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WeddingM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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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fterWeddingMarch ] in KIDS
글 쓴 이(By): blueyes (魂夢向逸脫)
날 짜 (Date): 2009년 09월 23일 (수) 오전 10시 43분 22초
제 목(Title): 전투



갑자기 어릴적 흑백 TV 화면이 생각난다.
"컴뱃! 빠빠바 빵빠바~"

어제부터 큰어나니에 자식교육에 대한 얘기가 등장하고 있던데, 때마침 나도 
비슷한 상황을 접하게 되어 글을 쓴다.

내 아들은 이제 33개월차, 993일째.
(왜 이 계산을 할때마다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까?)
나는 어제 여느때처럼 10시 30분쯤 집에 도착했다.
매일 매일이 다르지 않지만, 애가 보고 싶어서 일찍 들어가고 싶다가도,
할 일도 남아있고 집에 가봤자 이런저런 정리에다 애를 씻기고 양치질 해주고 
하는 등등을 생각하면 10시 전후가 가장 적당하다는 생각도 한다.

아무튼 매주 한두번씩 그랬듯이 와이프가 좋아하는 매운 낙지 요리를 사가지고 
집에 들어가는 순간, 오늘은 좀 과하다 싶게 나를 반기는 아들 녀석.
"아빠! 오늘 아줌마 발로 뻥 했어요."

얘가 남들보다 조금 성장이 빨라서인지 몰라도 경쟁심이 또래보다 무척 강한 것 
같다.
그래서 또래 애들과 자주 다툼이 발생하고, 어릴적 내 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나와는 달리 다른 엄마에게 사과를 해야만 하는 아내는 항상 이로인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요즘의 내 삶과 비교하자면 무조건 양보를 하는 것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기에 나무라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애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내가 아니라 아내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도 나름대로 당근요법으로 친구와 싸우는 버릇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던 것이고, 그 일환으로 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그 날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는 것이다.
(오늘 하려는 얘기와는 무관하기에 간략하게만 소개를 하자면..
아이가 좋아하는 과자를 푸짐하게 사서 찬장에다 넣은 후에 "친구랑 싸우지 
않은 날은 아빠랑 같이 과자를 먹는 거야." 라든가, "친구랑 싸우지 않은 
날에만 아빠가 자장자장 해줄 거야."라고 반복해서 얘기를 한다.)

아무튼 아이의 고해성사를 들으며 손을 잡고 거실로 들어선 순간 화악 하고 
풍기는 커피 냄새, 쏟아져 있는 커피, 그리고 넋을 잃은 채로 누워있는 아내가 
보인다.
"커피가 왜 이렇게 됐어?"라고 아이한테 물으니 "내가 쏟았어요."라고 대답을 
한다.
순간 "그게 쏟은거냐? 뿌린거지."라는 앙칼진 아내의 목소리.

자초지종을 들으니 이랬다.
아이는 커피 만드는 과정(네스프레소 머신이라 캡슐 넣고 버튼만 누르면 
된다)을 즐기고, 항상 자기가 커피를 만들겠다고 아우성을 쳤는데..
오늘은 엄마가 자기가 한다고 한 모양이다.
사실 여지껏 아무 문제가 없던 이 과정에 심상찮은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 
지난 주말이었다.
여지껏은 내가 캡슐을 골라주면 아이가 넣고 누르고 했는데, 주말부터는 자기가 
캡슐을 고르겠다고 징징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도 일단 화를 내고, 다시 달래서 내가 준 캡슐로 커피를 만드는 데에 
성공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냥 자기가 커피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것에 화가 난 아이가 커피잔을 들어다가 엄마에게 뿌렸단다.
(이건 엄마의 표현이다. 아이의 표현에 따르면 그저 "쏟았을" 뿐이다.)
아내는 평소에 받던 스트레스도 함께 밀려와서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고, 
아이가 뭐라해도 대답없이 아이만 혼자 TV 앞에서 밥을 먹고 있던 중이었다.

하고 싶은 얘기는 많았지만, 지금은 누구에게 얘기를 하더라도 제대로 먹힐 
상황이 아니어서 일단 밥을 먹이고, 잘 준비를 시켰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손 씻기고, 쉬야 시키고, 양치질 시키고, 불끄고 누워서 
옛날 얘기를 해주고.. 재웠다.
아내는 아이가 보기도 싫은지 아예 다른 방으로 가서 잠을 잔다.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 하는 아이에게 뭐라 해줄까 고민을 하다가 
솔직하게 "엄마가 화가 많이 나서 다른 방에서 잔대"라고 해줬다.

그리고는 아침.
얘도 눈치가 있으니 나에게서 당체 떨어지려고 하지를 않는다.
평소에도 출근하지 말라고 떼를 쓰기는 했지만, 오늘처럼 리얼하게 슬픈 표정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평소같으면 아내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분위기를 바꾸고 출근을 하면 되지만, 
오늘은 기대조차 하기 힘든 상황.
"아빠도 같이 놀아주고 싶고 회사 가는거 정말정말 싫은데, 하기 싫다고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거야"라고 해주고는 아이가 좋아하는 과자와 우유를 
주고, 뽀로로를 틀어놓고 나왔다.

아이가 둘.
말이 통하지만 별로 변할 것 같지 않은 어른 아이와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앞으로 변할 가능성이 많은 아이.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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