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8년03월13일(금) 02시46분40초 ROK 제 목(Title): Re: Re^8]양무제가 달마를...의 bug[문사수� >선=부처님의 마음 >교=부처님의 말 >선과 교가 선종과 교종이라는 면에서 대조가 되지만, >선과 교를 위와 같이 나누는 것은 너무 2분법에 의한 분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시 글을 잘 읽어 보세요. 선과 교가 다르지 않은 이유를 모른다고 하니 선과 교가 다르지 않은 이유를 말해 주었는데, 이해를 못하고서 2분법이라 하는 군요. 김용옥 교수의 글도 다시 한번 읽어 보세요. 거기에 선이란 불심이란 말도 김용옥 교수가 인용하고 있으니까요. 禪是佛心은 선의 전통적 정의입니다. 교란 부처님의 경전을 말하는 것이고 경전은 부처님이 말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마음이라면 문사수님이 말씀하신 불심(佛心)이라는 말이 있는데, >무처님의 마음이라면 문사수님이 말씀하신 불심(佛心)이라는 말이 있는데, >따로 선이라고 붙일 이유가 없을것 같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살던 시절에 禪이라는 용어가 이미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식만 잡고 명상을 하는 것이었고, 부처님께서는 禪定의 내용 없는 형식적 명상을 바로 잡았습니다. 禪定이 다시 살아 나는데 그 살아나는 내용이 佛心입니다. 예리큰아빠께서 禪이 무엇인지 모르고 외형적인 명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똑 같이 당시의 인도가 그랬습니다. >제가 님의 말씀을 나름대로 이해를 해 본다면, 선은 부처님의 마음으로 보려는 >시도, 보는데 성공하면 깨달음을 얻는 것이고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긴 한데, 그냥 교하면 아무 의미가 없으므로, >말씀으로 부터 깨달음을 얻으려는 시도로 보면 안 되겠습니까? >마음에서 얻든, 말씀에서 얻든 깨달음 얻으려는 시도이구요. 선은 불심이고 불심은 깨달은 마음이고 깨달음은 진리일 뿐입니다. 佛이란 부처를 소리 나는 데로 한문으로 옮긴 것이고 그 뜻은 覺입니다. >통일신라시대에 5교는 다섯개의 교종을 이야기하고, >9산은 9개 선종의 교파를 이야기 이야기 한다고 알고 있는데, >그럼 이들이 구별되는 선종과 교종은 무슨 차이인가요? >저는 방법의 차이로 알고 있습니다. 불교에는 종파가 많지만 각 종파의 내용이 다르지는 않습니다. 경전이 많지만 그 경전이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하여 동일한 깨달음이 말해지는 것입니다. 5교 9산을 굳이 나누는 것은 역사학자들의 소일 거리일 뿐이지 불교의 내용에 있어서는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 뿐입니다. >방법을 찾는 미망의 죽음, 결과를 쫓는 어두움의 종말, >방법론과 결과론의 추구로 두터워지는 자아와 자존심의 파멸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선에서는 자아와 자존심의 파멸된다고 말씀하시는데 실제로 그런 예가 있나요?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로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존심을 허물었고 자아를 소멸시켰습니다. 절에 가 보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존심을 허물기 위하여 열심히 절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복 달라 절하는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에서는 석가모니를 행동의 기준으로 삼으실 텐데, >불교에서는 석가모니를 행동의 기준으로 삼으실 텐데, >석가모니께서도 그런 상실감을 맛보셨다는 기록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기록 정도가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6년간 자존심과 자아를 가지고 자존심과 자아를 소멸시키는 무모한 시도를 줄기차게 하였다가 완전히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데 남 달랐던 것은 6년이 걸렸지만 자아로서 자아를 소멸시키는 어리석은 행위를 하고 있음을 스스로 판단하셨기에 6년만에 절망에 빠졌지 보통 바보 같은 사람이면 수 십년을 하고서도 그 절망에 빠지지 못하였을 겁니다. 그렇게 절망에 빠져서 자아로서는 자아를 소멸시킬 수 없다는 점을 정직하게 인정하자 그렇게 오랜 시간 뿌리 깊게 있던 자아가 소멸되면서 참다운 자신의 모습이 샘솟게 됩니다. 그리고 더욱 위대한 것은 자신의 겪은 시행착오를 후학들이 하지 않는 교묘한 법문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로는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시행착오 없이 자아를 소멸시키게 되었습니다. 깨달음이란 어디서 얻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소멸이 깨달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위에 제가 인용한 문사수님의 글에서 무방법이 특성이라는 말하고 >지금 여기서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시는 것하고는 모순처럼 보입니다. 예리큰아빠께서는 방법을 추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예리큰아빠께서 추구하는 방법을 포기하는 것이 바른 방법인 것입니다. 즉 예리큰아빠께서 생각하는 방법은 어떤 방법도 다 깨달음 하고는 관계가 없으니 무방법이고 에리큰아빠의 방법을 중단하고 지금까지의 생각이나 관점과는 정반대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방법 없는 방법, 문 없는 문, 길 없는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묵조선을 할 수가 있다면 >주객이 뒤바뀐것은 아닌가요? >부처님의 마음을 알려고 묵조선을 하는 것은 아닌지요? 부처님의 마음, 깨달음에 대하여는 경전에 수도 없이 나오는데 배울 생각이 없어서 모르는 것이지 배울 자세만 갖추고 바른 스승만 만나면 손쉽게 알게 됩니다. 부처님을 배우지 않고, 깨달음의 내용을 배우지 않고도 깨달을 수가 있는데 보통은 몇 천번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날 정도의 시간이 걸립니다. >제가 듣기에 불교에서는 모두가 부처라고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모두가 부처인데 죽일필요까지 있을까 생각합니다. 모두가 부처라는 것을 믿으면 급진전을 할 수가 있지만 부처란 죽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중생이란 태어났다가 죽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리큰아빠께서는 예리큰아빠 주변의 모든 생명들이 죽지 않는 생명으로 보입니까? >내 속의 부처를 발견하면 되는 것이죠. 내 속의 부처를 발견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이 자아입니다. >자아속에는 도움이 되는 것도 있고, 자아를 해치는 것도 있고. >내 속의 부처를 발견한다는 것은 자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기속의 좋은 자아를 더 확대하고 튼튼하게 잘 키워서 부처님의 단계로 >만드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자아를 가지치기해서 가꾸어 주는 것이고 자아를 확대발전시키는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나무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가지치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나무를 베어버릴 필요는 없는 것이죠. 자아가 가지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종교 중에서 가장 무식한 종교가 불교입니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이야기 할수 있는 것인가요?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처음에 문사수님의 글에 댓구비슷하게 했던 것도 님이 >김용옥교수에 대해서 단정적으로(감동을 받아 본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던것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결국 제가 처음부터 문사수 님에게 드리고 싶었던 말은 >단정적으로 말할수 없는 것을 단정적으로 말해버리는 것은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몇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오갔는데 그런 것은 저의 관심사가 >사실은 아닙니다. 비교적 정직해 지셨습니다.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은 남 다른 용기입니다. 훌륭하십니다. 태양은 낮에 보입니다. 그래서 태양은 낮에 보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양이 낮에 보이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태양은 낮에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단정하지 말라고 말 하는 경우가 없으리란 법은 없습니다. 불법을 공부하겠다는 마음부터 내도록 하십시요. 자아를 소멸시키지 않으면 아무리 깨달음을 향하여 열심히 가도 깨달음과 반대쪽으로 가지만, 자아를 소멸시키는 공부를 하면 깨달음은 얻으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래 깨달음 밖에 없지만 자아 때문에 가려져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