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ExLife ] in KIDS 글 쓴 이(By): soulman (그림자) 날 짜 (Date): 1997년11월29일(토) 03시20분23초 ROK 제 목(Title): 죽음에 대한 생각 [유미리] 여학교 시절, 학교에서 돌아가는 길에 지나는 '소녀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가파른 비탈을 페달도 밟지 않고 자전거로 곤두박질치듯 달려 내려갈 것을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교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면, 해는 벌써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해질녘의 소리들은 모두 한데 어우러� 서로를 지워버린다. 하교를 알리는 차임벨 소리가 꼬리를 길게 끌면서 점점 어두워지는 황혼의 대기속으로 녹아들어갔다. 나는 정문으로 가지 않고 살짝 후믄으로 갔다. 후문의 은행나무 그늘에 자전거를 세워두었기 때문이다. 어스름 속에서 은행잎들은 헛되이 써버린 금화처럼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역전에서 훔쳐온 녹슨 자전거에 올라타고 '소녀의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석양은 차츰 스러져가고, 거리의 절반은 차갑고 푸른 그림자에 휩싸여 있었다. 자전거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브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단숨에 내달리지 못했지만, 이날은 마듬을 다잡고 있었다. 자전거는 점점 빨라졌다. 새라복 스커트가 바람에 팔랑팔랑 나부껴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았다. 바람이 너무 세차서, 나는 거의 눈을 감고 있었다. 돌멩이나 말라 떨어진 나뭇가지 같은 것에 바퀴가 걸리면, 비탈 아래까지 굴러 떨어질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추위 때문에 귀와 코가 떨어져나갈 것처럼 아리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죽음을 생각할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것은 그 순간이다. 견디기 어려운 속도와 아슬아슬한 한계점에 다다른 쾌락. 나는 어린 여동생을 데리고 자주 공원에 갔다. 동생은 으레 그네를 타고 싶어했다. 그네를 밀어주면, 동생은 몸을 배배 꼬면서 키득키득 웃는다. 그네의 흔들림이 커질수록 웃음의 큰 물결이 동생의 온몸을 뒤흔든다. 웃음은 히익히익 하는 듯한 소리가 되어, 목소리조차도 되지 않는데, 동생은 여전히 몸을 뒤틀면서 웃고 있다. 나는 동생이 즐거워서 웃고 있는 게 아니라, 정신이 돌아버려서 단디 몸을 경련시키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넷줄을 잡아당겨 동생을 그네에서 내려주고는 동생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동생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래도 계속 웃으며 몸을 떨고 있었다. 타고 있는 한은 언제나 끊임없이 되풀이 하여 다시금 흔들리기를 바란다. 기계적으로 몸을 진동시킴으로써 생겨나는 쾌락이 몸을 꿰뚫을 때, 나는 죽음을 짜릿짜릿하게 느낀다. 예를 들면 섹스를 하고 있을 때. 남자의 몸을 안을 때면 언제나 나는 숨바꼭질에서 술래가 되었을 때 가만히 끌어안았던 나무가 생각난다. 격렬하게 흥분한 남자의 눈은 나를 동여매고, 내 팔을 움켜쥐는 남자의 손에 힘이 실린다. 나는 책상 모서리가 거울에 비쳐 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고, 눈을 감고 입술을 약간 벌린다-- 마치 수영장 물 속에 잠긴 사람처럼. 남자의 발등이 뻣뻣하게 굳어져 내 발바닥에 닿는다. 나른한 감각이다. 어둠 속에서 올라가고,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절벽 끝까지 갔다가 떨어진다. 사뿐히 대지에 짓눌리듯 계속 떨어져, 오르기 시작한 곳까지 전락한다. 내 외침 소리는 시계 태엽이 풀려가는 것처럼 말을 이루지 않는다. 나는 소용돌이에 깊이 빨려드는 듯한, 눈앞이 아찔한 구역질을 느끼고, 의식이 희미해진다. 그리고 익사할 때는 틀림없이 이런 느낌일 거라고 생각한다. 조르즈 바타이유의 <푸른하늘>이라는 소설에, 주인공들이 무덤 위에서 섹스를 하는 장면이 있다. 여러 해 전에 읽었기 때문에 그 후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잊어버렸지만, <푸른 하늘> 전체에 감돌고 있던 성과 죽음의 냄새를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죽음의 냄새와 성의 냄새는 비슷한 게 아닐까. 인간의 몸이 부서질 때, 타서 눌어붙을 때, 썩을 때의 냄새와 섹스하고 있을 때 스며나오는 냄새는 흡사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섹스를 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는 견디기 어려운 쓸쓸함, 고독, 고통에 시달렸을 때, 즉 죽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다. 순간적인 죽음의 의사체험으로 적막감이나 고독감을 잠시 잊는다. 하지만 치유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희곡을 계속해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연극 속의 주인공은 반드시 자살하거나 발광하여 남을 죽인다. 껍질을 벗은 뱀이 제 허물을 바라보듯, 무대의 조명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내 몸뚱이에서 체온과 여운이 사라져가는 것을 나는 객석의 어둠 속에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시체는 어둠에 삼켜지고, 나의 외침소리는 지워지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텅 빈 무대가 퇴색한 조명을 받으며 떠오른다. 슬픔과 구역질에 꼼짝달싹 못 하게 얽매인 채 나는 천천히 일어나, 섹스를 끝낸 뒤에 벗어던졌던 옷을 줍듯이 저고리를 집어들고 극장을 나온다. "한심스러운 것/울지 않기 위해 얼어붙은 눈/죽는 법을 모르는 마음" 내가 좋아하는 랭스턴 휴즈의 시다. 나는 희곡을 쓰는 것으로 죽는 법을 찾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떻게 죽을까? 운명이 눈먼 코끼리처럼 느닷없이 인간을 짓밟는 것을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날마다 보게 된다. 천재지변, 불의의 사고, 연속살인, 불치병. 이런 것으로 죽기는 싫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 때는 미리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싶다. 갑자기 당해 깜짝 놀라는 것은 딱 질색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나는 눈을 감고 바람직하게 죽는 법을 열거해본다.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방법,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방법, 권총 자살, 가스 자살, 음독 자살, 추락사, 굶어죽기, 얼어죽기, 불에 타서 죽기. 소학교 자연시간에 배울 때까지, 모든 생물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라 자살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나비의 자살을 방조하기 위해 나는 아버지 책상의 맨 윗서랍 속에 들어 있던 외제 라이터를 주머니에 몰래 집어넣고, 한여름 대낮의 오그라든 내 그림자를 밟으며 깡충깡충 뛰어서 들판으로 갔다. 그리고는 나비를 포충망으로 잡아, 왼손 집게 손가락과 엄지 손가락으로 날개를 살짝 잡고는, 그 날개에 라이터로 불을 당겼다. 나비는 불에 타면서 8월의 하얀 태양을 향해 훨훨 날아올랐지만, 곧 새까맣게 타서 땅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그 나비처럼 죽을 것이다. @ 저자 허락 없이 글 올려서 좀 죄송한 느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