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ciEncE ] in KIDS 글 쓴 이(By): soliton (김_찬주) 날 짜 (Date): 2002년 6월 18일 화요일 오후 04시 38분 34초 제 목(Title): 21세기 재야 물리학자 요새 여기에서는 한 여류 재야 물리학자가 아주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인의 주장에 의하면 모 대학(자타가 공인하는 명문 대학이다)을 졸업하고 미국 모 유명 주립 대학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60년대 중반 학번이므로 꽤 나이가 지긋한 분이다. 본래는 물리에 관계된 일을 하지 않았는데, 작년엔가 과학 기사를 정리할 일이 있어서 이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어느날인가부터 갑자기 아이디어가 샘솟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주체할 수가 없어서 모교 도서관으로 출근하기 시작하셨고 밤을 새워가며 물리 전분야에 걸쳐 연구에 몰두하고 계신다. 최근에는 지구과학과 수학에도 손을 뻗치고 있다. 그분은 보통 일주일에 세 번 정도 학교에 찾아오셔서 각 연구실을 방문하고 그동안 연구한 것을 전해주는데, 그 때마다 논문을 적게는 한 편 많게는 서너 편까지 써 오신다. (사실 논문이라고 하기에는 좀 짧고 섹션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지금까지 작성하신 논문에 일련 번호도 매겨져 있는데 450편에 육박하고 있다. 각 논문에는 본인의 출신 학교와 연락처, "Coauthorship을 요망합니다"라는 글이 꼭 적혀있다. 모교와 여기를 오가면서 두 학교 연구진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과학계가 발전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에서 이런 헌신적인 일을 하고 계시는 거다. (다른 학교에서도 활동하시는 지는 모르겠다.) 매번 새로운 논문을 100부 가까이 복사해서 무료로 나눠주는 것을 보면 투자하는 비용도 상당할 것 같은데.. 약간의 부작용도 있다. 너무나 정력적으로 많은 논문을 쓰시기 때문에 보통 사람은 도저히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 학기, 아니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되어도 괜찮을텐데 이틀이 멀다 하고 찾아오는 일이 1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으니 인내심이 적은 일부 사람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에 따라 노골적으로 오지 말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한달 쯤 전엔가 한 번은 다음 번 콜로퀴움 연사로 누군가가 추천을 하기도 할 정도로 과 내에서 유명 인사이다. 그러던 몇 달 전 어느날 이분이 드디어 나의 존재도 알아차렸다. 사실은 자주 학교에 출몰하는 그 사람이 과연 누군가 하고 나도 약간의 호기심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 나에게 왔을 때는 반갑기조차 하였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그분이 전해주고 간 논문들이 내 방에 수북이 쌓이고 있다. (차마 버리지는 못하고 한 곳에 고이 모아놓고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처치해야 할 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잘 대해주지를 않는지 최근 들어서는 그분이 나에게 점점 정성을 들이는 듯한 분위기이다. 원고를 주고 갈 때도 나에게 주는 원고는 단순한 복사본이 아니라 "김찬주 박사님께"라고 미리 써온 원고이다. 어떤 일에 대한 논문이고 언제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어디서 어떻게 연구를 했는지까지 상세하게 설명을 해준다. 그뿐이 아니라 처음 아이디어를 얻었을 때의 상황이 나와있는 노트, 중간 과정, 초고, 완성본 등등 복사를 할 때 어디서 베낀 것이 아니고 아이디어부터 완성까지 본인이 모든 것을 직접 다 했다는 점을 증명한다. 그리고는 덧붙인다. 인터넷에 비슷한 아이디어들이 떠돌고 있는데 그게 다 자기 아이디어를 훔쳐간 유체이탈자들과 검은 세력때문이라고.. 원고와 노트를 중종 잃어버리기도 하는데 그것을 감시하느라고 아주 고생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 원고를 바탕으로 논문을 써서 학술지에 투고할 때 공동 저자로 올려주어 본인의 이름만 보존하여주면 더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고 하신다. 나는 아무 응대도 못하고 그냥 듣고만 있는다. 도중에 도저히 말을 막을 여유도 없고 또 잘못해서 뭐라고 말을 꺼냈다가 그것이 부정적인 쪽이든 긍정적인 쪽이든 잘못 전달되면 뒷감당을 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오늘은 드디어 그분이 나에게 전화까지 하셨다. 어디선가 내 전화번호를 알아낸 모양이다. 그리고는 팩스 번호를 확인하신다. 오늘은 너무 바빠서 여기 올 수 없으나 매우 중요한 논문을 썼기 때문에 오늘 중으로 읽어보시라고... 한 시간 안으로 팩스로 보내겠단다. 으... 걱정거리가 하나 늘었다. 나는 능력이 모자라 틀림없이 그 논문의 중요성을 간파하지 못할 텐데... 아니 그 논문을 읽는데 조금의 시간도 투자할 용의가 없는데... 더 이상 나 혼자 감당하기에는... 이제는 누구 다른 사람을 소개해줘야 할 것 같다. 물귀신처럼 다른 사람을 같이 말아먹는 한이 있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