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리) 날 짜 (Date): 1998년 5월 2일 토요일 오후 05시 50분 54초 제 목(Title): 도올 벽암록 제3강화,낮에는 해를 보고 밤� <Picture><Picture><Picture><Picture> 도올『碧巖錄』講話 제3화 낮에는 해를보고 밤에는 달을보고 『스님 요즈음 기체존후가 어떠하시옵니까?』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 마조의 마지막 외침은 삶의 무상함과 영원함이 초월되는 순간이었을까? 도올 김용옥 (철학자·한의사) ------------------------------------------------------------------------ 鳥足 千佛이 모인 자리에서는 千佛이 싫어하고 群魔가 득시글거리는 데서는 群魔가 미워하는, 더러운 냄새의, 털 안 깎아 짐승 같은, 法盲僧 하나가 오늘도, 오라지도 않은, 누구네 잔치의 앞자리에 버티고 앉았습. 돌! 『선생님, 도무지 이 작자 우리 문학사에서 해결이 안되는 골칫덩어리올시다. 아무도 건드릴 수가 없고 그렇다고 무시해버리기에는 찜찜한, 저 조선인의 언어의 검은 나락에서 내뿜어대는 유황불 같은, 코가 매캥매캥하고 눈이 찌릿찌릿하고 머리가 어지러운 작자올시다. 선생님밖엔 해결사가 없을 것 같아 여기 책 한 권 두고 가옵니다』 최근까지 「시사저널」 편집국장을 지낸 김훈學兄의 말이다. 『그게 누구요?』 『박상륭이라는 작자올시다』 『七祖語論』! 훈兄이 내 책상머리에 남기고 간 갈등이었다. 전북 장수 촌놈이라던데, 박상륭! 과연 그는 누구인가? 나는 말한다. 『박상륭! 그가 바로 七祖다!』 게 무슨 망발인고? 『그래? 니그 박상륭이 七祖라카는 내 말이 이상타고 생각하는 니가 바로 七祖다!』 朴兄! 말장난이 좀 심하십디다 그려. 우리 훈형 대가리를 어지럽게 해놀 만합디다 그려. 왜 「七祖語錄」이 아니고 「七祖語論」인가? 어록이란 생생한 살아 있는 말들(語)의 꾸밈없는 기록(錄)이다. 그런데 어론이란 그 말들을 논술해낸 잡설(雜說)이다. 어록은 살아 있는 자들의 깨달음의 자취다. 그래서 간결하다. 어론은 죽은 언어들로 꾸민 논설이다. 그래서 장황하다. 그런데 박상륭의 파워는 「語論」에 있질 아니하다. 바로 「七祖」라는 이 한마디, 그 참신한 발상에 있는 것이다. 七祖란 무엇인가? 禪宗史에서 「七祖」란 있을 수 없는 말이다. 왜냐? 흔히 禪宗이란 衣鉢전수의 법통의 역사요, 祖師들 계보의 전승으로 착각한다. 中華第一祖라 불리는 達磨도 天竺의 계보로 말하면 第二十八祖요, 達磨의 법통도 二祖(29조) 慧可, 三祖(30조) 僧璨, 四祖(31조) 道信, 五祖(32조) 弘忍으로 엄격한 衣鉢전수의 계통을 밟아 내려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앞서도 이미 말했지만 제1조 摩訶迦葉으로 시작하여 阿難, 馬鳴, 龍樹, 般若多羅에 이르는 天竺의 계보는 제일 먼저 唐의 智炬의 撰인 『寶林傳』(801년)에 등장하여 『祖堂集』(952년)을 거쳐 『景德傳燈錄』(1004년)에 전승되고 있지만, 이는 명백히 중국인 선종史家의 창작이다. 五燈之首요, 1천7백1人의 傳燈法系의 계보를 밝히고 있는 방대한 禪의 사료집이며, 禪宗의 체계적 역사서라고 말할 수 있는 『경덕전등록』이 세간에 빛을 본 것은 北宋 眞宗 景德 六年, 1004년이요, 때는 趙光胤으로 시작한 北宋정권이 아직 국권의 정초를 다지지 못한 北宋초기였다. 『경덕전등록』의 저자 道元은 法眼宗 사람이며 蘇州承天 永安院에 住하였다는 것 외로는 일절 그 生平이 알려져 있질 않다. 어떻게 이러한 방대한 사료가 이토록 치밀하고 생생하게 계통적으로 기록될 수 있었는지 그것은 아직까지도 의문의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不立文字를 외치는 中國人의 역사기록에 대한 아이러니칼한 집념의 위대성 앞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생각해보라! 지금 우리가 영·정조시절에 서울장안 등지에서 산 사람들의 안방에서 다소곳이 오간 이야기 일천칠백개를 기술한다고 하면 과연 그것이 정확하게 사실적으로 계통적으로 기술될 수 있을까? 『寶林傳』 『祖堂集』과 같은 先行하는 업적이 있기는 했지만, 『전등록』에 수록된 찬란한 선사들의 이야기는 상당부분 창작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추측은 쉽게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전등록』의 전등의 핵심은 一祖로부터 六祖까지 衣法相傳의 법통이다. 그런데 『六祖壇經』으로부터 시작하여 『寶林傳』 『祖堂集』 『傳燈錄』 등의 선종사료가 쓰이게 된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바로 慧能의 南宗禪과 神秀의 北宗禪의 대립의 와중에서 慧能의 적통성과 頓悟見性의 心法印이 우월함을 주창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혜능계열이 신수계열에 대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적법성은 바로 弘忍의 衣鉢을 혜능이 전수받았다는 사실 하나에 매달려 있었다. 神秀의 게송,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莫使惹塵埃.』에 대하여 일자무식꾼이던 慧能이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를 타인의 손을 빌려 내걸어 弘忍의 의발을 전수받았다고 하는 이 이야기 자체가 어찌보면 南頓, 北漸의 宗風의 차이를 전제로 해서 이 양인의 삶의 스토리를 襤化시킨 세간(남방계열)의 창작일 수도 있는 것이다. 中國禪의 출발은 達磨가 아닌 慧能이다. 慧能이 애초에 文字를 모르던 무식꾼이었든지 아니었든지 간에 그가 曹溪寶林寺에서 禪風을 발양하던 때는 그는 이미 文字의 정상을 밟고 있는 위대한 識者였다. 그리고 門下에서 五家七宗의 法系가 다 쏟아져 나왔다. 다시 말해서 慧能을 六祖로 만든 것은 남종선 五家七宗의 장난이다. 남종선이 남종선의 적통을 주장하기 위해 그들의 祖宗인 혜능을 六祖로 만들어야 했고, 그 六祖라는 의미는 一祖인 達磨로부터 六祖인 혜능에까지 내려오는 의법상전의 적통성인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혜능의 위대성은, 혜능을 혜능답게 만드는 가장 위대한 祖宗的인 성격은 바로 이러한 적통성, 의발상전의 법통을 부정했다는 데에 있다. 예수는 예수의 祖宗的 성격을 완수하기 위해 애비를 죽여버렸다. 다시 말해서 요셉은 실부로서 자격을 상실해버렸고, 마리아는 신의 아그네스가 되어버렸으며, 예수는 사생아가 된 것이다. 가부장제적 족보의 권위로부터 예수를 해방시키는 길은 父系를 차단하는 길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예수는 절대자가 되기 위해 예수 이전의 인간족보를 단절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허나 혜능은 혜능의 깨달음의 절대성을 과시하기 위해 혜능 이후의 족보를 단절시킨 것이다. 혜능은 혜능의 의발을 아무에게도 전하지 않았다. 혜능은 본시 달마·혜가·승찬·도신·홍인으로 내려오는 의발을 전해받은 바 없는 인간이었다. 그러니 그 의발전수의 법통은 후대의 사가들이 남종의 북종에 대한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 적통성의 근거로 날조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의발전수의 법통은 혜능에서 完結되는 것이다. 禪이란 바로 그러한 권위의 정통성으로부터 해방되는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법통의 완결은 법통의 부정이다. 六祖는 六祖로서 완성되며 동시에 六祖는 否定되는 것이다. 禪은 법통의 역사가 아니요, 의발전수의 역사가 아니다. 禪은 오직 깨달음의 역사요, 모든 깨달음이란 깨달음으로서 완성되고 단절되는 것이다. 깨달음은 절대요, 절(絶)대란 끊음이다. 禪宗에는 七祖가 없다. 아니 七祖가 있어서도 아니 되고, 있을 수도 없다. 박상륭이 이러한 구극적 진리를 알고 七·八祖를 운운한다면 그의 장황한 잡설은 一論으로 가상히 여겨줄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의 선이 혜능으로부터 출발하고 혜능이 바로 의발전수의 법통을 부정했다고 한다면 禪의 절대적(對를 絶한다) 성격은 명약관화해진다. 禪의 역사는 의발전수의 역사가 아니요, 절대의 깨달음의 점철일 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禪을 의발상전의 비전체계로 곡해하고 있음은 웬 연유에서 일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혜능 신화의 본질을 파악지 못하고 그 傳燈의 燈의 의미를 곡해한데서 생기는 妄見에 불과하지만, 역사적으로 禪이 이렇게 곡해된 배경에는 아이러니칼하게도 외래불교라는 이방문화에 대하여 주체회복을 선언하고 강력한 도덕주의를 표방하며, 排佛의 기치를 높이 올린, 朱子學으로 대변되는 신유학(宋學)이 바로 禪宗의 도통론을 수입하여 자신의 입지를 정당화시키는 무기로 삼은 데서 유래되는 정통론의 보편화가 더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혜능계 남종과 신수계 북종의 대립에서 남종이 남종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의발의 師資相承의 法統을 날조했다고 한다면, 바로 주자는 유학과 불학의 대립이라는 문제의식과 겹치는 靖康之變 이후 南宋의 특수한 정치분위기 속에서 南宗禪의 법통론에 못지 않은 강력한 儒學의 道統論을 날조·고수해야만 하는 어떤 필연성을 감지했던 것이다. 朱子에게 있어서 子思子의 『中庸』이란, 어찌 보면 南宗禪家에 있어서 『六祖壇經』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朱子가 얼마나 강력한 도통론을 관철시키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의 『中庸章句序』에 아주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中庸何爲而作也, 子思子憂道學之失其傳而作也. 蓋自上古聖神斷天立極, 而道統之傳有自來矣. 중용은 어떠한 목적으로 지었는가? 자사자가 도학이 그 전하여짐을 잃어버릴까봐 염려하여 지었다. 대저, 상고의 聖神이 하늘을 이어 인간세의 기준을 세움으로부터 그 道統의 전함이 유래가 있게 되었다. 이 주자의 『中庸章句序』의 前末은 내가 講述한 것을 도올서원의 재생들이 받아써서 낸 책 『도올선생 중용강의』(서울:통나무, 1995) 제3강에 아주 소상히 밝혀져 있다. 여기에 그 「道統」이라는 말이 분명히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로서 朱子는 堯―舜―禹―湯―文―武―周公―孔子―子思―孟子로 이어지는 道統의 전수를 확립했다. 그리고 孟子에서 일단 단절이 생겼던 것을 다시 宋學의 先河, 程子가 이었고, 그 程子之傳을 바로 朱熹 본인이 이었다는 것이다. 慧能은 자신의 衣鉢을 曹溪의 寶林寺에 秘藏시키고 그 전수를 엄금했다. 傳燈의 燈은 그따위 의발로는 相傳될 수 없다는 것이다. 허나 朱子는 堯·舜의 의발을 자기가 程子에게서 물려받았다고 萬方에 고함으로써 신유학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언한 것이다. 朱子가 물려받은 堯舜의 의발은 무엇인가? 그것은 욧님금·순님금의 입던 옷, 먹던 사발이 아니다. 그것은 의발이 아닌 經이요, 물건이 아닌 언어다! 『允執厥中!』 이 4글자 1구야말로 욧님금이 순님금에게 전수한 의발이다. 그리고 순님금(舜)은 웃님금(禹)에게 3구를 더해 전했다: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기실 이 「虞庭의 傳心訣」이라고도 불리는 4구의 역사적 의의는 혜능이 신수의 漸頌에 대하여 내갈긴 게송 4구와 같은 것이지만, 논리적 맥락은 매우 다르다. 允執厥中의 「厥中」은 실제 그 궁극적 인간학적 의미에 있어서 龍樹의 中論(Ma-dhyamika)과 大差가 없다. 허나 龍樹는 부정에 부정을 더하여가는 순수한 초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中을 말했지만, 주자의 中은 세간적이고 윤리적인 中이다. 그 中의 윤리적 맥락은 『人心惟危, 道心惟微』라 하는 이 한 마디인 것이다. 朱子哲學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去人欲存天理』(사람의 욕심을 버리고 하늘의 이치를 보존한다)라 말할 수 있는데 人心은 곧 人欲이요 危(위태로움)한 것이요, 道心은 곧 天理요 微(은미함)한 것이다. 危한 人心을 버리고 微한 道心으로 돌아가라! 이것이 곧 朱子의 直指人心이요, 心法印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언제는 유가입장에서 불가를 디립다 까더니만 지금은 또 불가입장에서 불가를 배척한 유가의 본질을 왜곡한다고 씹을 것이다. 여기서 씹히고 저기서 씹히고, 아이쿠 두야! 내 方便說法을 깨닫지 못하는 자 주둥아리 놀릴 생각 마라! 朱子學의 人心道心論이나 存天理去人欲論은 알고보면 禪이 지나치게 권위부정을 추구한 나머지 空寂한 말장난에 빠져버린 역사적 병폐를 광정하고 인간세의 도덕적 현실을 직시하여 인간의 本分事로 회귀하자는 외침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나, 佛家의 입장에서 본다면, 朱子學이야말로 禪家의 극단적 허무주의(Nihilism)에서 다시 四聖諦 八正道로 회귀한 불교자내의 도덕주의적 회복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 조선조의 유학자들이 朱子學의 정통성을 고수하고 이단을 배척하는 태도나 오늘날까지도 退栗의 권위에 찌든 성균관유생 운운하는 자들의 작폐를 보면 宋儒의 道統論의 편협함의 병폐를 실감할 수 있다. 허나 이것은 禪家에 있지도 않은, 禪家는 慧能 당초로부터 이미 벗어던져버린, 傳燈의 방계적 말폐에 지나지 않는다. 朱子는 『傳燈錄』을 본떠 『伊洛淵源錄』을 만들었다. 후대 黃宗羲의 『明儒學案』이나 『宋元學案』도 모두 이 『경덕전등록』의 體裁를 縝照하여 만든 저작들이다. 우리나라의 족보편찬도 알고 보면, 그 본래 연원은 스님들의 法系편찬방식과 무관치 않은 것이다. 허나 진정한 傳燈의 기록은 이렇게 정통론을 고수하려는 데 있질 아니하다. 傳燈의 등은 빛이다. 그런데 이 빛은 의발의 빛이 아니요, 깨달음의 빛이다. 그것은 정통의 빛이 아니요, 이단과 정통의 분별심이 근원적으로 말소되는 혜지의 빛이다. 그 빛을 전한 기록은 계보의 배타성을 확보하려는 기록이 아니라 깨달음 그 자체의 역정을 통해 중생심으로 나아가려는 전법의 기록이다. 『요한복음』도 「빛」을 말하고 「로고스」를 말한다. 말씀이 빛이요, 빛이 곧 말씀이다. 허나 그 빛은 하나님의 變顯(the Transfiguration)의 실체의 빛이요, 초월적 존재에게로 회귀하는 빛이다. 허나 전등의 빛은 깨달음(the Enlightenment) 그 자체의 無體의 빛이요, 초월 아닌 해탈의 진리의 등불이다. 선의 전등은 깨달음의 우열이나 서열이나 대열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깨달음을 전하여 인간의 마음을 열게 하고 몸을 깨우치며 모든 망념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교육의 등불이다. 선의 역사는 깨달음의 역사요, 깨달음의 역사는 교육의 역사요, 교육의 역사는 빛을 전해가는 역사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禪의 宗旨, 公案의 本旨를 깨닫지 못하고, 주자학이 선학의 말폐를 흡수하여 편협한 도통론을 세운 것을 다시 재역수입하여 門中을 말하고, 깨달음의 우열을 말하고, 법랍의 서열을 말하고, 큰스님을 말하고, 祖室을 말하고, 방장의 권위를 말한다. 니기미 씨팔, 큰스님? 엿먹어라! 뭐가 크길래 큰 스님이냐? 좆대가리가 커서 큰 스님이냐? 씹대가리가 커서 큰 스님이냐? 가불마조(呵佛罵祖), 그게 뭐이더냐? 『벽암록』 그것이 바로 가불마조의 기록이니라! 우리 사회는 내가 생각기로, 衣鉢만 전하려 하지 진리의 빛을, 깨달음의 본체를 전하려 하질 않는다. 그렇기에 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21세기는 禪에서 배워야 한다. 새로운 전등의 기록을 세워야 한다. 새로운 깨달음의 빛을 전해야 한다. 가사와 바리땔랑 조계산 깊은 골에 깊게 깊게 묻어두어라! 나의 책 『老子哲學 이것이다』 앞대가리에 보면, 내 슬픈 삶의 이야기를 전하는 부끄러운 문장이 하나 실려 있다. 「求原諒」! 나에게도 존경하는 선생이 있었고 사랑하는 제자가 있었다. 선생의 학통을 이으려했고 제자에게 나의 지식과 지혜를 전달하려고 애썼다. 나는 정말 학생으로서 선생으로서 학통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이런 모든 노력이 허물어지는 체험을 한 것이다. 求原諒! 내 삶의 모든 진실을 담아 사모했던 스승이 날 저버리고 내 삶의 모든 정열을 담아 자애하던 제자가 날 배반한 것이다. 너무도 터무니 없는 인간세 憬事의 와중에서. 양심선언! 복직! 한의대! 나는 고려대학 石門을 나서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제 도올에게는 스승이 없다. 이제 도올에게는 제자가 없다. 나 이제 제자를 기르지 않는다. 스승을 만들지 않는다. 스치는 바람이 모두 나의 제자요 스승이다』 求原諒 후 나는 깨달았다. 법통, 도통, 학통, 혈통, 씹통, 좆통, 다 허망한 것이더라. 그럼 넌 뭔 통이냐? 그래 난 벽암통이다. 나는 지금도 타인에게 지식을 전하는 데 열심이다. 내가 알고 있는 바를 남에게 감추지 아니한다. 아마도 이 세상에 나만큼 대가리 속에 지식의 쓰레기더미를 많이 쌓아올린 자도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식이란 나의 것이 아니다. 인류의 갈등(언어)이 공통의 노력을 경주하여 만들어온 것이다. 지식이란 대부분 있는 것을 흡수한 것이지 내가 만든 것은 아니다. 그따위 지식을 가지고 자랑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알고보면 도서관 어딘가에 다 꽂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을 발견하고 흡수하는 과정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이 깨달음마저 전달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나는 깨닫고 만다. 인간의 깨달음이란 인간 孤存 본연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결국 전수될 수 없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결국 나 개인의 시공이 연출한 한 계기인 것이다. 그것은 아무도 진입할 수 없는 나의 몸의 空이다. 『벽암록』은 이러한 몸의 空의 전수가 아닌 照影이다. 1백칙 공안이 모두 독립된 절대적 깨달음의 계기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벽암록』을 읽는 태도를 명백히 해야 한다. 『벽암록』은 조사들의 法嗣를 밝히려는 책이 아니다. 그것은 百箇의 燈이 동시에 相卽相入하는 華嚴의 壯觀이다. 그것은 생명이 약동치는 조사들의 삶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 마음의 가능성을 자각할 수 있을 뿐이다. 원숭이 새끼 품고 푸른 절벽 뒤로 돌아가고 새 꽃 물어 푸른 바위 앞에 떨어뜨린다 원숭이 뒤로 돌아가고, 새 앞에 떨어뜨리는 이 모든 광경이 내 마음 自內의 깨달음의 계기일 뿐인 것이다. 江西의 어느 절, 비탈길, 어느 젊은 스님이 손수레를 끌고 있었다. 그 비좁은 비탈길 아래켠에 거대한 체구의 노장 조실스님이 다리를 뻗고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젊은 스님은 수레를 몰고 가면서 황망히 외쳤다. 『스님! 스님! 수레가 내려갑니다. 비키세요! 뻗은 다리를 오므리시라구요!』(請師收足.) 조실스님이 눈을 번뜩 뜨면서 말했다. 『야 이놈아! 한번 뻗은 다리는 안 오므려!』(已展不縮.) 그러자 젊은 스님이 외쳤다. 『한번 구른 수레는 빠꾸가 없습니다!』(已進不退.) 아뿔싸! 굴러가는 수레바퀴는 조실스님의 발목을 깔아뭉개고 말았다. 딱 부러진 발목을 질질 끌고 법당에 들어간 조실스님, 거대한 황소 같은 체구에 호랑이 같은 눈을 부라리며, 씩씩대며 나오는 손엔 날카로운 날이 번뜩이는 큰 도끼가 쥐여 있었다. 바라가 울리고 대웅전 앞 뜨락엔 대소스님들이 총집결, 엄숙히 대열을 정돈했다. 『아까 어떤 놈인가? 이 노승의 다리 위로 수레를 굴려 발목을 부러뜨린 놈이! 나와!』 (執斧子曰: 「適夾孵損老僧脚底出來.」) 이 때 젊은 스님, 조금도 기개를 굽히지 않고 늠름하게 뚜벅뚜벅 걸어나와 조실스님 앞에 무릎꿇고 가사를 젖히더니 목을 푸른 도낏날 앞에 쑤욱 내밀었다.(師便出, 於祖前引頸.) 그러자 그 긴장이 감도는 순간, 노승의 얼굴엔 인자한 화색이 만면, 도끼를 내려놓았다.(祖乃置斧.) 도대체 이들은 누구인가? 도대체 이들은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왜 이러는가? 뭘 추구하는가? 『傳燈錄』 『指月錄』 등에 그 용모의 奇異함을 「牛行虎視」(거대한 황소가 어슬렁거리는 것 같고 장백산 호랑이가 눈을 부라리는 것 같다)라 표현한 이 노승 조실스님의 이름은 마쭈 따오이, 馬祖道一, 바로 『벽암록』 제3칙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 스승의 다리를 부러뜨린 젊은 스님은 五臺山 隱峰, 馬祖의 1백39人 入室弟子 중의 一人이다. 은봉(邵武 사람, 俗姓은 鄧氏, 馬祖 道一과 石頭希遷에 參하였으나 결국 馬祖의 言下에서 得悟)은 죽을 때 『隱峰倒化』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그는 五臺山 金剛窟 앞에서 示寂하기 전에 그를 따르던 대중에게 물었다. 『나는 여태까지 고승들이 누워 죽고 앉아 죽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그런데 서서 죽은 놈이 있느냐?(諸方遷化, 坐去臥去, 吾嘗見之. 還有立化也無?) 그러니까 대중들이 말했다. 『있습니다』(曰:「有.」) 『그럼 거꾸로 물구나무 서서 뒈진 놈은 있느냐?』(師曰: 「還有倒立者否?」) 『그런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曰:「未嘗見有.」) 그러자 은봉(인훵)은 거꾸로 선채 遷化하고 말았다.(師乃倒立而化.) 거꾸로 선 채로 염을 다 했는데도 그 시체가 꼿꼿이 서서 屹然不動, 도무지 움직이질 않는다. 어떻게 다비를 치를까 걱정이 되어 스님들은 의논하는데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놀라 遠近에서 경탄함을 마지 않았다. 이때 은봉의 여동생이 비구니스님이었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었다. 꼿꼿이 거꾸로 서 있는 시체 앞에 가서 외치기를 『오빠! 살아 생전에는 계율을 그렇게 무시하고 살더니만 죽어서는 이제 사람들을 현혹시키려 거꾸로 서 있오?』 하고 시체를 툭 치니 하염없이 피식 쓰러지고 말았다. 다비를 치르고 사리를 거두어 탑을 세웠다. 生死에 대한 自由無碍한 경지를 보여주는 일화지만 더욱 소중한 것은 그러한 무애함이 범인에게 자아내는 神異奇談의 현혹을 다시 깨쳐버리는 여동생스님의 一轉語다. 과연 마조도일의 제자답다. 마조도일! 과연 그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馬祖에 대해 내가 상세한 생평을 논하기 전에 우선 馬祖라는 이 위대한 인물이 도무지 禪宗史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인지를 먼저 살펴보자. 여러분들은 나의 第二話에서 평상심의 대가, 내가 중국선종사의 꽃이라고 표현한 조주(趙州從劤)스님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조주스님을 키운 위대한 스님 남천보원(南泉普願)을 기억할 것이다. 바로 남천의 스승이 이 마조다. 마조와 남천의 관계는 꼭 孔子와 顔回의 관계 같다. 마조에게는 1백39人의 입실제자가 있었고 제각기 一方宗主의 뜻을 펴 그 轉化가 무궁하였건만 그중에서도 마조가 가장 애지중지한 제자가 바로 남천이었다. 그러니까 마조는 조주의 할아버지라 할 수 있다. 조주의 평상심은 마조의 「平常心是道」의 적통을 이은 것이다. 慧能에게는 뛰어난 제자가 5人 있었다. 南嶽懷讓(677~744), 靑原行思(?~704), 永嘉玄覺(665~713), 南陽慧忠(677~775), 荷澤神會(670~758). 그런데 이 다섯사람 중에서 남악회양과 청원행사의 二流만이 후세에 繁衍하였으니 남악회양 아래서는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이 나왔고, 청원행사 아래서는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이 나왔다. 마조는 江西를 중심으로 활약하였고, 석두는 湖南을 중심으로 활약하여 天下를 半分한 禪界의 雙璧이라 불렸다. 마조의 밑에서 臨濟宗, 噴仰宗의 開祖들이 나왔을 뿐아니라, 실제로 禪宗史의 초기에 가장 많은 제자를 길러 禪宗의 대세를 굳혔다. 馬祖는 중국선종사의 가장 위대한 교육자였다. 慧能을 선의 씨앗의 생명력이라 한다면, 馬祖야말로 선의 뿌리요, 趙州는 선의 만개한 꽃이다. 馬祖는 709년 漢州 什且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지금의 四川省 成都 사람이다. 때는 양귀비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唐 玄宗이 즉위하기 수년 전이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용모가 기특하였다. 「牛行虎視」란 표현외로도 그의 혓바닥이 유난히 길어 쭉 내밀어 휘두르면 콧등을 덮었다고 한다(引舌過鼻). 그리고 발바닥에는 두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足下有二輪文). 혓바닥이 긴 것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그는 유난히 큰 목청의 소유자였다. 그가 한번 소리를 치면 제자들의 귀가 사흘이나 먹었다고 한다(直得三日耳聾). 그의 俗姓이 馬氏였는데, 「馬祖」라는 그의 通稱은 선종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우선 「祖」라는 타이틀은 당연히 六祖 혜능에서 끝나는 것이기에 반칙이다. 더구나 그 祖라는 타이틀이 馬氏라는 俗姓과 결합하는 것은 出家僧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예를 들면, 나 도올 김용옥을 「金祖」라 부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馬祖(The Patriarch Ma)라는 명칭은 혜능에 버금가는 그의 위치와, 또 聖과 俗이 구분되지 않는 그의 삶의 역정에서 우러나온,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연스런 애칭(별명 같은 것)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남악회양이 대각을 얻었을 때 6조 혜능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天竺二十七祖 般若多羅께서 예언하시길 네 발밑에서 망아지새끼가 하나 나와서 이 세상을 짓밟으리라 하셨다.』 마치 예수가 베드로에게 『너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죽음의 권세도 그를 이기지 못하리라』(And I tell you, you are Peter, and 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and the powers of death shall not prevail against it. 마태 16:18)고 예언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지만, 여기서 「망아지새끼」란 馬氏의 「馬」를 은유한 것이다. 과연 馬祖는 天下를 짓밟았다. 百丈懷海, 南泉普願, 西堂智藏, 大梅法常, 濂官齊安, 歸宗智常, 汾州無業, 五臺隱峰, 襄州居士龐蘊, 大珠慧海, 石鞏慧藏, 水耀和尙, 藥山惟儼… 이 수없이 찬란한 인물들에게서 語錄이 쏟아져 나왔고 南岳의 天下가 된 것이다. 마조는 어려서부터 九流六學에 통달하였고 이미 어려서 漢州 本邑의 羅漢寺로 출가하였다. 資州(사천성) 唐和尙께 삭발함을 받았고, 琥州(사천성)의 圓律師에게서 具足戒를 받았다. 그후 益州(사천성) 長松山, 荊南(湖北省) 明月山에서 山居修行타가 어느날 南岳(湖南省)에 6조 혜능의 法嗣 懷讓이 수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곳으로 찾아가 홀로 南岳山에 둥지를 틀고 坐禪에 정진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회양은 남악산의 般若寺에 주석하고 있었다. 회양은 마조를 보자 곧 그가 큰 그릇임을 직감한다. 그래서 마조가 둥지를 틀고 있는 토굴로 찾아가 일문을 던진다. 『어르신네 좌선은 해서 뭐하실라오?』(大德坐禪圖甚匿?) 『부처가 되려구요.』(圖作佛.) 그러자 회양은 마조가 좌선을 하고 있는 그 토굴 앞에서 깨진 기왓장을 하나 집어 들더니만 숫돌 위에 열심히 갈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호기심에 가득찬 마조가 내다보며 왈: 『그건 갈아서 뭐 할라구 그러시오?』(磨作甚匿?) 회양대사는 희쭉 웃으며 대답하기를: 『잘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구』(磨作鏡.) 어허, 흥미진진한 문답에 빨려들어가는 마조는 터무니없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말하기를: 『아니, 그래 어떻게 기왓장을 갈아 얼굴이 비치는 거울을 만들 수 있단 말입네까?』(磨榮豈得成鏡耶?) 그러자 회양은 잽싸게 내치며 말하기를: 『아니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 수 없다는 걸 아는 녀석이 그래, 좌선을 해서 부처가 되겠다구 해? 아니 널 갈아봐라, 부처가 될성싶더냐?』(磨榮旣不成鏡, 坐禪豈得作佛?) 김이 팍 새버린 마조, 집요하게 묻는다. 『아니 그럼 난 어떻게 해야한단 말이요?』(如何卽是?) 『소달구지를 가지고 얘기해보자! 소달구지가 안 가면 회초리로 소를 치냐? 달구지를 치냐?』(如牛駕車, 車若不行, 打車卽是, 打牛卽是?) 폐부를 찌르는 언변에 경악한 마조, 묵묵히 대답없이 벙벙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一無對.) 회양은 이어 곧 말문을 열었다. 『니가 지금 坐禪을 배우려는 거냐? 坐佛을 배우려는 거냐? 네가 만약 앉아 禪을 배우겠다면 내가 말해주마, 禪이란 앉아 있는 것도 아니요, 누워 있는 것도 아니다. 네가 만약 앉아 佛을 배우겠다면 내가 말해주마, 부처란 정해진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法)란 본시 고착된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요, 무엇에 머물러있질 아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앉아 부처가 되겠다고? 그건 부처를 죽여야 되는 것이다. 앉아서 도 닦는 모습에 집착하게 되면 넌 그 진리에 도달할 길이 없어지는 것이다』(汝學坐禪, 爲學坐佛? 若學坐禪, 禪非坐臥; 若學坐佛, 佛非定相. 於無住法, 不應取捨. 汝若坐佛, 卽是殺佛. 若執坐相, 非達其理.) 마조는 이러한 회양의 교시(示誨)를 들었을 때, 목마른 심령에 퍼붓는 천상의 감로수를 마시는 느낌이 감돌았다. 그 자리에서 마조는 벌떡 일어나 회양대사에게 모든 예를 갖추어 절을 하고 나서 다시 여쭈었다.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지면 그 모습이 없는 삼매경지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如何用心, 卽合無相三昧?) 그러자 회양대사는 친절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네가 마음 내면의 法門을 배운다고 하는 것은 꼭 들판에 씨를 뿌리는 것과도 같다. 내가 법문의 요체를 말한다고 하는 것은 그 들판에 내리는 하늘의 단비와도 같은 것이다. 그 인연이 닿으면 반드시 싹트게 되어 있는 법, 그대 나와 연이 있는 것 같군, 그대 반드시 道를 보게 되리라』(汝學心地法門, 如下種子. 我說法要, 譬彼天澤, 汝綠合故, 當見其道.) 묵직한 마조는 그래도 또 궁금해서 캐물었다. 『아니 도를 보게 되리라 하셨는데, 도란 본시 색깔도 없고 형체도 없는 법, 어떻게 그 도를 볼 수 있단 말입니까?』(道非色相, 云何能見?) 회양대사는 여유롭게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마음속엔 달마눈깔이라는 게 있어. 그 눈깔로 道가 다 보인단다. 모습이 없는 삼매경지도 그 눈깔이면 다 해결되지.』(心地法眼, 能見乎道. 無相三昧, 亦復然矣.) 아이쿠 두야! 그래도 석연치 못한 마조! 집요하게 또 묻는다. 깨우침이란 중도하차는 없는 법, 중간타협도 있을 수 없다! 『그 놈의 도라는 게 만들어졌다가 부서지기도 하고 그러는 겁니까?』(有成壞否?) 『이놈아! 도라는 건, 만들고 부수고, 모이고 흩어지고, 그런 관점에서 보려고 하면 이미 날 샌 거다. 그렇게 보면 도를 볼 날은 없을 것이다. 이놈아! 귀찮아 더 못 말하겠다. 게송 하나 읊을게 들어보아라!(若以成壞聚散而見道者, 非見道也. 聽吾偈. 曰:) 우리 마음속에 온갖 씨앗 들어있어 은혜로운 단비를 만나면 모두 싹이 트지 삼매의 꽃, 모습이 없으니 어찌 만들고 또 부수고 하리오?』 (心地含諸種, 遇澤悉皆萌. 三昧華無相, 何壞復何成.) 이에 우리의 주인공 마쭈 따오이, 무명을 떨치고 개오를 한다. 그의 마음 초연하여 활짝 갠 봄날과도 같았다. 그 뒤로 회양대사를 시봉하기를 아홉 가을, 날로 날로 그 현오함을 더해갔다.(一蒙開悟, 心意超然, 侍奉九秋, 日益玄奧.) 회양에게 入室제자 모두 6인이 있었는데 각기 회양의 인가를 받았다: 『그대들의 깨달음, 내 몸의 한 지체와도 같다』 法常은 그 눈썹을 얻어 威儀에 善하고, 智達은 그 눈동자를 얻어 顧盼에 善하고, 坦然은 그 귀를 얻어 聽理에 善하고, 神照는 그 코를 얻어 知氣에 善하고, 嚴峻은 그 혀를 얻어 譚說에 善하다. 마조 道一! 그야말로 그 마음을 얻어 古今에 善했다. 마조 도일! 古今에 善했다 함은, 곧 그야말로 선의 역사를 창출해냈다 함이다. 天寶元年(742) 建陽(복건성) 佛跡巖에서 開法하였고, 또 南康(강서성) 陽湖 北岸의 新開寺, 撫州(강서성) 西裏山, 虔州(강서성) 公山 등지에 住하였고 大曆四年(769)에는 鍾陵(강서성) 開元寺(일명 佑淸寺)에 주석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宗風을 擧揚하였다. 晩年乳潭(江西省 靖安縣) 石門山 寶峰寺에 住하면서 宴默終焉의 地를 定하였다. 貞元四年 正月중에 石門山 숲을 지나가던 어느 날 시자에게 이르기를: 『이제 이 내 썩은 기덩어리가 땅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구나. 내달쯤 되리라!』(吾之朽質, 當於來月歸玆地矣.) 말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과연 다음달 2月4日 微疾이 있었다. 목욕재계를 하시더니 방에 돌아와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入滅하시었다. 世壽 80이었다. 마조가 산 시대, 시인 李白(701~762), 杜甫(712~770)와 동시대, 玄宗과 양귀비가 로맨스를 펼치던 盛唐의 한나절을 지냈던 것이다. <---------------후략--------------> <Picture><Picture><Picture><Picture> ------------------------------------------------------------------------ Copyright(c) 1998 <Picture>All rights Reserved. E-mail: newsroom@mail.dongailb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