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lita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military ] in KIDS
글 쓴 이(By): Asteau (언젠간학생)
날 짜 (Date): 1998년 8월 24일 월요일 오전 11시 38분 12초
제 목(Title): 한국전쟁 초기 항공전 (1)


한국전정 항공전이라면 독자들은 대번에 Mig-15와 F-86의 대결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세계 최초로 제트전투기 공중전이 펼쳐졌고, 수많은 
에이스(격추왕)들을 탄생시키며 세계 항공전사에 다양한 신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은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 한국 
공군과는 별 상관이 없는 미국과 북한, 중국이 펼친 '한판의 게임 스코어'일 
뿐이라는 아쉬움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글 : 김세향



사실 우리 한국 공군의 조종사들은 전쟁시간 동안 한명도 에이스가 될 수 없었다.
일단 임무자체가 이런 기록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정찰, 대지공격, 폭격 등에 
한정되었고, 본격적으로 제트기가 동원된 공중전이 펼쳐진 전쟁 후반기에도 우리 
조종사는 F-51D 무스탕을 탈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무스탕이 아무리 훌륭한 전투기라고 해도 프로펠러 전투기와 제트엔진을 단 
Mig-15는 애초부터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항공젼력이라고 말하기조차 민망한 수준의 비행기를 가지고 개전을 맞은 우리 
공군의 초기분전은 그래서 더욱 값진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일제로부터 해방이후 
남과 북에서 어떻게 공군이 태동했는지를 알아보기로 하자.

남과 북의 갈림길.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나고 일본의 항복, 그리고 분단.
어렵게 얻어낸 해방이 분단으로 이어지자 남과 북은 제각기 독립된 국가로의 
체제정비에 몰입하게 된다.
여러가지 쌓인 일이 많았지만, 특히 나라를 잃었던 경험을 가진 한민족에게 있어서 
국방력의 강화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장차 남과 북의 최고 지도자가 되는 이승만과 김일성은 모두 
오랜동안 외국에서 생활하느라 국내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김일성은 소련군 장교로 복무했고 그곳에서 정치 
감각을 익힌 인물이다.
이들이 각각 남과 북의 수반이 된 5년뒤에 발발한 1950년 6월 25일의 전력차이는 
두사람의 경력차이를 극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이승만이 이끈 한국정부는 미군이 철수하며 건네준 잉여장비로 국군의 기틀을 
이루었지만, 공군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한국공군의 창설작업은 군이 아니라 500여명의 민간 항kva인들(일본이나 
중국등지에서 항공업에 종사했던 민간인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한국항공 
건설협회'라는 단체가 주도해 나갔다.
1948년, 이런 민간인 중에서 장차 이나라 공군 창설의 주역이 되겠다는 뜻을 품은 
몇몇의 젊은이가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 입학했고, 여기에서 사관후보생 과정을 
마친 7명의 소위와 105명의 1기 항공병으로 이루어진 '육군 항공부대'가 통위부 
직할부대로 경기도 수색에서 창설된다. 그러나 이 부대는 비행기가 '단 한대도 
없는' 이상한 항공부대였다.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건장한 육체와 장차 이니라를 지킬 공군을 만들어 간다는 
신념뿐인 이 200여 공군(?)장병들은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10대의 L-4연락기를 
미군으로부터 인수하게 되는데, 이것이 같은 해 9월 13일의 일이다.
오매불망 고대하던 비행기를 얻은 이들은 부대 명칭을 '항공군 사령부'로 바꾸고 
곧바로 기체적응 훈련에 돌입, 이틀 후에는 이 기체들을 몰고 서울상공을 누비며 
시범비행을 하기까지 했다.
이때 숙달비행훈련 계획을 담당했던 미군 고문관은 조종사들의 뛰어난 자질에 
감탄, 당초의 계획을 취소하고 한국군에게 자체적으로 훈련할 수 있게 모든 권한을 
이임했다고 한다. 이처럼 차근차근 공군으로의 면모를 갖춰가던 도중에 여수와 
순천에서 일어난 반란사건 진압에 참가하면서 다시 미군으로부터 10대의 L-5를 
인수할 수 있었다.
1948년 12월 1일, 마침내 항공사령부는 '공군 항공사령부'로 개칭하며 비로소 
비슷한 모습으로 탄생하게 된다.
마치 '계모임을 꾸려가듯'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된 한국공군의 창설과는 달리, 
북쪽에서의 공군창설은 눈부시게 진행됐다.
근본적으로 정치인이었던 이승만과는 달리, 철저한 군인의 감각으로 군사력 강화의 
진두지휘에 나선 김일성은 소련공군의 '막심'소좌를 항공대 초대 고문관으로 맞아 
들이면서 적근적인 소련의 지원을 이끌어 낸다.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행운도 따랐는데, 일제가 대륙침락의 전초기지로 건설했던 
주요 비행장이 모두 북쪽에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잊혀져 가던 안주, 
신의주, 청천등지의 잡초를 걷어내자 광활한 활주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 건설하자면 막대한 예산과 노동력, 시간이 필요한 일이 순식간에 해결된 
것이다.
김일성은 남한과 마찬가지로 일본이나 중국,  소련 등지에서 항공 분야에 경력이 
있던 인력을 포함한 400여명의 병력으로 항공대와 훈련소를 개설한다.
서울에서는 이제 겨우 민간단체가 항공건설협회를 발족시키고 있을 즈음, 
북학에서는 이미 훈련성적이 우수한 300여명을 소련공군에 파견시켜 현대적인 
조종기술과 전략, 전술등을 익히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1948년 6월, 북한은 소련군의 출수를 계기로 다수의 전투기, 정찰기, 경폭격기 
등을 인수한 것을 기반으로 8월에는 YAK-9, IL-10 슈토르모비크를 추가로 반입하는 
등,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간다.
그리고 이것은 개전때까지 5,000여명의 병력과 200여대의 실전 전투기를 보유하게 
되는 북한공군의 시동에 불과하다.
북한이 이렇게 눈부신 발전을 보이고 있을 즈음, 남한에서의 항공전력 강화는 
지지부진이었다.
가장 근본적인 항공기를 구입할 예산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상대적으로 미군의 
원조도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1949년 10월 1일, 마침내 육군산하에서 독립해 '대한민국 공군'이 창설 되었고, 
김포와 여의도, 광주, 대구, 군산 수원 등지에서 기지를 건설했다.



To be continued...

 
      -------------------------------------------------------------------
      G o n g m u d o h a             公無渡河 公竟渡河 陸河而死 當泰公河
      G o n g k y u n g d o h a       公竟渡河 陸河而死 當泰公河 公無渡河
      T a h a i e s a                 陸河而死 當泰公河 公無渡河 公竟渡河
      D a n g t a e g o n g h a       當泰公河 公無渡河 公竟渡河 陸河而死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