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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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sjyoun (예리큰아빠)
날 짜 (Date): 1998년 9월 23일 수요일 오전 11시 33분 25초
제 목(Title): 불교사 1백장면-문아원측과 유학승


번호 : 16/3390                 입력일 : 98/09/23 09:49:11      자료량 :114줄

  제목 : 불교사 1백장면-문아원측과 유학승

 교육열이 높았던 삼(사)국인들은 대부분 당시 세계의  중심지였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법명을 알 수 있는  유학승들의 숫자만 해도 약  3백여명에
이른다. 고구려의 승랑과 바야, 백제의 겸익과 현광,  신라의 각덕과 안홍 등
을 필두로 한 해외유학파들은  삼(사)국의 재원이었다. 이들은 혜공-혜숙-대
안-원효-사바(복) 등으로 대표되는 국내파와 함께 신라불교의 양대 축을 형
성했다.

 무릇 사람을 키우는  나라는 흥하고 죽이는 나라는 망하게  마련이다. 경쟁
력과 비전이 있는 그룹은  언제나 ‘후생’을 통해 자신들의 미래를 확보한
다. 때문에 한  나라(정부)나 교단(대학)의 흥망은 인재의 양성과 발탁의  유
무에 달려있으며, 그들의  힘은 거기에서 배출된 인물들의  도덕성에 기초한
대국가(사회)적 공헌도에서 나온다.

 석학의 평가 기준에는  자기 일대의 성취만이 아니라  자기를 뛰어넘을 수
있는 후계자의 양성까지  포함된다. 용수와 미륵이 그러했고  현장과 지엄이
그러했다. 승랑과 문아(613~696), 무상과 의통, 지눌과  휴정, 경허와 효봉 등
이 그러했다. 또  고유섭과 이병도, 양주동과 조지훈, 박종홍과  이상은 등이
그러했다.

 스승들은 ‘후생가외’(後生可畏)를 이상으로 삼았고  제자들은 도제관계에
의해 스승에  가려있었으나 스승 못지  않는 성취가 있었다. 하나의  학통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스승의  통찰과 열정만 가지고는 아니된다.  거기에는 스
승에 견줄만한  근기를 지닌 진정한 계승자의  헌신적인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학통은 진리에 대한 확신에 찬 스승과 제자의  상호 도덕성과 믿음 위
에서 구축된다.

 거기에서 새로운  물결을 주도할  인물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600~700년대
동아시아에는 이러한 그룹들이 여럿 있었다. 17년 동안의  인도 유학을 마치
고 돌아온 현장의  문하에는 신방/가상/보광/규기와 같은 고족(高足)들이 있
었다. 또 지엄에게는 의상/법장과 같은  출람(出藍)들이 있었다. 이와 동시에
문아(원측)에게는 도증/승장/자선과 같은 현량(賢樑)들이 있었다.

 특히 문아의 학통은  신라학통과 중국학통, 서장학통과 일본학통으로  계승
되었다. 신라학통은 직제자 도증에  의해 신라의 태현에게로 이어졌으며, 중
국학통은 신라인 승장과 중국인  자선 등에 의해 중원으로 광범위하게 펼쳐
졌다. 서장학통은 중국인 담광과 서장인 법성 등에 의해서, 일본학통은 선주
와 양산 등에 의해 상승되었다.

 신라 왕손 문아는  3세에 출가한 뒤 15세에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이르렀
다. 그는 동문의 사형 현장이 사사한 법상과  승변 화상에게서 〈섭대승론〉
의 담론을 익혔다.  이어 당 태종에게 도첩을 받고 장안  원법사에 머무르면
서 대승의  기초학인 〈비담〉 〈성실〉 〈구사〉  〈바사〉 등의 논서들을
열람하였다.

 649년 당 태종이  죽자 ‘태종문황제’라는 묘호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문
아는 묘호(묘휘)를 피하기  위해 법명 대신 자인 ‘원측’을 사용하게  되었
다. 문아는 현장의 귀국(645) 전에  이미 구역 유식 대부분의 경론에 정통했
었다. 거기에다가 현장이 가져온 신역 경론을 번역하는  역장에서 증의의 소
임을 맡아 〈유가사지론〉과  〈성유식론〉으로 대표되는 신역 유식의 골수
까지 흡수하였다.

 당시 6개국 언어에 정통하였고  범어와 한어에 모두 능통했던 문아는 현장
역장의 ‘증의’에 적임자였다. 현장이 번역의  완성도를 높이는 ‘증의’를
부탁했다는 점에서 문아를  단순히 제자로 여긴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
다.

 하지만 증의를 맡았다고  해서 문아를 현장학통을 이은  제자라고 할 수는
없다. 제자라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또 씨족 미상, 도청설,  인명(불교논리
학)도 모른다는 사실 왜곡 역시 자은학통의 전승자료를 중심으로 편집한  찬
녕의 〈송고승전〉  〈규기전〉과 〈원측전〉의 두찬(杜撰, 틀린  곳이 많은
저작)에 기인한다.

 문아는 말년에 실차난타의  역장에서 신역 〈화엄경〉(80권, 695~699)을 증
의하다가 불수기사에서 입적(696)했다. 그의  육신은 용문 향산사 불쪽 골짜
기에서 다비되어 백탑으로 세워졌다가,  다시 종남산 풍덕사로 옮겨졌다. 신
라의 최치원은 문아의  200주기(896년)에 〈고번경증의대덕원측화상취일문〉
을 지어 ‘문아’대사의  법명(휘)을 복원시키고 측천무후에 의해  ‘여불‘
(부처님과 같은) 대접을 받았던 대덕으로 명예회복을 꾀하였다.

 문아의 입적 419년  뒤인 정화 5년(1115)년에 4월 8일에 동주  용흥사 인왕
원의 광월법사의  발원에 의해 서안 흥교사의  현장법사 탑 왼쪽(오른 쪽은
규기탑)에 세워졌다. 하지만 광월법사의 문아  탑비 이전은 이후 〈송고승전
〉의 현장-규기의  ‘독강(獨講) 도청설’에 입각한 ‘현장제자설’을  합리
화하는 기제가 되었다.

 역사는 역사가의 사관에 의해 끊임없이 왜곡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은학통 상승의 문아 전기류들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불수기사에서
입적한 뒤 다시 세  번이나 옮겨졌던 문아대사의 탑비! 고독했던 불학자  문
아대사는 이후 또 몇 백년 동안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중화민국 22년(1933)에  측사탑(문아탑)의 기단  감실에 모신  소상(塑像)과
후면 전각에 안치된  판비(板碑)를 보고 새롭게 선각된 원측화상 진영과  〈
원측법사상찬〉과 더불어 1300여년 동안  겨우 세 번 정도의 문아대사를 기
리는 행사(기록상)가 열렸음을 알 수 있다.

 지난(1998) 6월 30일,  경주 불국사의 설조, 부산  성불사의 성산, 정수사의
원광, 소원사의 송월, 포항 보경사의 진현, 죽림사의 향공, 경주 기림사의 법
일화상 등 6개  사찰이 수희 동참하여 조성한  1천관 이상의 대형 한국종이
중국 서안의 흥교사에 봉안되었다. 이날 양국  1천여명의 불자들이 참석하여
〈한국 범종  타종식 및  범종각(2층) 낙성법회〉를 전통불교의식으로  열어
고독했던 문아대사의 탑비를 위무했다.

 고국을 떠나  이국을 무대로 활동함으로써  우리에게 잊혀졌던 문아대사의
삶과 생각이 이제  한국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7세기  동서아시아에 한
국인의 위상을 떨쳤던  문아대사! 신라불교는 동시대에 문아-원효-의상같은
거인들을 백여명 이상 출현시켰으며, 그 위에서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 등
과 같은 금자탑을 세울 수 있었다.

 서명 문아학통과 더불어  해외유학파였던 원광, 안함, 자장, 신방,  명랑, 의
상, 의적, 순경, 현범, 혜관, 승전, 무상,  지장, 무루, 혜초 등의 성취 역시 중
국과 일본의 사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들의  저술이 중국인과 일
본인의 유수한  저술 속에 다수 인용되고  있음에서 해외유학파들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

 경쟁력 있는 인재를 키우고 적재적소에 쓸 줄 알았던 신라불교의 자신감은
오늘 한국불교에 많은 시사를 주고 있다. 자기의  기득권이라는 좁은 울타리
를 넘어서서 새로운 인물들을 키우는 것이 ‘백년의  불사’를 하는 것이다.
지난 신라불교의 ‘정면’과  오늘 한국불교의 ‘반면’에서 내일 우리불교
의 ‘전면’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고영섭 동대 불교학과 강사
 *발행일(1690호):1998년 9월 22일 , 구독문의 (02)730-4488
  < 한장의 불교신문 한사람의 포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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