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sjyoun (예리큰아빠) 날 짜 (Date): 1998년 9월 14일 월요일 오후 02시 06분 39초 제 목(Title): 위대한 전법자들-지장 번호 : 14/3370 입력일 : 98/09/14 13:41:57 자료량 :132줄 제목 : 위대한 전법자들-지장 지장(地藏, 696~794)스님. 신라왕족 출신. 구화산에 평생 머무른 민중 의 성자. 중국 지장신앙의 개조. 육신보살. 최근들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 지장스님의 면목들이다. 그러나 1천2백년동안 스님은 철저히 잊혀진 존재였다. 그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서(史書)는 전혀 없다. 겨우 중 국의 〈송고승전〉과 이를 토대로 후일 만들어진 〈신승전(神僧傳)〉 과 사지(寺誌) 현지(縣誌)등 정사로 쳐주지 않는 기록 뿐이다. 그러나 스님은 분명히 실존 인물이다. 그것도 1천2백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지장보살의 화현으로 존경받고 있는 성자다. 매년 7월30일 스님 의 열반일이면 중국 전역에서 10여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스님을 추 모한다. 천년전 약소국의 한 신라인이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지금 껏 인민의 존경을 받고 있다면 이는 유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안타깝 게도 국내 학계는 아직 별다른 관심이 없다. 사료가 없다는 이유 때문 이다. 지장스님은 속성이 김씨로 신라왕족 출신이다. 신라왕자라는 주장도 있지만 왕자일 가능성은 적고 왕족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송고승전 〉에는 신라국 임금의 지속(支屬)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스님의 속명 이 김교각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또한 근거가 희박하다. 동국대 김영태 교수는 “신라당시 스님들은 속명을 남기지 않았고, 교각이라는 이름은 후대에 위작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고 있 다. 따라서 법명인 지장스님이라고 부르는게 타당하다. 신라에서의 행 적에 관한 기록은 없고 다만 당나라 개원7년(719년) 중국땅에 첫발을 디뎠다는 기록이 전한다. 신라 성덕왕때 〈송고승전〉에는 “그는 마 음은 자비스러우나 얼굴이 무섭게 생겼고 영특했다. 머리를 깎고 출가한 뒤에 바다를 건너 돌아다니면서 석장을 떨치고 여러곳을 여행하다가 구화산에 이르러 마음에 들어서 바로 그 봉우리 깊이 찾아가 살았다”고 기록돼있다. 또 체격이 칠척장신에 힘이 장정 백명을 당했고, 정수리에 뼈가 솟아 특이한 모습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24세때 중국에 온 청년 지장이 오른 구화산은 대체 어떤 산인가. 높 이 1342미터 구화산은 원래 구자산(九子山)이라고 불리다가 당대(唐 代) 시선(詩仙) 이백이 아홉송이 부용을 닮아 붙인 이름이다. 양자강 동쪽에 있고 깍은 듯이 험준한 산맥이 천리를 뻗어있어 인적이 전혀 없던 산이다. 다만 5세기경 장단이라는 승려가 절을 세우고 포교를 하 다 토호들의 질투와 관가의 탄압으로 절이 불살라지고 쫓겨나 법맥이 끊겼던 곳이다. 그런데 지장스님은 왜 하고많은 큰 절들을 두고 산짐승만 우글거리는 구화산(九華山)에 올랐을까. 우리는 이를 당시 시대상황에 미루어 짐작 해 볼 수밖에 없다. 스님이 입당하고 활약하던 시기는 당의 쇠퇴기였 다. 당나라 현종대의 전성기는 절도사 안록산과 그의 부장 사사명의 난(755~763)이 시발이 돼 걷잡을 수 없는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당시 불교계의 상황도 스님의 구화산행을 설명해 준다. 측천무후에 의해 총애를 받던 신수(神秀)와 신수의 북종선은 무후의 사후 계속적인 공격을 받았다. 게다가 안녹산의 난으로 수도 장안이 파괴되자 신수의 도시불교는 뿔뿔히 흩어졌다. 무너진 도시불교 대신 산악불교로 대표되는 선종이 이 공백을 메꿔갔다. 남악회양의 제자 마 조도일 석두희천은 바로 지장스님과 동시대 인물들이다. 지장의 구화산행에는 선종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시기적으로 보자면 오히려 앞섰다. 구화산에 들어간 스님은 지금의 동청 양현고을에 위치 한 구화산 정상에 자리를 잡았다. 화성사(化城寺) 동쪽 골짜기 절벽위 에 겨우 한사람 수행할만한 동굴, 동암이라고 불리는 이곳서 스님은 수행정진을 시작했다. 몇알의 쌀과 도토리죽을 끓여 먹었다 한다. 그러 다 시주 인연을 만났다. 〈송고승전〉에 따르면 제갈절 이라는 노인과 그 일행이 산에 올라와 보니, 산이 워낙 깊고 험해 아무도 없는데 오직 지장 한사람이 동굴에 서 눈을 감고 참선을 하고 있으며, 방에는 흰 흙에 약간의 쌀이 섞인 밥만이 있을뿐 고행을 하고 있어 이에 감탄 절을 지어주기로 했다고 한다. 스님의 명성이 구화산 일대에 나기 시작했다. 하루는 산밑으로 법문을 다녀올때 일이다. 민양화라는 청양현 사는 이의 아들이 큰 호랑이에 잡아먹힐 위기에 처했는데 스님은 “죽일놈 의 짐승이로고”하며 호랑이를 쫓았다. 이를 계기로 구화산 일대의 땅 을 소유하고 있던 민양화가 구화산 전체를 스님에 시주했다. 곧이어 자신의 아들을 출가시키는데 이가 곧 제자 도명이다. 또 민양화 자신 도 출가한다. 지금도 화성사 지장스님 보살상 옆에는 이들의 상이 좌 우에 모셔져 있다. 명찰 화성사가 세워진 해는 756년이다. 제갈절 민양화와 백성들의 시 주로 절을 짓기 시작했다. 백성들과 함께 절을 짓고, 연못을 파고, 나 무를 심었다. 이때부터 구화산이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781년에는 군수 장암이 상주하여 황제가 화성사라는 편액을 하사했다. 794년 지장스님 은 99세의 나이로 대중들을 모아놓고 작별을 고한 다음 가부좌를 튼채 열반에 들었다. 스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3년이 지난위 관을 열어 육신이 썩지 않으면 그대로 개금하라”고 남겼다. 3년 뒤 관을 열어본 제자들 은 스님의 신통력에 감복, 797년 등신불을 안치했다. 이것이 현재 화성 사 육신보전에 안치돼있는 지장스님 육신보살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스님의 삶이 던지는 역사적 교훈들이다. 첫째 지장스님은 오지인 구화산을 백성의 삶터로 바꾼 개척자였다. 스님은 당나라에 건너가면서 신라의 볍씨를 가져가 이를 농사에 사용 케 했다. 이와 함께 차의 일종인 금지차, 향기로운 소나무 열매인 ‘오 차송’ 등의 씨앗도 함께 전하고 백성들이 농사지을 수 있게 했다. 동 암앞의 넓은 평지에다 땅을 파 저수지를 만들고, 수로를 내 벼농사를 지었는데 이때 개간한 논이 수천평에 달했다고 한다. 이밖에 뽕나무를 심고 삼베옷을 짜서 입게하는등 백성들의 삶을 개선 키 위해 여러 가지 사업을 함께 펼쳤다. 스님이 구화산 주변 백성들의 절대적 귀의를 받았던 것은 이같은 노력 때문이다. 둘째 스님은 청규를 제정한 선종에 앞서 이미 자급자족의 노동문화를 실천했다. 마조의 제자 백장 회해(720~834)가 백장청규를 제정하며 ‘ 一日不作 一日不食’을 실천하기 이전 이미 지장문하의 스님들은 노동 을 하며 수행정진하는 선농일치의 전통을 세워가고 있었다. 식량은 철 저히 자급자족 하였으며 노소를 막론하고 노동을 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스님과 그 문하들은 여전히 청빈한 생활을 하여 “여름이 면 백토를 섞어 먹었고 겨울이면 옷이 얇아 화롯불 신세를 졌다. 또한 노소가 없이 황무지를 일구고 땔나무를 베어 자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셋째 지장스님은 선교양면에 밝았고, 양자의 회통이라는 신라특유의 사상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스님은 “시방세계 넓은 우주안에 오직 불 성이 충만하며, 조금도 빈곳이 없으니, 사바세계 중생들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라”는 가르침을 평소에 자주 설했다고 한다. 또 구화산에 올라가 홀로 오랜기간 수행했다는 사실에서 선지를 읽을수 있다. 또 〈아미타경〉 〈화엄경〉을 연구하고 법문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교학에도 밝았던 것 같다. 구화산에 뿌리를 두고 1천2백 년간 이어온 지장신앙은 이를 방증한다. 구화산은 당대불교의 일맥을 형성해 가며 중국불교 4대성지다. 백성들은 육신보살로 안치된 지장스 님을 지장보살의 화현으로 여겼다. 덕분에 중국에 내로라하는 모든 종 파가 멸실됐지만 오직 구화산 불교만이 1천2백년을 이어왔다. 구화산내에는 당대 13곳의 사찰이 송대에는 29곳으로, 청대에 이르러 는 사찰 1백90곳 승려도 5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것이 모두 한사 람의 원력에서 시작됐다. 그것도 신라인의. 〈鄭雄基 기자〉 *발행일(1689호):1998년 9월 15일 , 구독문의 (02)730-4488 < 한장의 불교신문 한사람의 포교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