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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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sjyoun (예리큰아빠)
날 짜 (Date): 1998년 7월 13일 월요일 오후 02시 42분 42초
제 목(Title): 위대한 전법자들-문아원측


번호 : 15/3214                 입력일 : 98/07/13 13:28:33      자료량 :123줄

  제목 : 위대한 전법자들-문아원측

 역사는 항상 승자의 몫인가?  패자나 비주류는 종종 승자에 의해 폄하되거
나 왜곡돼 이름도 남김없이 세월에 묻혀버린다. 불교교단사  역시 이 냉혹한
생존의 법칙에서 예외일수 없다. 당대(唐代)고승 신라인 문아 원측대사.

 유식학은 물론 화엄 반야 법화  천태 정토등 각 종파를 회통하는 혜안으로
당시 동아시아 불교계를 풍미했던 대 사상가이지만 경쟁자인 중국인들에 의
해 철저히 왜곡돼 후일  우리 역사에서 1천3백년동안 족적조차 제대로 찾기
힘들었던 비운의 인물이다.

 문아(文雅, 613-696)는 경주서 태어난 신라국의 왕족출신이다. 총명함을  타
고난 문아는 3세에 출가했고 구법을  위해 15세에 당의 수도 장안에 들어갔
다.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승려가운데는  구법(求法)을 위해 중국유학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사서에 이름이 남은  당대 한국유학승만도 1백80명
이다. 문아도 고구려 백제와 신라간의 전쟁이 점차  치열해지던 즈음에 중국
에 들어갔다.

 627년 장안에 도착한 그는 처음에 법상(576-645), 승변(568-647) 두 법사에
게〈섭대승론〉을 배웠다.  법상 승변은  〈대당서역기〉의 현장(602-664)이
인도여행을 가기전에  사사했던 섭론학의 두  거두다. 현장이 629년  장안을
출발했으므로 두사람간의 조우가  있었음을 짐작할수 있다. 그러나  두 사형
사제간의 짧은 인연은 후일 현장의 제자들이 문아에 가한 악의적 왜곡과 탄
압으로 악연이 되다시피한다.

 현장이 떠나고 난 뒤 문아는  유식론과 구사론 성실론 등을 열심히 공부했
다. 그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졌다. 최치원은 후일 〈고번경증의대덕문아원측
화상휘일문(故飜經證義大德文雅圓測和尙諱日文)〉이라는  글에서 문아가  “
언어에는 바야흐로 6국을 통하였고 능히 천언을  말했다. 그러면서 우수하게
범의(梵義)를 탐구했다. 문황제(당태종)는 보배로 알고 곧 도첩으로  승을 삼
았다”고 찬탄했다.

 당 태종은 이런  그를 대덕(오늘의 강백)으로 삼아 수도인  장안 원법사(元
法寺, 후일의 서명사)에 머무르게했다. 문아는 여기서 왕실에 소장된  경장을
접해 비담 성실 구사 등의 학문을 섭렵할수  있었다. 현장이 5만리 서역여행
의 긴 여정을 마치고 645년  장안에 돌아오면서 문아의 일생은 반전을 거듭
했다.

 송복의 〈대주서명사 고대덕원측법사 불사리탑명병서〉에는 “현장이 인도
에서 돌아오자 문아는 그와  만나 대번에 의기가 투합되었으며 현장의 번역
사업을 도와  불법을 동쪽으로 흐르게하고 크게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
다. 현장은 당태종의  지원을 받으며 대대적인 역경사업을  진행했고 문아는
여기에 번역을 최종 감수하는 증의(證義)로 참여했다.

 성유식론소 10권, 해심밀경소  10권, 인왕경소 3권, 금강반야경소, 반야심경
소 등의 일부는 티벳대장경에 실릴정도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문아는 유
식계통의 논소를 찬술하는데  있어 당시 인도 중국 학계를 양분하던  공(空)
과 유(有) 모두를 회통하는 중도의 독창적인 입장을 띠었다.

〈반야심경찬〉에서 문아는 “천년전에는 불법이 한맛이더니 천년이 지난뒤
에는 공과 유가 대립하여 싸웠다”고 지적하면서 불성, 가르침의 근본(敎體)
과 종지(宗脂), 삼성론, 교상판석,  심식(心識), 수행에 대한 시각까지 교학과
수행전반에 걸친 이설(異說)들을 논파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는 불성이 내재해있고 따라서 모든 중생은 여래의 종
자를 갖고 있다(如來藏)는 문아의 사상은 사변적이고  지적인 논쟁에 치우쳐
있던 당시 인도와 중국불교계에서 찾기 힘든 것이었다.  종파에 구애받지 않
은 독창적인  학설로 인해 문아는 ‘유상유식’을  강조했던 현장의 문하에
의해 철저히 배척받았다. 대표적인 이가 현장의 수제자 규기(632-682)였다.

 자은학통을 세워 법상종의 개조가 된 규기는 문아를 짓밟기위해 갖은 방법
을 동원했다. 〈송고승전〉  원측전과 규기전에는 현장이 제자  규기를 위해
〈성유식론〉을 설하고 있을  때, 문아가 자은사의 문지기를  매수하여 강의
를 몰래 듣고  〈성유식론소〉를 지은 파렴치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규기
와 그 문도들은 문아의 서명학파가 중국땅에서 사라질때까지 공격했다.

 10세기에 지어진 〈송고승전〉을 모태로  현존하는 중국 사서는 모두 이같
은 규기의 입장에서 문아를 폄하했다.〈성유식론소〉가  번역된 해는 문아의
나이 47세되던 해인  660년경인데 현장은 그때 이미 늙고  병들었다. 그러자
문아와 그의 제자들에 대한 모략이 더 극심해졌다.  문아가 종남산에 은거한
것은 바로 이즈음이다. 더욱이 660년에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했
던 시기였다.

 기록은 전혀 없지만 외세를 빌어  동족을 멸한 고국의 참상에 문아의 심경
은 쓰라렸을 것이다.  문아의 종남산 은둔에 대해  송복은 〈사리탑명병서〉
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법사의 성품은  산수를 좋아하여 종남산에
가 운제사에서 의탁하였다. 또 절에서 떠남은 30여리, 한곳에 조용히 살면서
고요히 하기를 8년,  서명사 승려들이 간절히 절로 돌아오기를  요청하여 성
유식론을 강했다”

 당시 왕은 고종이다. 고종은 현장이 664년 입적하고  10여년이 다 지난후에
야 다시 문아를 불렀다.  기록에는 중인도의 고승 지바사라(612-687)가 장안
에 와  경전을 전하자 이를  역출키위해 문아를 불렀다고 전한다.  추측컨데
현장문하의 규기와 그 일파가 기대에 못미쳤거나, 왕이  이들보다 문아를 더
신뢰했던지 둘중 하나일 것이다.

 그 뒤 20여년간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문아가 왕의  요청으로 〈신화엄
경〉을 강하고 번역하다 마치지 못하고 세수 84세인 696년 서명사에서 입적
했다는 것만 남아있다. 문아가 종남산을 나와 장안에서  머물던때는 이미 신
라가 삼국을 통일한 676년 이후이고, 당 조정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거쳐
측천무후가 684년 왕실을 장악했던 시기다.

 무후는 690년  周왕조를 세웠는데 문아는 말년을  봉불업적을 숱하게 남긴
중국 유일의  잔인한 여황제 치하에서 보냈다.  무후는 문아를 여래(如來)로
받들다시피 했다. 인도의 보살논사들이 찾아올때면  어김없이 대사로 하여금
맞이하게 했다. 신라  신문왕이 수차례에 걸쳐 문아대사를  귀환시켜 달라고
요청했지만 무후는 그때마다 완곡히 거절했다. 그만큼 아꼈던 것이다.

 문아라는 법명을 사용치  못하고 원측이라는 자(字)를 사용한 것은  당태종
이 문황제란 묘호(廟號)를 썼고 이 때문에 시호의 앞글자인 문(文)자 이름을
아무도 못쓰게 했기  때문이다. 이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태종무열왕
의 태종이라는 호칭도 무후가  쓰지 못하도록 했다는 <동국통감>의 기록에
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문아가 지금까지도 원측이라고 알려진  것은 중국 불교사가들이 이를 쫓아
원측이라는 이름을 계속 썼기 때문이다. 대사의 법명은  문아 법호는 서명이
고, 원측은  자(字)이다. 법호도 법명도  아닌 자를 써야했던 것은  약소국의
설움이었을 것이다.

 홀홀단신의 유학길, 쉼없는 정진으로  이룬 독창적인 사상, 온갖 협잡을 비
웃기라도 하듯 고요했던 성품은 그의  법향을 동아시아 3국은 물론 멀리 티
벳까지 은은하게 울렸다. 그러나 문아는 결국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입적했다. 대신  그의 신라인 제자 도증이 692년  천문도를 지니고서
신라에 대신 돌아왔다. 문아가 입적하기 4년전에 보낸 것이다.

 그의 삶은 고독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엔 ‘승자가 만드는  역사의 냉혹
함’을 입증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 더 절실하게 이  위대한 고
승의 삶을 관조해야한다. 1천3백년 시공을 넘어 은은한  법향을 전할수 있는
원동력은 자유인의 대원력과 그것을 실천하는 강한 의지에 있다는 것을.
                                                       〈鄭雄基기자〉
 *발행일(1681호):1998년 7월 14일 , 구독문의 (02)730-4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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