물
론 그림에서 조차도 부처님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물론 여
기에는 부처님이란 그렇게  형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믿음도 작용했습니다.  그러다가  처음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잘 알려졌다시피 알렉산더대왕의 동방원정 후에 동서의  문화교류가 활
발해지면서 그리이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입니다.  그래서 불상은 곱
슬머리이고 어떤 불상은  아예 완전한 서양인의 모습을 하기도  하였습
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석굴암에서 보다시피 그리 크지도 않고(중국의 
불상이 수미터에  이르는 위압적인 것에  대하여) 살이  포동하게 올라 
보기도 좋으면서 한없이 인자한 미소를 띄고 있는  불상이 만들어 졌으
니 이는 물론 우리 조상들이 생각했던 부처님의  모습에 다름아닌 것입
니다.  

  그런데 불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다가 절을 해대는 이  관습이 결
코 해악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올바로 이해하기만 합다면 불
교의 핵심이 그 속에 있고 그 행위에는 정말  무한한 공덕이 있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 왜  우리는 불상에, 또는 부처님에게  절을 
하는가?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부처님에게 절을 하는 행위는  세개
의 의미를 갖는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응신불, 즉 역사적인 인물인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절을  하는 행위는 앞의 초기 경전에서  언급되었
듯이 우리에게 길을 인도하는 스승에게 예를 드리는 것입니다.  스스로
가 인간의 속물근성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히말라야의 추위와 하루  깨 
한알 밖에 안  먹는 배고픔을 참아가며 진리를 찾기 위해  정진하던 그 
용기, 모든 것을 다 놓아 버림으로써 마침내  진리를 체득하신 그 지혜,  
그리고 그 진리에  이르는 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며  설하시는 
자비는 우리가 아무리 찬탄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완성된 인간상을 발견하고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갖
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경배하는 의미
입니다.  보신불로서의 부처님에게  드리는 우리의 경례는 우리 자신이 
마침내 부처가 되고야 말겠다는 다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상 강
조하는 것이지만 우리  자신이 사실은 깨닫거나 말거나 부처임에  조금
도 변함이 없지만 그 사실을 망각하고 우리  자신이 살아오면서 쌓아온 
이 고정관념의 덩어리를 우리 자신이라고 믿기 때문에  현재 우리는 중
생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거짓 나는 오랜 시간을 
두고 형성되어온 것이라서 하루  아침에 무너뜨려지지 않습니다.  우리
의 하루 하루의 삶을 반성해보면  나와 너, 나와 사물을 따로따로 구별
하면서 자꾸만 분별의 울타리를 높여만 가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길은  이러한 차별이란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을 깨닫고 나면 나와 너가 모두 한마음인 더없이 평안한(無上安穩)
의 경지에 이르는 그 길인 것입니다.  그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참다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야할 길입니다.  그 멀고 험한 길을 참
고 묵묵히  걸어갔을 때 우리가 도달하는  참다운 우리의 모습에  대한 
동경과 다짐,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보신불에게 경배하는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법신불, 즉 진리의 당체에  대한 경례야 말로 그 모든 우스
광스러운 모양에도 불구하고  생명도 없는 불상에다 대고 절하는  진짜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진리란  구체적으로 무엇이냐하면 '우리 자
신의 마음을 떠나서 나라고 집착할 아무것도 없으며(색즉시공) 그 마음
역시 공한 것이지만 무한한 작용을 가지고 있는 오묘한 것이다.(공즉시
색)'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시도  마음없이 살 수 없으며 그 마음은 
내 마음, 네 마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똑같은 한마음인 것입니
다.  우리가 허공에다가  집을 짓고 여기는 내집, 저기는 네집  하고 한
정을 짓지만 그런다고 허공이 나누어  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무
리 쪼개고 쓰고  해도 우리는 이 삼라만상을 모두 있는  그대로 포함하
는 단 하나의 허공속에서 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망각하
고 내가  쳐놓은 울타리  안만이 내공간이라고 한정지어놓으면  우리는 
그 나머지 무한한  공간은 결코 이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한마음도 그와 같아서  내것이라는 집착만 포기하면 그순간 그냥  전부 
내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집착을 포기하는 행위가 진리 그 자체로서
의 부처님에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름을 법신불이라고 붙였지만 사
실 법(法)도 없고 신(身)도 없고 불(佛)도 없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렇
기만 하다면 부처님에게 절을 해도  좋고 안해도 좋습니다.  그냥 그대
로 모두 좋은 것입니다.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쁜 것은 중생심에서나 
그런 것입니다.  

  절에가서 절을 하되 뭔가 대상이 있어 절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바로 우상숭배에 불과한 것입니다.   절을 하는 행위는 결국 나를 점점 
버리는 행위입니다.  내 욕심, 내 증오심, 내 어리석음을 하나하나 버려
서 마침내는  아무것도 집착할 것이 없을  때 진리는 스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방편으로서 불상도 만들고 나무아미타불도 외치는 것이
지만 그것은 내 마음이외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단에 해당하
는 불교용어는 외도(外道)라는 것인데  이것은 한마디로 진리라는 것이 
뭔가 실체로서 고정되게 존재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컨대 세상은 영
원히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외도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영원
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이 또한 외도입니다.  그리고 세
상은 영원하기도 하고 영원한 것이 아니기도 하다고  믿는다면 이 또한 
외도입니다.  만일에  세상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이 아닌 것
도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이 또한  외도에 불과 합니다. (나가르주나의 
대지도론 참조)  참 어렵죠?  그럼  도대체 뭐가 진리입니까?  그냥 다 
놔 버리십시오.  그럼 참 편합니다.  진리니 뭐니  따지고 말 것도 없습
니다.  그런데 이  말 듣고 안 편한 사람이 더 많지요.   그렇게 하나도 
안 따지면 세상을 어떻게 삽니까?  내 처자식, 내 친구, 내 재산, 내 지
식,  그거 다  버리고 어떻게 삽니까?  걱정말고 다 버리세요.   버리란
다고 그거 가져다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절에다 다  바치라는 뜻이 아닙
니다.  집착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건 우리 자신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집착을 버리고 나면 정말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 좋은 
친구가 되고 내 재산 마음껏 걸림없이 풍족히 쓸  수 있고 지식인 노릇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황금 덩어리를 파묻어 놓고  '이건 내꺼야!' 하
고 집착만 하고 있으면 뭐 합니까?  필요할 때  마음껏 써야 정말 자기 
재산이지.  우리 마음이 바로 그 황금 덩어리랍니다.   그래도 잘 안 믿
기지요?  사실 저도 아직 못  믿고 있답니다.   말은 뻔히 그런줄 알고 
이렇게 뭔가 있는  척 하지만 저 역시 제 황금덩어리를  어디다 꼬불쳐 
두었는지 아직 못  찾고 있습니다.    있는 척하기는 참 쉽지요.   정말 
있기가 힘들어서 그렇지.(근데 뭐가 있기는  정말 있는 건가? ^_^) 그리
고 있는 척  아무리 해 봐야 내 살림에  아무 보탬이 안 되는 줄  날이 
갈수록 절실히 느낍니다.   그래서 한마음 찾기  모임을 시작한 것입니
다.  더이상  그놈의 고정관념이라는 업보에 끌려  다니지 말고 제대로 
좀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말입니다.    누구라도 환영입니다.  이  마음 
좀 잘 다스려서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보자고 생각하시는  분, 세일 할 
때 빨리 오세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송 연호 합장.
  yonho@nayo.um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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