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4년12월29일(목) 10시17분28초 KST 제 목(Title): 진연님 답에 사족을 붙이면서.. 진연님의 말씀 공감이 갑니다. 원이 본래 없는데 지우고 말것도 없죠. 원은 만공스님이 그어 놓은 것이니 한암스님은 수작을 부리는 만공스님을 거꾸로 두둘겨 팰 수도 있겠죠. 그러나 원이 본래 없는 것은 법(진리)의 본체 자리이지만 우리의 삶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대결과 상대적인 경계선 상에서 파뭏힌채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분간하지 못하고 외형적인 모습에 얽매여서 궁극적인 두려움과 공포를 덮어서 없는 것처럼 가리고 살고 있으니까요. 즉 진리의 모순없는 둥그러운 것을 제대로 이해를 한다고 하여도 우리 삶의 실존적인 모습은 진리속에서 녹아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수행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구요. 내면적인 삶의 파장들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사유하고 하여 "아! 참으로 그랬구나"라고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오는 과정을 거쳐서 진리와 본래 하나였음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라는 감탄의 소리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수행이 어떤 특별한 형태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니까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을 다 버리고 특별한 다른 수행의 모습을 찾을 필요성은 없을 겁니다. 자신의 삶만 정확한 불법의 이해를 바탕하여 도마위에 올려놓을 수만 있다면 수행은 저절로 되는 것이니까요. 언제나 자기(그것이 자기라는 주관적인 에고가 되었건, 아니면 자기라는 역동적 삶의 양태가 되었건)가 주된 관심거리가 되는 겁니다. 새해에 복 많이 지읍시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나무무량광.무량수.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