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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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sjyoun (예리큰아빠)
날 짜 (Date): 1998년 9월  1일 화요일 오전 09시 03분 04초
제 목(Title): 위대한 전법자들-일본 행기


번호 : 17/3335                 입력일 : 98/08/31 13:26:32      자료량 :127줄

  제목 : 위대한 전법자들-일본 행기

 일본의 한 국사사전에는 일본지도를  최초로 그린 이가 행기스님이라고 적
고 있다. 그런데 행기스님은  백제왕족인 왕인박사의 직계 후손이다. 어떻게
백제왕족 출신의 스님이  일본최초의 지도를 만들 수  있었을까. 일본사람들
은 좀처럼 행기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지만 최근 국내 재야사학
자들의 노력으로 일본땅에 한국불교를 심은 행기스님의 위대한 삶이 하나둘
알려지고 있다.

 행기스님(교오키 行基, 668-749)은 백제인 부친 고시다케치(高志才智)와  역
시 백제인 모친  하치다(蜂田)사이에 카와치(河內, 지금의 오사카)  가원정에
서 태어났다.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한 그 해다.  본래 카와치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건너온 수많은 도래인들이 살던곳. 4세기  일본에 유
학을 전한 왕인박사의 직계후손들도 이곳에 정착하고 있었다.

 독실한 불자였던 부모의  서원에 따라 행기스님이 출가한  것은 15세 되던
해이다. 스님은 처음에 신라에서 건너온 혜기스님을 찾아 나라(奈良) 약사사
에서 3년동안 ‘유가유식론’을 공부했다. 그 후 백제인  도소화상(道昭和尙,
629-700년)을 찾아 선(禪)과 초인적인 신통술을 함께 익혔다. 중국 현장법사
의 제자였던 도소화상에게 중생구제의 원력을 배워 평생 은사로 존경했다.

 그는 이어 백제  고승 의연법사(義淵法師, ?-728), 덕광법사를 차례로  찾아
불법을 배웠다. 이  가운데 덕광법사는 원효 의상스님에게  수학했던 신라출
신 고승이다.  덕광스님은 원효스님의 저술 〈금강삼매경론소〉와  〈대승기
신론소〉 등을  일본에 전했는데 행기에 경론과  더불어 원효스님의 일생을
가르쳤다. 스님은 24세때에 덕광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행기스님이 원효
의 삶에 감명받았음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수 있다.

 당시 일본은 율령체제가 정비되던 시기. 645년 발생한  대화쿠데타 이후 천
황들은 중국식  율령을 모방했지만  국가체제는 아직 원시적이었고,  이들은
민중의 생활을 전혀 도외시했다. ‘일본’이라는 국호 역시  행기가 가장 활
발히 대중구제사업을 전개한 720년에야 사용됐을 정도다.


 행기가 세상에  나올 무렵에는 가뭄까지  겹쳤다. 왕실은 춘궁기에  곡식을
꿔주고 가을엔 이자를  5할의 고리로 거뒀고, 730년에는 백성의  9할 이상이
등외호(等外戶)로 구제를 필요로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왕실과 귀족
은 민중의 피폐한 생활 따위는 아랑곳 않았다.

 하산한 그의 눈에 비친 백성들의 삶은 처참했다.  불법을 전하는 일보다 더
급한 일은  이들을 보살피는 일이었다.  먼저 자신이 수행하던 갈목산  밑에
빈민들이 거처할 집을  만들었다. 도성을 짓는 노역에  동원됐다가 부상당한
이, 굶주림에 못이겨  혹은 세금에 못이겨 도망친 이들을 위해  자그만 빈민
수용소를 만들었다.

 이곳을 보시옥(布施屋)이라 불렸다.  노동의욕을 불어넣어 주고, 삶의  터전
을 스스로 다지게 하며,  불법을 배우는 삶의 터전이라는 의미였다. 갈곳 몰
라하던 부랑인들은  새삶을 찾고 함께  일했다. 이른바 공공 취로  사업으로
연못을 파고, 뚝을  쌓고, 다리를 놓는 일들이었다. 효과적인  구제사업을 위
해 지도(地圖)제작이 급하다고 생각한 스님은 지도 제작에도 나섰다. 이것이
1천2백년전에 완성된 일본 최초의 지도다.

 사람들이 모일수록 중생구제  사업의 규모도 커졌다. 그의 고향  인근인 난
파(오사카) 지역만해도  농민을 위해 도랑을 파서  강물을 끌어주고, 홍수에
대비해 배수시설도 갖춰 주었다. 특히 2,291미터의 ‘굴강’을 파 배들이 다
니게 하고, 해마다  범람하던 ‘정천’에는 9483미터의 긴  제방을 쌓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당시로선 대공사다. 이때가 스님이 30대 초반일때다. 스님의 설법을 듣기위
한 청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하고 민중들은 그를 보살로 생불로 추
앙하기 시작했다. 오늘로 치면 ‘복지포교’  ‘노동포교’라 할만한 스님의
포교방법은 무소유와 자재의  표상이자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것이었다. 먼
저 숙소를 지어  부랑인들을 한데 모으고, 이들이 공동 노동할수  있는 일을
주어 생활을 설계하게 한후 또다른 지방으로 훌쩍 떠나는 일을 반복했다.

 틈틈이 전한  불법은 백성에게 감로수였다.  마치 원효스님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행기스님이 평생 지은 절은 자신의 고향집에  세운 가
원사를 비롯 모두 49개였다. 한곳에서만 1천명이상의 민중이 모여들고, 수천
명의 민중이 그의  불법을 들었다 한다. 당시  일본 인구는 5백만명,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스님을 따르는 이들이 늘자 다급해진 왕과 권신의  탄압이 시작됐다. 그 가
운데 왕의 외척 불비등은 대표적 인물이다. 불비등과  그의 장남 무지마려는
40여년동안 행기스님을 괴롭혔다. 민중의 지도자로  추앙받는 스님의 영향력
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들의 간계에 의해 수차례  승니령과 조칙이 발표됐
다.

 행기스님은 조칙에 미동조차  않았다. 계속해서 중생구제 포교사업을  활발
히 펼쳤다. 불비등은  행기스님을 잡아넣기위해 자신이 임명한  승관들을 부
추겼지만 이들조차 오히려  스님을 감쌌다. 안달이 난 불비등은  717년 스님
을 요승이라하여 체포했다. 은광사에서 법회를 열때다. 명에 따라 형부 관리
들이 들이닥쳐 스님을 잡아 갔다.

 그러나 스님은 이적을 부리고, 관리들을 감화시켜 풀려났다. 인욕으로 관리
들을 절복시킨 스님은 더더욱 민중들에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떠받들어졌다.
불비등 가문과 왕실은 스님을 눈엣 가시처럼 여겼다.  그러나 스님의 신통력
이 겁나고 백성들의 추앙이  두려웠다. 그래서 화해책을 썼다. 718년을 시발
로 수차례 대사면령을 발표했다.

 중생구제사업의 일부를 받아 들인것도 이 때 부터다.  728년 실시한 삼세일
신법(三世一身法)이 대표적인 것. 이법에 따라 저수지나 논밭을 개간할 경우
3대에 한해 상속권이 주어졌다.  또 시약원을 설치해 무료로 약을 나눠주고,
비전원에 가난한 고아들을 모아 양육키도 했다. 물론  왕실의 이같은 행위는
소규모였고, 더구나 생색내기 정도였을 뿐이다.

 이 무렵 행기스님의  보살행은 일본전역을 뒤흔들 정도였다.  농촌개간사업
과 토목사업(댐 저수지 수로 축조)은 그 자체가 포교의 훌륭한 방편이 됐다.
예를들어 스님은 홍수로 강물이 범람해서 다리가 떠내려가는 것을 감시하기
위해, 다리 근처에  절을 지어 감시시설을 겸했다.  만약 다리가 유실되었을
때 복구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민중의 생활공간을  겸한 포교도량이라는 독특한  모델은 전적으로 스님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행기스님을 2대에 걸쳐 비방하고, 탄압하던 불비등과
그의 아들들이  사망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왕이 스님께  귀의했던 것이다.
741년 그는 신도들의 자발적 참여로  새 도읍지로 통하는 큰 다리를 건설했
는데 이 다리 이름이 공인대교이다.

 이 공사에는 740명의  남자신도들이 참여했다. 이 때  성무천황은 행기스님
께 청원해 도성 공사를 부탁했다. 스님이 이를  수락하자 5천5백명의 백성이
자발적으로 부역에 임했다.  이를 계기로 성무천황은 스님에게  진심으로 귀
의했다. 745년에는 대승정으로 모시고, 이를 기해 신도 4백명을 일시 출가케
했다.

 그리고 왕은 행기스님께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비로자나부처님 금동불상을
조성해줄 것을  부탁했다. 나라 동대사 대불(세계문화유산  지정)이 바로 이
부처님이다. 이 대역사에  행기스님이 나섰다는 것이 최근  들어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749년 겨울에 완공된 이 불상의 조성이 747년 시작됐고, 당시 행
기스님이 ‘대승정’이었음을 감안하면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불상 조성은 749년 겨울에 끝이났지만 스님은 이해 봄 교토 관원사에서 열
반에 들었다. 유체에서는 환한  빛이 났고,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울며 애통
해 했다 한다.  철저히 굴절되고 왜곡된 〈속 일본서기〉도 그의  생을 누락
시키지는 못했다. 승려신분으로  일본 정사에 기록돼 있는 사람은  불과 6명
인데 이가운데 행기와 그의 스승 도소는 민중속에 꽃핀 보살의 삶으로 그려
져있다. 〈鄭雄基 기자〉
 *발행일(1687호):1998년 9월 1일 , 구독문의 (02)730-4488
  < 한장의 불교신문 한사람의 포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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