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roce ( 크로체) 날 짜 (Date): 1998년 4월 16일 목요일 오후 05시 08분 20초 제 목(Title): 확연무성과 불협화음 저 위에 김용옥씨의 벽암록 강의2편에 보면 '확연무성'이란 말이 나온다. 그 글만으로 보아선 확연무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쓴 글이라 보아지지 않기에 첨언해본다. 그 역시 불교에 대해선 학구적 아마츄어에 불과한 듯 하다. 나도 아마츄어지만 난 학자가 아니다. 불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앞으로 그럴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불성이 여기에 있고, 직접 탐구할 수 있으니 파고들어갈 뿐이다. "텅비어 있는데 뭐가 성스럽냐?"는 말에서 완전함과 불협화음의 착각을 경계하는 뜻이 들어있다. 확연무성, 불성은 텅비어 있다. 그렇다. 만일, 누가 내게 "당신은 불완전한 존재요."라고 말한다면 나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완전한 존재다. 내가 완전한 존재인만큼 그 말을 하는 그도 완전한 존재다. 왜냐? 확연무성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게 "당신은 실수를 하지 않소?"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인정할 것이다. 나는 불협화음의 존재다. 그러나 그 불협화음과 확연무성의 완전함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얘기다. 이것을 착각하기 때문에 불교니 기독교니 하면서 나누고 다투는 것이다. 완전함(completeness)은 모든 가능성을 갖추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조화로움(harmonization)은 그 수많은 가능성들이 온전히 드러난 것을 말한다. 확연무성은 조화로 드러날 수도 있고, 불협화음으로 드러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조화로움을 이룰 수는 없다. 불협화음에서 조화로움으로의 과정, 그것이 삶이며, 그 과정 자체에서 불성이 살아움직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불교는 확연무성에서 시작해서 불협화음을 얘기하고, 하모나이제이션도 얘기하지만, 기독교는 확연무성을 빼놓고 다짜고짜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라는 불협화음의 명제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키를 돌려 항해를 막 시작한 모험가들에겐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다. 그 명제는 "너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여객선이나 타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불협화음을 직접 다듬어 나가려는 뜻을 가진 자는 스스로 항해하면 된다. 여객선은 뚜렷한 목적과 기술을 모르고,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다. 불교는 가르친다. 텅비었는데, 뭐가 성스럽냐고. 성스러움도 확연무성에서 나온 것 이고 천박함도 확연무성에서 나온 것이다. 신도 완전한 존재,인간도 완전한 존재다. 존재는 모두 완전하다. 이미 완전한 존재이기에 실수도 하고, 조화로움에도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완전하기 때문에 실수할 리 없다는 식의 생각이나, 인간은 원래 불완전한데, 깨달음이나 구원에 의해서 완전함으로 비약한다는 식의 생각은 확연무성한 불성을 획일적이게 병든 모습으로 드러나게 하는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가장 고쳐지지 않는 고질적인 착각 중의 하나다. 그 착각에 휩싸여서 허우적대며 사는 현상을 불교에선 중생이라고 부른다. 중생꽃으로 피어난 불협화음의 부처들. 그러나 깨닫지 못했다해도, 착각에서 허우적댄다고 해도 중생은 이미 완전한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누가 불성의 불완전성을 논하는가? 불협화음이, 무지와 착각으로 일어나고 있을 뿐. 그 불협화음이 죄라면, 그 죄의 책임은 무지와 착각에 있다 할 것이다. ......Amor vincit omn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