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sExLife ] in KIDS 글 쓴 이(By): yan () 날 짜 (Date): 1998년03월27일(금) 18시42분07초 ROK 제 목(Title): 삼열이란 이름.. 웹사이트 댕기다가 우연히 본건데.. 제 추론으로는 "사무엘 모펫= 마포 삼열" 에서 존경의 의미로 딴 이름이 아닐까 싶네요... [참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약사 및 연표 약사 한국 장로교회의 선교는 1884년 9월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알렌(Horace N, Allen, M.D.)이 입국하면서 시작되었다. 장로교 신학교육의 효시는 이듬해인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주일에 역시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목사가 입국하면서 비롯되었다. 그는 선교활동을 하던 중 길가에 버려진 고아들을 모아, 자기 집에서 돌보면서 앞으로 신학교육을 할 계획으로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언더우드의 이 계획은 주한 미국 장로교회 선교부가 채택한 네비우스 선교정책(Nevius Plan)의 자립정책에 따라 고아원의 폐쇄됨으로서 무산되었다. 장로교회의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한국에 와서 선교하던 미국 남,북장로교회, 그리고 호주 장로 교회 등 4장로교회가 연합하여 구성하였던 "장로회공의회"가 1903년 평양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우기로 결의한데서 비롯되었다. 공의회는 이 신학교를 1901년부터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자기집에서 김종섭, 방기창 두 사람을 데리고 자기집 사랑방에서 신학교육을 하고 있던 마펫(Samuel A. offett)의 신학반을 신학교로 전환하기로 결의하였다. 이것이 장로회신학교의 모태가 되는 것이다. 장로회신학교는 1907년에는 길선주, 방기창, 이기풍, 서경조, 한석진, 송린서, 양전백 등 7인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들을 목사로 안수하기위해 위의 4장로교회는 본국 교회의 허락을 받아 한국에 "독(립)노회"를 창립하고 이들을 안수하여 목사로 장립하였으니, 이로서 한국인에 의한 한국 장로교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장로회신학교는 이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1만 4천여명의 목회자를 배출하여 교회와 민족의 지도자들로서의 사명을 감당해 오고 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신학교의 학생들이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여 대부분 체포되어 투옥됨으로서 학교가 한때 휴교를 할수 밖에 없었다. 1938년 9월 장로회 총회는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불법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 선포하였다. 그러나 신학교는 이에 결연히 반대하여 스스로 학교 문을 닫는 고난의 시절을 맞게 되었다. 1901년 시작된 학교는 불과 40년이 채 안되는 세월을 보내고 일제의 강압적 교회정책으로 인하여 폐쇄되는 비운을 겪게 된 것이다. 해방이 되자 북한에는 김일성 공산정권이 수립됨으로서 모든 교회가 박멸되어 버렸으므로 교회의 역사는 단절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남한에는 민주정부가 수립되었으므로 교회도 자연히 순조롭게 재건할 수 있었다. 총회는, 1938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가 폐쇄된 후 김재준 목사가 중심이 되어 1939년 서울에서 개교한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김재준 목사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으로 빚어진 총회내의 갈등으로 "총회신학교"를 새로 설립하기로 결의하였으나 곧 이어 6·25사변이 발발함으로서 총회신학교는 피난지 대구에서 개교를 하였고 휴전이 성립되자 서울로 이전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신학교는 남산에 있던 기독교박물관에서 수업을 시작하였다. 신학교는 이곳에 교사를 건축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이 땅이 국가 소유였으므로 불하를 받아 일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대지 불하과정에서 건축기금 3천만환을 사기 당하는 사건이 터져 당시 교장이었던 박형룡 박사의 인책 사임론이 대두되었다. 이 문제로 박교장을 비호하는 세력과 문책을 요구하는 측으로 양분되어 갈등을 겪다가 결국 1959년 대전에서 모인 총회가 결렬되는 비극을 낳게 되었다. 결국 박형룡 교장을 중심으로 한 소위 N. A .E. 측이 총회를 갈라 나가 오늘의 "총회신학교"가 중심이 된 "합동측"이 되었고, 우리 신학교는 "장로회신학교"로서 서울 광진구 광장동에 1만 8천여평을 매입하여 새 건물을 짓고 이전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였으니 이로서 "장로회신학대학"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본 대학은 1961년에 문교부로부터 "대한예수교 장로회신학대학"으로 인가를 받았고, 1966년에는 대학원 설립을 받았다. 1973년에는 교명을 "장로회신학대학"{으로 개명하였고, 1976년에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와 목회학박사(D. Min.) 과정을 설치하였고 1980년에는 신학대학원(M. Div.) 설립인가를 받았다. 1992년 그 동안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와 공동으로 해 오던 목회학 박사과정을 중단하고 미국의 맥코믹신학교와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1993년에는 교육부의 허락을 받아 교명을 "장로회신학대학교"로 변경하였고, 1994년에는 교육부로부터 "세계선교대학원" 설립인가를 받아 선교학 전공의 대학원 과정이 신설되었다. 1995년 10월에 교육부로부터 "교역대학원", "교육대학원" 설립인가를 받아 교역대학원에 교역학과가, 교육대학원에 교육학과가 각각 신설되었다. 본 신학교는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측) 총회의 유일한 교역자 양성기관으로서 "경건과 학문"의 훈련을 계속하고 있으면서 매년 수많은 교역자를 배출하여 민족복음화와 세계복음화의 첨병 양성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