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milita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 ) <adam.kaist.ac.kr> 날 짜 (Date): 2000년 7월 4일 화요일 오전 12시 02분 27초 제 목(Title): [펌]AK47 쨢ww.defence.co.kr 에서 펌. ------------------------------------------------------------------------- Article No. 437 Posted by 계절지기, on 99/02/28,17:53:49 세계 분쟁의 역사를 바꾼 총 한 자루 AK-47 --------------------------------------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칼라쉬니코프(Kalashnikov)라 불리는 구 소련의 한 병사가 자동소총 한 정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진 오늘에 와서 그 병사가 만들어 냈던 AK-47 자동소총은 전 세계에 5천5백만 정이나 보급되었으며, 그 덕택에 게릴라전이 지구상에 난무하게 되었다. 피로 물들고 있는 러시아로부터 발송된 AK-47에 대한 보고서가 여기에 있다. 50년 전 소련정부가 AK-47 경기관 자동소총을 소련 군대의 표준 소총으로 채택한 순간부터, 최전선 전쟁터는 물론 테러리즘이 끊이지 않는 후방을 막론하고 적을 사살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후부터 AK-47 자동소총이 마침내 모든 분쟁지역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인기있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여러 강력한 무기가 등장하여 전쟁터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기는 했지만 AK-47과 같이 5천5백만 정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무기가 전세계에 폭넓게 보급된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칼라쉬니코프가 처음 AK-47 자동소총을 만들어냈을 때 그것의 가장 큰 특징은 견고함과 단순함이었다. 철판을 용접해 만든 AK-47 자동소총은 그 이전의 어떤 개인소총보다 튼튼했고, 다소 거칠고 조잡하기는 했지만 간단한 작동원리만 파악하면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총 속에 모래나 먼지가 들어가더라도 간단히 제거한 후 사격을 재개할 수 있으며 러시아의 온갖 악천후 속에서도 거의 정상적으로 작동될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 이후 칼라쉬니코프가 만들어낸 이 만능 자동소총은 칼라쉬니코프 자신의 운명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운명을 크게 변화시키는데, 그것은 AK-47 자동소총이 이전의 전투가 불가능한 상황을 전투 가능한 상황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AK-47 자동소총은 분해와 결합이 지극히 간단하면서도 고장이 거의 없어 자이레의 일자무식꾼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크메르, 라이베리아의 어린애들조차도 몸에 지니고 다닐 정도였다.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식은 죽먹기와 다를 바가 없게 된 것이다. 칼라쉬니코프가 만들어낸 살상무기는 인간의 피냄새를 맡은 상어가 떼를 지어 모여들듯이 피와 혼돈이 존재하는 곳이면 지구상 어디서나 전염병 같이 번져나갔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선수들을 공격한 이른바 ‘검은 9월’ 사건 당시에 악명을 떨친 후, AK-47 자동소총은 같은해 일본 좌파 적색군이 로드(Lod) 공항을 기습공격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1981년에는 사다트 대통령을 살해하는 무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AK-47 자동소총은 1989년 캘리포니아 스탁턴에서 있었던 다섯 어린이 살해사건에 동원된 무기였으며, 1995년에는 사다트의 후계자였던 호스니 무바라크 살해 미수사건에서 다시 한 번 최고의 살인무기로서의 명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피냄새 진동하는 살생의 현장에서 AK-47 자동소총이 화약연기를 내뿜었던 사건은 바로 지난 크리스마스에 있었던 페루 리마의 투팩 아마루 대사관 인질극이었다. AK-47 자동소총은 교묘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전세계로 보급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한때 르완다의 투치족을 지원했던 우간다인들에게 AK-47 자동소총을 공급했고, 지금은 자이레의 로렌트 카빌라 반군에게 공급하고 있다. 그리고 무려 6백만 정의 AK-47 자동소총이 20년 이상 내전에 시달리고 있는 모잠비크에 공급되었다. 아프리카에 이어 AK-47 자동소총이 독버섯처럼 번져나간 곳은 바로 지구상 최대의 화약고 중동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초창기에 AK-47 자동소총 생산공장을 이집트에 구축하고 시리아인들을 이 소총으로 무장시켰다. 이집트와 시리아 그리고 이웃 아랍 국가들은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에 AK-47 소총을 공급했으며, 1970년대 PLO의 주류 온건파인 알파타(al-Fatah)파는 요르단 기지에서 서독의 적색군 간부요원을 AK-47 자동소총으로 훈련시켰다. 1980년대 레바논에서는 이란이 아랍 강경파 무장집단인 아말과 헤즈볼라 파에게 AK-47 자동소총을 공급했으며, 이라크는 그들의 레바논 괴뢰정권에게 AK-47 자동소총을 공급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무기가 적과 아군을 불문하고 공통의 살생무기가 되었듯이 70, 80년대 중동에 있어서도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스라엘과 맞선 아랍 연맹국들 모두 AK-47을 들고 적과의 전투에 나섰던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만들어진 AK-47 자동소총은 한때 냉전시대 최대의 적이었던 미국에서도 공공연하게 가장 사랑받는 살상무기로 자리잡았다. 1982년 미중앙정보국 CIA는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게릴라 세력인 무자헤딘을 AK-47 자동소총으로 무장시킬 것을 결정함으로써 파키 스탄을 통해 40만 정이 아프가니스탄으로 흘러들어갔다. 그 무렵 소련연방은 기존의 AK 소총보다 훨씬 정확하고 유효 사정거리가 더 길면서도 가벼운 AK 소총을 개발해냈다. 따라서 미국이 성능이 크게 개선된 신AK 소총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러시아 군인을 죽이고 승리 의 전리품으로서 AK 소총을 탈취하는 것이었다. 칼라쉬니코프가 만든 AK-47 자동소총의 시중가격은 ‘취득의 용이성’과 ‘살인에 대한 수요’의 함수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크메르 루즈군이 배고픔에 지쳐있는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지대에서는 10달러에 매매되고 있고, 전운이 최고조에 달했던 체첸 공화국에서는 도덕성이 마비된 러시아 군인이 그들을 죽이려고 하는 적들에게 1백 50달러에 팔아넘겼었다. 1995년 앙골라-나미비아 국경지대에서는 AK 소총이 13달러 80센트에 거래되었으며 동부 뉴욕에서도 가장 험악한 브루클린에서는 1997년 4월 현재 6백 달러, 남서부 LA에서는 5백 달러, 그리고 이라크의 쿠르드족 사이에서는 17달러 수준에서 시장가격이 형성되고 있다. 이제 탄생 50주년을 맞이하고 있는 이 우아한 소총은 지금까지 인간이 만든 무기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개인무기로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이다. <청각 장애 겪고 있는 총기 제조의 천재> 지금 우리는 AK-47 자동소총을 처음 만든 장본인 앞에 서 있다. 미하일 칼라쉬니코프는 자신의 거실을 처음 찾아와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외투를 벗고 편안히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통역자을 해줄 키릴 코뤼킨과 나는 외투에 어지럽게 쌓여있는 눈을 가볍게 털고 겨울 구두를 벗었다. 칼라쉬니코프는 마치 안주인처럼 여자 목소리를 흉내내며 러시아어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청각 장애가 있어 잘 듣지 못했는데 이로 인해 자신이 개발한 AK-47 자동소총에 대한 명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했고, 또한 그가 사랑하는 소총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우리가 방문한 오늘, 보청기조차 착용 하지 않았으며 그 덕분에 우리는 그와 대화하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맞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우리는 고함에 가까운 큰 소리로 그에게 인사했다) 그러자 칼라쉬니코프도 마침내 나즈막히, 그리고 건조하고 탁한 목소리로 첫 인사말을 꺼냈다. “지금보다 좀더 편한 시간에 왔었으면 좋았을 거요.” 그러나 솔직히 말해 그에게 있어 1년중 편안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이국에서 찾아온 방문자의 필요성만이 존재할 따름이었다. 칼라쉬니코프가 스스로 배우며 깨우친 총기 제조계의 천재였기 때문에, 그리고 가장 고전적인 전쟁 무기를 만들어낸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를 만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칼라쉬니코프는 그가 살아온 77년 인생역정에서 55년 이상을 일, 가족, 그리고 동료들에게 둘러싸인 채 브레즈네프가 지배했던 살벌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바깥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왔다. 그러나 불과 지난 6년 동안 한꺼번에 정치적 상황이 돌변했고, 칼라쉬니코프도 마침내 판도라의 상자에서 탈출해 바깥 세상의 극심한 변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현실은 그의 청춘을 다바쳐 사랑해온 소비에트 연방이 초라한 모습으로 몰락해 버린 것이었다. 당연히 칼라쉬니코프에겐 행복하지 못한 현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그를 방문하고 싶다고 여러번 요청을 했으나 그때마다 그는 ‘지금은 외국인을 만나기에 좋지 않은 시기입니다’라고 말하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칼라쉬니코프는 땅딸막했으나 귀족적인 풍채가 넘치는 남자였다. 그의 키는 1백60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았으며, 하늘색 조깅 바지와 칼라가 없는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에는 ‘월-마트’라는 라벨이 붙어있는 여름용 샌들을 신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외모에서 풍기는 우스꽝스러움과 찌든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칼라쉬니코프에게서는 19세기 러시아의 위엄이 풍기고 있었다. 우리가 칼라쉬니코프를 찾은 날 유럽과 시베리아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이체브스크의 주민들이 새해를 하루 앞두고 축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이제 새해가 되면 80을 바라보게 되는 왕년의 명 총기제조 기술자 칼라쉬니코프는 젊어서부터 통과해온 온갖 역경과 고뇌, 그리고 삶 의 무게에서 벗어나 편안한 휴식의 시간을 가져야 할 시기였으나, 운명은 그를 결코 일에서부터 해방시켜주지 않았다. 칼라쉬니코프는 만성 신경조직 약화증세로 오른손이 마비상태에 있었으며, 염증이 생기고 있는 주요 신경이 수축되지 않도록 목에 플라스틱 칼라를 받치고 있었다. 그로서는 편안히 쉬어야 할 휴일에 별 관심도 없는 먼 이국의 방문자들에게 시달려야 하는 것이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모스크바 출신의 낯선 통역자와 한 명의 미국인이 자신의 가장 은밀한 밀실을 침범하는 것을 끝내 허락하고 말았다. 그는 우리를 거실로 안내하고 난로 옆 의자에 앉게 했으나 배고픔에 지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칼라쉬니코프의 거실은 19세기 소비에트 스타일로 꾸며져 있었으며 곳곳에 미국에서 제조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아마도 미국 친구들로부터 받은 기념품이거나 미국 여행길에서 마련한 것들일 것이다. 거실 맞은편에는 소비에트 연방이 초강대국의 위용을 떨치던 시절, 멋진 군복 차림의 칼라쉬니코프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캐비닛 위에는 칼라쉬니코프의 분신과도 같은 AK-47 자동소총의 예쁜 모형이 2개 놓여 있었다. 우리는 칼라쉬니코프에게 줄 선물로 가져온 칼 한 자루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개인 박물관에 소장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칼라쉬니코프는 칼을 한번 살펴보고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우리가 준비한 선물을 되돌려 주었다. 그의 손은 새처럼 떨리고 있었다. “칼을 선물로 받으면 재수가 없어요.” 우리는 그의 표정에서 러시아의 미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실수를 즐기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미국에는 다섯 번 다녀왔습니다.” 칼라쉬니코프가 말을 꺼냈다. 그의 ‘1990년’이 찍힌 국제 여행자 수표의 과시는 제법 뻔뻔스러운 과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굉장히 날카로운 면이 있었다. 그는 몇몇 서양인들이 그의 방에서 무엇을 생각하게 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몇번에 걸친 미국 방문은 미국인인 내가 생각하기에도 상당히 부러워할 만한 것이었다. 그는 루저 가족(the Ruger Family)에 의해서 솔트 레이크 시티에서 있었던 NRA(미국소총협회) 회의에 초대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매년 텍사스에서 열리는 권총 스포츠 모임인 ‘총기 박람회’에 두 번 참가한 적도 있었다. 그는 워싱턴 DC에도 초대되었고, 과거 스미스소니언 군대 역사가였던 에드워드 에젤의 초청으로 버지니아에서 칠면조 사냥을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M16의 고안자이며 또 한 명의 총기 제조 명사인 유진 스토너와 친구 사이였다. 칼라쉬니코프와 함께한 첫 식사는 냉혈한 사냥꾼의 점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군대의 엄격함을 버리기 싫어하는 늙은 군인들이 습관처럼 갖게 되는 그런 점심이었던 것이다. 고기와 피클 젤리와 치즈 빵, 그리고 구웠지만 차가운 큰사슴 턱이 있었다. 접시라곤 하나도 찾 아볼 수 없었다. 대령 쉬클라이에프는 뚜껑에 검은 AK가 새겨져 있고, 라벨 위에 잔뜩 찡그린 디자이너가 있는 특이한 술병의 보드카를 우리에게 따라 주었다. 토스트는 톡 쏘는 맛이었고 아주 적당히 다져진 것이었다. 칼라쉬니코프는 멀리서 온 방문객을 환대하며, ‘당신은 내가 새해를 좀 더 일찍 시작하게끔 해주었소’라고 중얼거렸다. 그의 중얼거림 속에서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 전쟁 부상으로 시작된 소총 발명 > 칼라쉬니코프는 남부 시베리아의 알타이 공화국 쿠리야의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모는 부농이었으며 그는 1919년 11월 10일에 17형제 중 16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반문맹이었다. 열 명의 형과 자매들은 1920년대와 30년대 러시아를 휩쓴 기근과 계속되는 전염병에 목숨을 잃었다. 소년시절 칼라쉬니코프는 무언가를 만들고 개조하지 않고서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서투른 땜장이였다. 그의 첫 번째 총은 성냥개비를 발사할 수 있는 것으로 그가 10살 때 만든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학교에서 브라우닝 총을 개선하느라 총기를 소지하고 있다가 체포 되기 직전에 학교에서 도망쳤다고 한다. 그는 집을 떠나 이웃 카자흐스탄의 30년대 산업화의 시발점 중에 하나였던 투르키스탄과 시베리아를 잇는 철도공사에서 일했다. 그러나 칼라쉬니코프의 운명이 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39년 병기 제작자로 군에 징집되면서부터였다. 칼라쉬니코프는 그의 천재성을 불과 20세의 나이에 증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소총이 실제 생산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칼라쉬니코프는 1941년 여름, 독일이 그들의 무책임한 동쪽 진군을 시작할 때 초라한 탱크 하사관으로 전쟁의 포화 속에 던져졌다. 그는 브리안스크 전선에서 독일군이 대포로 맞선 탱크전에서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적의 장갑차가 그의 탱크를 명중시켰다. 그는 그의 왼쪽 어깨와 가슴에 파편을 맞았고 그의 동료와 함께 고장난 T-34 탱크로부터 간신히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주일 동안이나 치료를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선을 지키기 위해 교전을 계속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 칼라쉬니코프는 겨우 21살의 앳된 청년이었다. AK-47 발명의 가장 직접적인 원동력은 바로 칼라쉬니코프가 전쟁터에서 당한 그 부상이었다. 전쟁터에서 당한 부상 기간 동안 이 젊은 발명가는 일생 중 가장 자유로운 삶을 살았고, 그는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칼라쉬니코프는 병원에서 그의 첫 번째 자동소총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그의 부상은 그가 전에 철로공사를 했었던 카자흐스탄의 알마아타에서 6개월의 휴식을 요구할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그는 동료에게 원형 자동소총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물었다. 놀랍게도 대담하고 젊은 헨리 포드는 소비에트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순간에 칼라쉬니코프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포드는 엔지니어링 학위도 없었고 크렘린에 어떠한 후원자도 없었다. 그러나 칼라쉬니코프는 그의 도움으로 두 정의 소총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것이 1942년 의 일이었다. 그러나 소련연방 육군은 칼라쉬니코프가 고안해낸 소총을 무시했다. 다소 실망한 칼라쉬니코프는 잠시 후 카자흐스탄의 항공무기 연구소에 임명되었다. 칼라쉬니코프는 강철 같은 의지밖에 지닌 것이 없는 발명가라고 했다. 물론 소비에트 정부도 후에 이점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결혼을 하고, 빅토르라는 아들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의 사무실에서 고안물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1943년 소비에트 정부는 그에게 구경 7.62mm 새로운 탄약을 건네주며 그것에 맞는 새로운 소총을 개발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로부터 4년 후 칼라쉬니코프가 새로운 탄약에 맞는 소총을 개발해 내고 그 총 은 AK-47이라는 명칭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1949년의 일이다. 칼라쉬니코프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이 자동소총의 생산은 이체브스크에서 이루어졌다. 냉전 50년 동안 이체브스크는 소비에트가 다른 사람들이 모르기를 원하는 물건들을 모아둔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그 악명 높은 수용소 Perm-36이 북쪽으로 1백 마일 정도이며, 폐쇄된 첼 야빈스크70의 핵무기 도시는 조금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체브스크는 우랄 산맥의 서쪽 경사에 위치하며 유곤-러프 통나무 빌딩 마을의 중앙에 있다. 이 마을은 6백 마일 밖의 모스크바에 의해서보다는 언덕 너머 시베리아 당국에 의해 통치된다. 오늘날 이체브스크는 곤경에 빠져 있다. 1991년 이체브스크 기계 공장, 또는 이즈마쉬는 5만명의 사람을 고용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3만명을 고용하고 있으며 그나마 그중 절반 이상은 시간제거나 흔히 말하는 강제된 휴가 중이다. 우리가 그를 방문할 때, 반쯤 은퇴한 칼라쉬니코프 자신도 3개월째 월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즈마쉬의 빵과 버터인 군대 소형무기는 이제 더 이상 이곳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곳엔 청부살인에 사용되는 추적할 수 없는 총들을 위한 불법무기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즈마쉬 기술자 다섯명이 마피아 총 제작자로 부업을 하다 잡히기도 했다. 국제시장에서 그 총은 10년 동안의 힘겨운 스탈린식 경제와, 한때 빛나는 성공의 요소로 평가되었던 오래된 소련의 잘못된 중앙 관리로 이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골칫덩이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칼라쉬니코프의 빛나는 발명품인 AK-47 자동소총은 이체브스크 주민들에게 배고픔을 더욱 심화시켜주고 말았다. 50년대 냉전이 더욱 강화되어 갈 때, 소련은 총기 제작공장을 중국과 동독 그리고 체코 등지에 세우기 시작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생산 자체가 바로 헤게모니였 다. 동맹국가가 아닌 국가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버전을 내놓았다. 이중 핀란드와 이스라엘의 아류 작품들이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지금 이체브스크는 체코와 불가리아, 심하게는 중국 모델과 새로운 영업을 놓고 경쟁해야 한다. 칼라쉬니코프는 AK 총의 복제품이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 갈릴리’라는 명칭이 붙여진 AK-47 유사품에 격분하기도 했다. '그들은 나에게 최소한의 감사표시도 하지 않았다'고 칼라쉬니코프는 말한다. <늙은 발명가의 상처입은 영혼> 최근에 칼라쉬니코프가 하고 있는 가장 중대한 역할은 마스코트 역할이다. 새로운 러시아 생활에서 가장 급박하고도 어려운 점은 자금부족 문제이다. 그러나 조국의 고귀한 가치에 봉사하고자 하는 그의 끊임없는 충성심은 그를 러시아제 무기를 외국에 파는 목적을 위해 마련 된 ‘로스부로제니 무기 로드쇼’에 합류하도록 이끌었다. 요즘에 이 무기 전시회는 아주 특별하고 다급한 목표를 갖고 있다. 말하자면 현금을 얻는 것이다. 이것은 AK를 팔아서가 아닌 잠수함이나 전투기를 팔아서 하는 것이다. 1997년 무기박람회 스케줄을 한 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현금에 대한 필요가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쉽게 알 수가 있다. 2월 앙카라, 3월 아부다비, 4월 방콕과 뉴델리 동시, 5월 싱가포르, 6월 프랑스, 8월엔 다시 앙카라, 10월엔 방곡, 그리고 그해 마지막엔 말레이시아…. 칼라쉬니코프는 이중 어떤 것의 기획자도 아니다. 그러나 위의 스케줄을 통해 왜 그가 1995년에 리야드에 갔는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왜 그가 모스크바에 몇 달마다 불려가 호텔에 묵곤 하는지, 그리고 왜 그가 지난 2월 헬리콥터를 타고 앙카라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가를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솔직히 겉만 번지르한 파티 보이로서 비행기를 타고 역사적인 무기 판매 계약장에 모습을 나타낸다. 탱크를 빌려주고 전투기를 팔기 위해 무기 거래가 이루어지는 호텔 로비에 뻔질나게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섬세함을 고려하고, 그의 청각 장애를 고려하고, 그의 돈에 대한 혐오를 고려한다면, 그의 기념비적인 시베리아인의 과묵함은 그에게 있어 자본주의적 상황이 만든 특별한 고통임이 틀림없다. “그들이 나를 가도록 만듭니다.” 칼라쉬니코프는 언짢게 말했다. 이체브스크 마을과 이곳의 시장(市長)은 사소한 약속을 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의 이름과 그의 기본적인 총 수집도 마을의 한가운데 있는 무기 박물관에서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 그래서 새로운 칼라쉬니코프 가족 박물관은 하나의 마케팅 도구로서 미약하게 변장한 수공 예품이다. 이체브스크는 이미 무기 박물관을 갖고 있다. 새로운 박물관의 지하에는 75미터 길이의 자동소총 테스트장이 있다. 시장에 의하면 누구든 총을 대한 주문을 하러 공장으로 온다면 계약을 위한 방이 언제든 1층에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피아노 옆에 있는 작은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칼라쉬니코프는 편지를 내게 건넨다. 그것은 M16의 고안자이며 칼라쉬니코프에게 ‘칼라쉬니코프 보드카’의 선물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유진 스토너로부터의 편지다. 나는 매우 감명받았다. 여기 세기의 전환의 시점에서 20세기 소총 디자인의 신들이 서로에게 술병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한 노력으로 칼라쉬니코프는 계약을 성사시키지는 않았다. 그중에서 몇몇은 결과가 좋지 않았다. ‘칼라쉬니코프 보드카’를 만드는 증류수 제조 장은 어려운 시기에 빠져있다. 칼라쉬니코프는 근본적으로 조용한 사람이다. 그가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만큼 그의 가족에게나 그의 오랜 친구에게도 속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가부장적으로(위엄있게) 듣고 있다가 짧은 말을 전한다. 그리곤 명쾌한 칙령이 뒤 따른다. 우리를 공장 안으로 들여보내줄 수 있는 힘이 그에겐 있었다. 그러나 무뚝뚝한 방식으로 그는 우리가 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것은 감추어야 할 오래된 소비에트 블록의 비밀이 있어서가 아니고, 칼라쉬니코프의 공장, 그가 일생을 바쳐왔던 공장이 지금은 시체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가 그의 죽은 모습을 보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또하나 칼라쉬니코프가 우리가 알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 있다. 그의 아버지. 매우 정력적인 티모페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칼라쉬니코프의 유년시절의 이야기에 나온다. 그리곤 갑자기 30년대에 사라진다. 러시아의 속담에 스탈린 숙청시대와 강제 이주 시기에 지도자가 사라지면 좋 지 않다고 한다. 사실 당시 12살인 칼라쉬니코프를 포함한 가족 모두는 중앙시베리아로 그와 함께 추방되었다. 티모페이는 그곳에서 죽었다. 칼라쉬니코프의 비서인 대령 쉬클리에프는 그것을 고된 노동으로부터 평범한 인간이 죽은 것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고 있으며 동시에 씩씩한 러시아인들 의 둔감함으로 묘사한다. 칼라쉬니코프는 자주 스탈린을 보았다. 스탈린은 이 일에 책임이 있으며 50년대 초 소련 대법원의 최고의 자리에 있었다. 칼라쉬니코프는 그 당시 부대법원장이었다. 그들은 한 번도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내가 그의 부모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말한다. “시베리아는 어두운 숲입니다.” 그의 아버지의 제거는 그에게 아주 중요한 상황이었다. 그것은 자기파괴에 대한 러시아의 무거운 만다라의 한 작은 상징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은 칼라쉬니코프가 국가 권력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했을 것이라는 단순한 추측을 가능하게도 한다. 이것이 바로 국가가 무시할 수 없는 것들을 그가 만들어낸 이유다. 이것은 그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 이름의 두문자인 미크팀(MikTim)을 그의 모든 총 스케치에 사인하여 세계가 그의 아버지를 인정하도록 만든 것에서도 잘 알 수가 있다. “당신의 아버지는 총을 쏘거나 사냥을 하셨습니까?” “나의 아버지는 농부였습니다.” 그는 주제를 피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테이프 레코더를 켰다. 그리고 그는 주춤했다. “이런 게 정말 필요한가요?” 그는 빠르게 물었다. “이것은 모두 잘 알려진 것이오. 여기에 새로운 것은 없소.” 그러나 우리는 그의 말에 개의치 않았다. “만약 당신이 말한 대로 발명이 어린이와 같다면, 아이가 당신에게 가져다 준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내가 받은 것?” 그는 미소의 친밀감에 놀라 다시 묻는다. “첫째로 디자인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나쁜 아이들은 다른 나라에서 입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군대는 어떤 무기를 선택할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뢰성을 필요로 하며 단순성을 필요로 합니다. 내 디자인의 앨범이 곧 나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안에 서 이 무기들에 대한 사랑 없이는 그렇게 다양한 총의 스펙트럼을 창조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칼라쉬니코프가 돈을 벌지 못했다는 것은 아주 간단한 사실이면서도 아주 놀라운 사실이다. 지금 그에겐 그가 처음 시작한 일에 대한 명성과 전설을 관리하는 일 이외에는 어떤 특별한 노력과 결과도 남아 있지 않다. 그는 간단하고 명확한 질문에 그 스스로 질문하고 답할 준비 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예를 들어 왜 그가 인생을 바쳤던 국가가 사라져 버렸는가와 같은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그는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미 사라져버린 과거 충성의 대상을 놓고 더 이상 불명예스런 발언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완고한 스타일로 노력하는 그런 노인 중에 한 명이었다. 몇달전 누군가 새로운 집을 보기 위해 칼라쉬니코프를 이체브스크의 동쪽으로 차에 태우고 갔었다. 새로운 집들은 언덕 위에 폭스 빅토리안, 폭스 조지안, 폭스 투도가 뒤범벅인 매우 비싼 벽돌로 이루어진 괴상한 모양이었다. 모스크바 주변에는 이처럼 미국적 분위기를 풍기 는 교외가 여러 군데 있다. 덩치는 크나 부서져버린 이체브스크의 외관. 몇몇의 돈있는 자들이 너무 많이 미국 텔레비전을 본 결과가 아닌가 싶었다. 칼라쉬니코프 공장의 부공장장도 여기에 집을 지었다. 그리고 작은 요새 같은 15평방피트의 집을 짓고 있는 이는, 현재 칼라쉬니코프의 박물관을 짓고 있는 건설회사의 소유주다. 그 건설회사 사장이 그의 집에 왔을 때 칼라쉬니코프는 괴상한 집들을 짓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비수와 같은 한마디를 던졌다. “그들을 모두 끌어내고 AK 소총으로 사살해야 합니다.” 글/가이 마틴 번역/김판이 [▲] - Re: AH-1..1cas 계획..상당한 기대가.. [▼] - 퀴즈! 퀴즈! 제2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