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sjyoun (예리큰아빠맧) 날 짜 (Date): 1998년04월08일(수) 08시16분26초 ROK 제 목(Title): 지명스님의 교리산책-식의 주객분렬 번호 : 14/2943 입력일 : 98/04/06 15:11:33 자료량 :66줄 제목 : 지명스님의 교리산책-식의 주객분렬 지난호에 아뢰야식과 업이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살펴보았다. 식의 종자가 현실을 낳고, 현실의 업이 다시 식종자를 훈습한다. 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식종자는 또 다른 식종자를 탄생시키는데, 이 순환은 동시적으로 무한히 계 속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뢰야식의 종자가 현실의 업을 낳는다는 것이 구 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식에 있어서 세상의 모든 것은 아뢰야식이 가설(假設)한 것에 지나지 않 는다. 언뜻 생각하면 안에 식이 있고 바깥에 그 대상이 있는 것 같지만 그 렇지 않다. 주체와 객체는 모두 식의 변화일 뿐이다. 식의 전변(轉變)으로 주객이벌어진 것이다. 아뢰야식의 종자가 현실의 업을 낳는다는 것은 바로 이를 뜻한다. 주체가 제멋대로 객체를 분별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밖에 실재하 는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식이 지어낸 것을 볼뿐이란 말이다. 여중생 4 명이 동반해서 자살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 어머니의 입원, 이성 문제등으 로 괴로워하던 중에 집단으로 죽음을 택했다는 소식이다. 그후 한 남중생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유는 가난이다. 우리가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자살 사유이다. 그 아이들은 자기들 멋대로 실재하지도 않은 고통을 지어내어서 느낀 것이 다. 가난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죽은 아이 들의 집보다도 더 경제적인 면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아픈 사람도 많다. 그런데도 저 아이들은 죽음을 택해야 할 정도로 괴 로워했다. 저들의 고통이 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을 저들이 안다면, 저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가 일방적인 관점에서 남을 평가하고 있다고 말이다. 어른들도 자살할 정도의 고통을 지어낸 사건이 있었다. 아들의 사업실패를 비관하고 한 노인 이 자살했다. 그의 아들은 죽은 아버지와 피해를 입은 채권자들에 대한 죄 책과 고통으로 또 자살했다. 혼자만 죽은 것이 아니다. 철부지 두 어린아이 에게 농약을 먹여서 죽게 한 다음에, 아내와 함께 목을 매달았다. 3대에 걸 친 5명이 죽은 것이다. 다른 이라면 살면서 받아 넘겼을 고통을, 저들은 죽음보다도 더 괴로운 것 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어머니와 딸의 다른 시각도 있다. 아버지가 술을 마 시기만 하면 어머니를 괴롭히고 폭행까지 가한다. 무슨 이유에선지 어머니 는 그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그러나 딸의 관점은 다르다. 아버지는 악마 와 같다. 착한 어머니를 상습적으로 폭행하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 어느날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사이에, 19세의 딸은 넥타이로 아 버지의 목을 조여서 죽게 만들었다. 어머니가 본 아버지는 살아야 할 남편 이었고, 딸이 본 아버지는 죽어 마땅한 극악인이었다. 한 사람을 두고 두 모 녀가 달리 생각한 것이다. 최근에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들만 들추었지만, 자 기 생각에만 잠겨서 세상을 보기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저 사건들의 주인공 처럼 매스컴을 탈 만한 큰 일을 저지르지는 않더라도, 언제나 내 중심으로 마음을 조이고 있다. 나의 사랑, 영광, 미움, 병, 늙음, 죽음 등이 눈앞에 펼쳐졌다고 치자. 이때 나는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볼 수 없고, 설사 본다고 하더라도 내식으로 풀이 한다. 아뢰야식에서 분열된 한 쪽인 주체가 다른 한 쪽인 객체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식으로부터 주객이 분열되었다고 해서, 식이 자연과학적인 의미에서의 객관적인 물질 대상을 만들어 냈다는 뜻은 아니다. 주객을 떠난 의미에서의 삼라만물은 어떤 것으로도 정해진 바가 없다. 이 름도 없고 용도도 없다. 사람이 그것들을 보고 이름, 용도, 좋음, 나쁨, 아름 다움, 추함 등의 분별을 붙이면서 무 상태의 자연계가 사람의 기분대로 어 떤 개념으로 고착되고 왜곡된다는 말이다. 만동자가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졌을 때 석존은 침묵했다. 불교는 형이상 학을 연구하는 철학이 아니다. 마음을 살피고 깨우치게 하려는 종교일 뿐이 다. 이런 의미에서 아뢰야식이 주객으로 나뉘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발행일(1668호):1998년 3월 7일 , 구독문의 (02)730-4488 < 한장의 불교신문 한사람의 포교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