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sExLife ] in KIDS 글 쓴 이(By): Symond ( 朴 삼열.) 날 짜 (Date): 1998년03월28일(토) 16시04분34초 ROK 제 목(Title): * 잘못된 만남과 성생활, 그 이후. * 마이다스동아일보[오늘의신문 1 하루]전동차 나눠타고 구걸행각 25일 오후 6시경 지하철 3호선 충무로역 구내. 을지로 3가에서 동대입구 방향 승강장 끝부분에는 젖먹이 아이를 업은 30대후반의 여자 5,6명과 대여섯살이 채 안돼보이는 아이들 10여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중 5명은 서울 용산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에 있다가 조직원들과 함께 이 곳으로 나왔다. 앵벌이 조직원들이 모여들 무렵 에스컬레이터 끝부분과 승강장이 만나는 양쪽 지점에는 30대 전후반의 건장한 남자 2명이 자리를 잡고 앉아 오가는 승객들의 움직임을 빠짐없이 주시하고 있었다. 이들은 경찰이나 지하철 수사대의 접근을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는 ‘망꾼’으로 한편으로는 대열을 이탈하는 아이를 감시하는 일도 맡고 있다. 한시간여가 지난 오후 7시. 앵벌이 소년에서 ‘엄마’또는 ‘이모’로 불리는 여자조직원들만 남고 아이들은 순서대로 전동차에 투입됐다. 전동차 3칸씩을 배정받은 아이들은 퇴근시간대 혼잡한 틈바구니를 뚫고 손님들의 무릎에 기계적으로 껌을 올려놓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승객들은 아직 초등학교에도 입학하지 않았을 어린 아이들이 껌을 파는 것을 측은하게 여겨 대부분 껌은 받지 않고 적게는 3백원에서 1천원씩을 바구니에 넣는다. 심심치않게 1만원짜리 지폐를 건네는 신사나 아주머니도 있다. 이런 방식으로 3호선 종착역까지 서너 차례를 오간 아이들은 2시간여 흐른 뒤 다시 충무로 역에 집결한다. 아이들이 전동차 속으로 사라진 이후 밖으로 나갔던 30대 후반의 여자들은 약속된 시간이 가까워오자 다시 이곳에 나타난다. 어깨에 둘러 멘 돈가방에서 수북이 동전들을 회수한 조직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총총히 역 밖으로 사라진다. 충무로역을 거점으로 삼는 이유는 충무로역이 지하철 수사대의 순찰이 가장 뜸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 훈기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998/03/26 20:33 [현장르포/팔린 아이들 성장과정]5살되면 껌팔이 강요 서울 용산구 동자동과 후암동 일대에 흩어져 있는 앵벌이 남녀 조직원들은 서로를 ‘이모’ ‘고모’ ‘삼촌’ 등으로 부르며 일가족이나 다름없는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갓난아이로 팔려와 앵벌이가 된 소년 소녀들은 앵벌이 조직원을 자신의 친부모로 알고 성장하며 “집에 빚이 많아 너희들이 일을 해야 한다”는 말에 따라 ‘일’하며 함께 살고 있다. 껌팔이 전모씨(39·용산구 동자동)에게 입적된 상훈군(8·가명)은 현재 S초등학교 2학년. 그는 영아때는 전씨의 등에 업혀 승객들의 동정심을 자아내는 ‘소품’처럼 이용됐고 여섯살이후부터는 스스로 껌팔이를 해왔다. 조직원들은 미혼모가 낳은 아이를 조산원이나 산부인과에서 ‘입양’받거나 아이를 키울 형편이 안되는 극빈자 가정에서 돈을 주고 아이를 데려온다. 이들은 아이를 낳을 무렵의 만삭의 미혼모에게 접근, 병원비 일체를 대주고 1백만∼2백만원을 얹어 아이를 ‘입도선매’하기도 한다. 출생신고서를 허위로 작성해주는 병원측에 사례금이 건네지는 것은 물론이다. 조직원들은 아이를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보내며 주로 방과후와 주말을 이용해 껌팔이를 시킨다. 그러나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구걸 행위에 대한 수치심때문에 점차 학교에 ” 싫어해 아예 제적되는 경우가 많다. 껌팔이인 S초등학교 김모양(12)은 4학년이 된 이후 1년간 단 이틀밖에 학교에 출석하지 않아 현재 가제적 상태다. 동정심을 가장 크게 유발할 수 있는 5∼12세를 넘어선 아이들은 조직원 부모들로부터 떠나라는 눈치를 느끼기 시작한다. 이들은 차츰 조직을 벗어나 홀로 껌을 팔거나 창녀 걸인의 길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한 앵벌이 조직원의 고백이다. 앵벌이 조직원중에는 생활이 극도로 곤궁해서 친자식을 賓珦肩 내모는 경우도 있다. 〈이 훈기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아매매」부원장 인터뷰]『앵벌이 시킬줄 상상못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습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27일 오후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N산부인과 부원장 남모씨(56)는 처음에 아기 매매 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본보가 입수한 병원 장부 얘기를 꺼내자 눈물을 떨구며 일부 사실을 시인했다. ―언제부터 미혼모의 아이를 넘겨왔는가. “90년부터 시작했다. 만삭의 미혼모가 아이를 떼어달라고 찾아오면 유도분만을 통해 아이를 낳게 한뒤 인큐베이터에서 한달여를 키워 원하는 사람에게 넘겼다.” ―얼마씩 받았는가. “90년에는 50만원을 받았으며 2, 3년후부터는 아이 한명에 1백만원을 받았다. ” ―아이를 원하는 사람의 신원은 확인했는가. “아이를 희망하는 사람 대부분이 가명을 사용하고 평생 비밀보장을 원하기 때문에 철저한 확인이 힘들다. 그러나 부모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사람인지, 아이를 몇년간 못낳았는지 등 몇가지 사실은 물어봤다.” ―못된 사람들이 영아를 앵벌이 등에 이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해 봤는가. 생각지 못했다. 모든 것이 돈에 눈이 어두웠던 내 잘못이다.” 어떻게 조작했는가. “만삭의 미혼모를 유도분만한 뒤 임신 2개월에 유산시킨 것으로 기록했다. 출생증명서에는 아이를 데려가는 여자가 직접 아이를 낳은 것으로 적었다.” 심경은…. “지난 33년간 미혼모의 아이를 무료로 받아주는 일을 해왔다. 시어머니가 한국 여산부인과 의사 1호일 정도로 이 분야에서 소명의식을 갖고 일해왔다. 남편은 이 일에 대해 전혀 모른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다.” 〈이훈·김경달기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