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edicineClinic ] in KIDS 글 쓴 이(By): virt ( TЯIV) 날 짜 (Date): 2003년 5월 20일 화요일 오후 04시 28분 48초 제 목(Title): [기시다 슈] 일인칭의 심리학 일본의 전공투 세대들이 맑시즘에서 벗어날 때 공부했다는 심리학자 입니다. 한국에는 게으름뱅이 정신분석 1,2 로 저서가 번역되었는데 이를 타이핑하여 올립니다. 일본과 한국의 근대화 과정이라든지, 동양과 서양의 사상적 충돌 이라든지, 삶의 방식에 대한 사유가 쌓아온 과정을 서술하는 체계에 끌리는 점이 있습니다. 정혜신의 글보다 좀 하드하긴 하지만 건질 부분이 많으리라 믿고 올립니다. 일인칭의 심리학 기시다 슈 인간의 행동에 관하여,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상이한 두 시각이 있다. 실체론적(實體論的)이라고 할 수 있는 견해, 또 반응론적(反應論的)이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여기에 대단히 공격적인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가 왜 매우 공격적인가를 설명하려 할 경우, 실체론적 견해로 말하면 그것은 그가 보통사람 이상으로 공격적인 본능·충동·욕망이나 공격행동을 야기하는 작용을 갖는 생리적 또는 화학적 물질, 곧 어떠한 실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 뇌와 신체 속에 있는 그와 같은 실체가 그를 공격행동으로 몰아대고 있는 것이다. 그와 달리 반응론적 견해로 보면, 그가 대단히 공격적인 것은 먼저 주위의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공격적이든가, 주위의 세계가 그에게 위협을 주고 있기 때문으로, 그는 그에 대해 반응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가 보통사람 이상으로 공격적인 것은, 어떤 까닭으로 해서 그에게는 보통사람 이상으로 주위의 세계가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 두 가지 견해를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번갈아 취하고 있다. 어떤 때는 한쪽 견해를 취하고, 또 어떤 때는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는 것인데, 그 어느 경우에나 또 다른 별개의 견해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적이 많다. 이 두 가지의 견해는 대체로 객관적 견해, 곧 타인을 보는 견해와, 주관적 견해, 곧 자신을 보는 견해로 대응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느니보다, 우리는 타인 내지는 적의 행동에 관해서는 실체론적 견해를 취하게 마련이고, 자신이나 자기편의 행동에 관해서는 반응론적 견해를 취하기 쉬운 경향이 있다. 예컨대 갑(甲)과 을(乙)이 다투며 서로 으르릉거리고 있다고 치자.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조그만 다툼이던 것이 점점 격앙하여 마침내는 무섭게 서로 미워하게 되고, 상처를 주고받기에 이른다. 이런 경우, 갑·을 모두가 서로 상대측의 행동에 관해서는 실체론적 견해를 취하고 있는 것이고, 자신의 행동에 관해서는 반응론적 견해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자기에 대한 상대의 공격은 그의 심술궂음과 비뚤어진 근성 또는 남을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는 오만함 등, 비정상적으로 공격적인 성질에 기인한다고 간주하고,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공격은 상대방의 공격에 대응한 부득이한 정당 방위라고 간주한다. 심리학이란느 말을 의학적 및 철학적 인간관까지 포함한 넓은 뜻으로 해석하면, 심리학의 역사에서도 이 두 견해는 서로 대립하여 교차하지 않는 두 흐름으로써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있다. 인간의 기질적 차이는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체액 성분의 과다에 따라 정해진다며, 담즙질(膽汁質)·우울질(憂鬱質)·다혈질(多血質)·점액질(粘液質)의 4대 주요 기질을 제창한 히포크라테스는 최초의 실체론적 심리학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기질론에 따르면, 우울질의 사람이 우울한 것은 그에게 세상이 온통 우울한 일투성이라서가 아니라, 그에 있어서는 멜란콜리아[melancholia: 본디는 그리스어로 검은 담즙의 뜻]라는 체액성분이 많기 때문이다. 근대에 이르러 여러 가지 심리학 이론과 정신병리학 이론이 등장하였는데, 그 태반은 실체론적 입지에 서 있었다. 처음에는 반응론적 견지도 고려에 넣으려고 했지만, 그것은 어설픈 노력에 그치고 결국은 실체론적 입장으로 돌아갔다. 실체론적 입장은 전술한 바같이 타인의 행동에 관한 객관적 견해이므로, 객관적 과학이론을 만들려 하면 아무래도 이 견지에 서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의 연합심리학(聯合心理學)에서는, 관념은 실체이며 정신은 그것을 수용하는 그릇으로써, 관념은 정신이라는 그릇 속에서 붙었다 떨어졌다 한다는 것이었다. C. 볼프의 능력심리학(能力心理學)에서는, 인간의 정신은 인식능력이라는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점은 W. 운트(Wilhelm Max Wundt: 1832∼1920)의 구성심리학(構成心理學)에 있어서도 같아서, 정신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의 하나인 감각은 강도(强度)·지속·연장(延長)·명료도(明瞭度) 등의 실체적 성질을 지니고 있다. 구성심리학의 요소주의적 관점에 반대하여 정신의 전체적·통일적 활동을 중시한 W. 제임스의 기능심리학(機能心理學)도, 정신기능의 목적을 적응에 있다고 보고, 정신을 움직이는 힘으로써 본능이라는 실체적 에너지를 가정했다. 당자 밖에는 직접 체험할 수 없는 정신의 내용을 주로 대상으로 하고 있었던 종래의 심리학에 반대하여 관찰 가능한 행동만을 문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J.B. 왓슨(John Broadus Watson: 1878∼1958)의 행동주의(行動主義) 심리학은, 행동을 환경의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파악한 점에서는 반응론적이지만, 환경의 자극을 그 물적(物的)인 측면으로밖에 보지 않고 행동의 요소를 신경생리적 반사(反射)로 환원하여, 결국은 대뇌(大腦)의 생리학적 실체에 의지했다. 또, 게슈탈트(Gestalt) 심리학에서도 심리적 게슈탈트의 배후에는 신경계의 장(場)에서 전개되는, 그와 같은 유형의 생리적 게슈탈트가 있었다. [게슈탈트 : 하나의 도형(圖型), 하나의 멜로디, 하나의 동작과 같이 구조를 가진 것, 형태(形態)의 뜻. 게슈탈트 심리학 : 정신을 요소의 집합으로 보는 종래의 견해를 부정하고, 전체가 부분의 단순한 집합이 아님을 지적하여 게슈탈트를 강조하는 심리학. 형태심리학. 역주] 결국, 마음은 실체로서는 파악하기가 어려우니까 실체론적 견지에서는 심리학은 생리학적 실체를 끌고 나오는 수밖에 없고 필연적으로 대뇌생리학(大腦生理學)·신경생리학(神經生理學)에 이른다. 정신병리학에 관하여 말한다면, 거의 전면적으로 실체론적이었다. 베르니케(Carl Werniche:1848∼1905) 등의 뇌기능 국재론(腦機能 局在論)은 그 극단적인 형태였다. [베르니케 : 브레스라우 대학(1890)과 하레대학(1904) 교수로, 실어증(失語症) · 반맹증(半盲症)의 연구에 공헌하였다. '베르니케 현상'이니 '베르니케 병'의 발견에 공헌했고, 언어중추에 그 이름을 남기기도 하였다. 역주] 한편, 반응론적 입장에 서는 심리학으로는 W.딜타이(Wilhelm Dilthey : 1833∼1911)의 요해심리학(了解心理學)과 F.브렌타노(Franz Brentano : 1838∼1917)의 작용심리학(作用心理學) 등이 있다. 브렌타노에 따르면, 의식은 언제나 무엇인가에 관한 의식이며, 대상에 대한 이런 지향성(志向性)과 단절된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식욕은 맛있어 보이는 먹을 거리에 대한 욕망이요, 성욕이란 매력적인 이성에 대한 욕망이다. 먹을 거리 또는 이성이라는 대상에 대한 지향성과 분리하여, 식욕이나 성욕을 섭식본능(攝食本能)이니 성본능(性本能) 또는 타액(唾液) 분비니 성호르몬 등으로 환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같은 사고방식에 따른다면, 증오란 당자가 살고 있는 세계 속의 어떤 증오스러운 대상에 관한 의식이므로, 가령 뇌생리학(腦生理學)이라든가 뇌생화학(腦生化學)이 맹렬히 발달하여 증오 때의 생리학적 또는 생화학적 상태가 정확히 판명되고 그 상태를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 발견되었다고 치고, 그러면 생리학적 또는 생화학적으로 그 상태를 일으켰다고 해도, 당자의 주관적 상태는 어떤 증오스러운 대상을 증오하고 있는 경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다. 의식의 특징을 지향성에 두는 사고방식은 E.후서얼(Edmund Husserl : 1859∼1938)에게 계승되어 현상학(現象學)이 되고, 또 지향성이라는 관점은 인간을 항용 세계 속의 대상과의 관계에서 포착하는 것이어서, 인간을 세계내 존재로 하는 관점을 함의(含意)하고 있으며, 실존철학(實存哲學)과 결합되었지만, 딜타이의 요해심리학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체계화에는 적합치 못하여 심리학의 주류가 될 수는 없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본래는 실체론적 이론의 테두리 안에 넣기 어려운 요해적(了解的) 방법을 어떻게든 그 테두리 안으로 밀어넣으려한 특이한 이론이랄 수 있다. 개업의가 되었을 때, 그는 모순된 상황속에 빠졌다. 당시 과학사상은 절대적으로 실체론적 견지에 서 있었다. 실체론 이외는 과학이라고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개업의사를 찾아오는 히스테리나 강박신경증의 환장에 대해서는, 당시의 실체론적 정신의학은 완전히 무력하였다. 이같은 상황에 처해 있던 프로이트는, 실체론에 의거하여 요해적 방법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이론은 실체론과 반응론 사이의 기묘한 타협·혼합이며, 때로는 동요를 나타내고 있다. 그는 초자아·자아·이드의 뇌에 있어서의 국재(局在)를 생각하고 있었고, 리비도[Libido:본디는 라틴어로 '욕망'의 뜻. 정신분석용어로, 성적 충동을 발동케 하는 힘이며(프로이트), 또 모든 본능적 에네르기의 본체를 뜻하기도 함(융). 역주]는 지금도 측정할 수단이 없지만 양적 실체였다. 대상을 사랑하고 대상에 디비도를 비급(備急)하면, 그만큼 자아리비도는 감소하고 자기평가는 내리는 것이다. 반대로 외계에 관심을 갖지 않고 외계로부터 리비도를 철회하면, 정신분열병에 있어서의 과대망상처럼 자기평가는 엄청나게 오르는 것이다. 만족되지 않은 리비도가 불안으로 변질한다는 현실신경증(現實神經症)의 견해에도 실체론적 시각이 나타나 있다. 불안은 불안스러운 대상에 대한 반응은 아닌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신분석만큼 요해의 지평(地平)을 넓게 추구해 간 이론은 없다. 그 요해의 범위는 꿈이라든가 신경증을 훨씬 뛰어넘어, 예술과 종교 등의 문화적·사회적 현상에까지 미치는 것이다. 이리하여, 프로이트 이론은 두 가지 정반대되는 비판에 맞서게 되었다. 하나는 실체론의 입지에 서는 비판으로써, 프로이트 이론은 실증적 근거가 결여된 비과학적 속류(俗流) 심리학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반응론의 입지에 서는 비판으로, 프로이트 이론은 기계론적·객관주의적 틀 안에 사로잡혀서 인간의 주체성을 등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소위 정통파의 분석자는 차지하고 프로이트의 후계자들도 두 방향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C.G.융은 집합무의식(集合無意識)을 강조하여 무의식을 더더욱 실체화하였다. 그에 있어서는, 신경증이나 정신병의 증상, 망상, 꿈의 이미지, 인간의 지혜 또는 통찰, 성격 등 온갖 현상이 민족적으로 유전되는 집합무의식에 실재하는 원형(原型)[생물의 발생적인 유사성에 따라 추상된 유형. 생물학· 심리학· 성격학 따위에서 생명현상을 유형화할 때 쓰는 말 - 역주]에 유래한다. W.라이히는 프로이트의 리비도를 '오르곤 에네르기'라고 바꾸어 부르며 그것이 대기 속에도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 집적기(集積器)까지 고안하여 실제로 그 양을 축적하려 하였다. 한편, K.호르네이(Karen Horney : 1885∼1952)와 E.프롬(Erich Fromm : 1900∼ 1980) 등 이른바 신(新) 프로이트파는, 프로이트의 실체론적 카테고리를 깨어버리고 인간행동을 대인관계에서의 반응으로 보고자 하였다. 프로이트의 리비도론에서나 죽음의 충동론에 관한 호르네이의 비판에서는 반응론적 견해가 잘 나타나 있다. 레인(Ronald David Laing: 1927∼ )은 자신에게 영향을 준 이론가의 하나로 신프로이트파의 H.S.설리반(Harvy Stack Sullivan : 1892∼1949)을 들고 있는데, 레인이 정신분석자라면 신프로이트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레인이 정신분열병자에게 쓰고 있는 요해적 방법은, 정신분석적 요해라기보다는 딜타이적 요해에 가깝다. 딜타이에 있어서는 요해란 직접적 소여(所與)인 심적 연관의 직각적 파악으로, 타인의 심적 연관을 요해할 때는 타인의 환경에 스스로를 놓고 심적 과정의 어떤 것을 강화하고 어떤 것을 약화해서 타인의 체험을 묘사적으로 추체험(追體驗)하는 것인데, 레인은 바로 이 방법을 정신분열병자에게 적용하고 있으며, 정신분석적 요해의 특징인 상징해석(象徵解釋)과 방위메커니즘의 이면을 꿰뚫어보고 그 탈을 벗기는 등의 폭로적 방법에 중점을 두진 않았다. 이 사실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그의 저서 『분열된 자아』(The divided self, 1960)의 제 3장에 나오는 강렬한 고독 공포를 지닌 여성에 관한 레인의 분석이다. [『분열된 자아』: 이 저서를 통하여 경험과 행동의 분열, 인간관계의 소외와 파괴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현대의 광기(狂氣)의 특질을 강조하였다. 레인은 영국의 정신의학자· 정신분석가로, 반수용주의(反收容主義)를 표방하여 독자적 의료실천을 전개했다. 사회와 의사야말로 환자를 정신분열병으로 만들어낸다는 반정신의학의 이론가가 되었다. 역주] 그녀는 외동딸이었으나, 양친의 보살핌이 없이 쓸쓸히 자란 아이였다. 어려서부터 누구에게나 의미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가 퍽이나 강하였다. 17세에 결혼하여 한동안은 행복했으나 군인이었던 남편이 외국에 부임하게 되어 그를 떠나 보낼 때는 심한 공포감을 맛보았다. 그럴 때 모친의 급환이 그녀에게 구제가 되었다. 모친을 간병해 달라는 부친의 간청을 받고, 그로부터 1년간은 전에 없이 충실한 삶을 가질 수 있었다. 간병의 보람 없이 모친이 죽자, 그녀는 실망과 슬픔이 아닌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뒤, 그녀는 외국에 나가 있는 남편 품으로 돌아가서 수년간은 즐겁게 지냈으나, 남편에게 지나친 배려를 요구한 끝에 결혼생활에 파탄이 오고, 귀국하여 부친과 그녀가 레인을 찾아왔을 때는 28세가 되어 있었다. 레인은 이 증례(症例)의 정신분석적 해석과 레인 자신의 견해를 대비하였다. 정신분석적으로 해석하면, 그녀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Oedipus complex)에 사로잡혔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부친에게 굳게 매달려 무의식적으로 부친에게 리비도를 기울이고 모친에게는 적의를 쏟았다. 그러면서 그 사실에 관해 무의식적으로 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모친을 그토록 헌신적으로 간병한 것은, 모친에 대한 죄의식을 보상하기 위해서이며, 모친의 죽음으로 공포감에 빠진 것은 무의식적 갈망이 이루어지자 어쩐지 자신이 죽은 듯한 느낌이 든 때문이었다. 남편에게 지나치게 의지하여 남편의 과대한 보호를 요구한 것은, 한 여자로서 한 남자를 대한 것이 아니라 남편에게 부친의 대리를 요구한 때문이며, 결혼생활에 파탄이 온 것은 결국 대리로서는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끝에 그녀는 최종적으로 부친과 둘이서만 지낸다는 목적을 실현한 것이었다. 그녀는 광장 공포증(廣場恐怖症)이 있어서 거리를 혼자 걷기를 불안해 했는데, 이것은 자신이 매춘부라는 무의식적 공상을 품고는 스스로 그 공상을 실행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며, 또 그 공상은 유부남 곧 부친에게 성적 갈망을 품고 있는 자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정신분석적으로는 이상과 같이 해석될 것이다. 레인은 위와 같은 정신분석적 해석을 배척하고, 그녀의 인생의 중심문제는 그녀의 '무의식'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며, '무의식적인 것'으로 바꿔치기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무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보이는 곳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녀의 중심문제는 존재론적 자율성의 결여, 존재론적 불안정에 있다. 자기 자신으로서는 살아 있다는 확실감을 갖지 못하고 남편이든 모친 또는 부친이든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필요하다는 이유 외에는 스스로를 인정할 수 없는 데 문제가 있다. 그녀는 그녀를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의 눈에 자신이 비쳐져 있을 때에만 자기 존재를 실감하게 된다. 그러기에, 누군가 알고 있는 사람이 곁에 없으면 그녀의 존재는 스러져 버린다. 그녀가 심하게 비정상적으로 고독을 두려워하며 거리를 혼자서 걸어다닐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거리의 군중들은 아무도 그녀에 대해 신경을 써주지 않기 때문이다. 모친의 죽음이 그녀에게 실망이나 슬픔 아닌 공포감을 야기한 것은, 무의식적 갈망이 실현된 때문의 죄의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존재를 확인해 주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사람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존재는 언제나 상실의 위기에 처해 있으므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 데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모친의 죽음을 슬퍼할 마음의 여유는 도무지 없다. 홀아비가 된 부친과 같이 지내면서, 하루의 태반을 부친에 관한 생각에만 몰두하고 지내고 있는 것도, 부친에 대한 리비도에 고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돌봐드릴 필요가 있는 부친에 의해 자기 존재의 확인을 얻고 싶음에서다. 또, 매춘부라는 공상은 어디 사는 아무에게나 안기는 여자에게 자신을 견줌으로써 지조없이 누구에게나 매달리는 불안정한 그녀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이같은 레인의 요해적 파악은, 정녕코 그녀 자신의 입장과 그녀 자신의 관점에 입각하여 그녀의 주관적 체험을 자각적으로 추체험함으로써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환자의 주관적 체험을 직각적으로 추체험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것은 환자의 주관적 체험의 뒤에 숨어있는 환자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무의식적 의미를 탐구하려는 프로이트의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런 의미에서, 레인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 전통의 연장선 위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딜타이의 요해심리학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때로는 브렌타노의 작용심리학으로 나타난 반응론적 심리학의 흐름에 위치해 있고, 서로 그다지 관계없었던 딜타이와 브렌타노를 하나의 새로운 반응론적 심리학 이론 아래 통합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주관적 심리학이 일인칭의 심리학이며 객관적 심리학이 삼인칭의 심리학이라고 한다면 정신분석은 이인칭의 심리학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이 분류에 따른다면 레인의 심리학은 일인칭의 심리학이라 하겠다. 그것은 정신분석처럼 환자와 거리를 두고 그 행동을 폭로하는 식의 해석 방법을 취하지 않고, 환자의 마음속에 몰입해 가는 태도를 취하는 점으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레인의 정신분열병 이론은, 요컨대 정신분열병자의 주관적 관점에서 본 정신분열병 이론이다. 가령, 광기(狂氣)가 있으면서 한편으로 제 정신을 견지하고 명석한 분석력과 예민한 통찰력을 잃지 않은 분열병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가 자기의 분열병을, 자신에게 감지되고 인지되는 자신의 심리적 과정이 타인에게는 어떻게 보이는가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 반성적 내관(內觀)으로 파악하고 체계화하였다고 할 때, 그로써 성립된 이론이 곧 레인의 이론이라고 한다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덧붙여 말하면 주관적 견해라고 해서 그것이 잘못이라는 뜻은 아니다. 주관적 견해에 대해 일방적이며 한쪽에 치우쳤다고 말한다면, 객관적 견해도 똑같이 일방적이며 한쪽에 치우쳐 있다. 객관적이라는 것과 공평하고 올바르다는 것을 혼동시하는 견해는 경솔한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을의 공격행동은 을의 주관적 견해로는 정당한 반격이며, 갑의 객관적 견해로는 심술궂고 비뚤어진 성질의 표현이다. 요컨대, 을의 공격행동에 관해 을은 반응론적 견해를 취하고 갑은 실체론적 견해를 취하는 것이지, 이쪽이 옳고 공평하며 저쪽이 그릇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정신분열병자와 정신과 의사(또는 그 병자를 어쩐지 미심쩍다고 판단하여 의사에게 데려온 가족) 사이에는, 이같은 을과 갑 사이에 벌어지는 현상과 동일한 대립이 있다. 양자는 여러 문제에 관해 의견이 대립해 있다. 예컨대, 전자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후자는 근거없는 망상이라고 간주하고 이싿. 그리고 후자는, 갑이 을의 공격행동을 까닭없는 것으로 간주하며 심술궂은 성질의 실체에서 원인을 찾는 사례와 같이, 전자의 언동의 원인을 정신병이라는 실체에서 갖는다. 이 사례에서의 심적 태도는 전적으로 동일하다. 갑이 을의 공격행동을 심술궂은 성질이라는 것으로 실체화하여 그 실체를 제거함으로써 시정하려 해도 효과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과 의사가 정신병자의 이상행동을 정신병(뇌에 어떤 변화가 있는 경우나 뇌 속에 이상한 화학물질이 존재하는 경우 등)이라는 것으로 실체화해서 그 실체를 제거함으로써 중단시키려 해도 효과가 없음은 당연하다. 심술궂은 사람이니 정신병자니 하는 판정은 타인의 관점에서의 판정이다. 심술궂은 사람이라고 타인에 의해 판정되는 사람도, 당자는 자신이 심술궂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것은 자각이 덜 되었다거나 자만심 때문에 당자는 모른다는 문제가 아니라, 어느 관점에서의 문제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병자도 자신을 정신병자로는 생각지 않는다. 그가 스스로 정신병자로 인정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가 본심으로 납득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그렇게 불리기에 그냥 동조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런 엉뚱한 언동을 하면서도 자신을 정상으로 여기고 있으니 그거야말로 정신병자인 증거"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 정상자가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은 권리로, 정신병자도 "자기는 미치광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레인도 말했듯이, 정신병이란 타인에 의해 붙여지는 딱지이다. 타인에 의해 붙여질 수밖에 없는 딱지를, 그대로 인정하고 본심으로 믿는 자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이한 일이다. 따라서, 정신병자에게 정신병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레인이 정신병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정신병'이니 '정신병질' 등의 말을 쓸 때는 으레 괄호를 넣고 있는 것은, 정신병자의 관점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인이 A.에스터슨과 공저로 낸 『광기와 가족』(Sanity, madness, and the family, 1970)에서는, 고뇌하는 한 인간이 몰이해한 가족과 정신과 의사에 의해 정신분열병자로 변해 가는 양상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정신병자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서 본 발병의 경과다. 객관적 관점에서 보면, 이와 같은 시각은 피해망상적· 파라노이아적[Paranoia的: 체계가 선 망상을 품는 정신병, 편집병] 이라고 판정될 것이다. 거듭 강조하고 싶거니와, 이 두 견해는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가 따위는 아니다. 또 양자를 합해 둘로 나눈 중간적인 데 진리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객관적 관점에서 얻어진 자료가 과학적 체계화에 적합하다고 하여 그것만을 오직 하나의 올바른 관점으로 간주하면서 한쪽 당사자인 정신병자의 관점을 잊고 있었던 실체론적 정신의학의 좌절은 이제 명백하다. 적어도, 바야흐로 명백해지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정신과 의사를 포함한 이른바 정상자와 정신병자 사이에는 앞에 든 갑과 을 사이처럼 대립과 싸움이 있다. 정신병의 치료란 그 싸움의 해결이다. 그러므로, 정신병자가 나았을 때 - 바꾸어 말해서 변화했을 때는, 그의 가족과 정신과 의사 등 그 주위의 사람들도 변화해 있어야만 한다. 갑이 처음부터 을의 관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관점만이 절대로 올바르다고 확신해 버린 끝에, 자기에 대한 을의 행동을 을의 고약한 성질 탓으로만 돌렸다가는, 을을 더더욱 옹고집퉁이로 만들어 싸움을 한층 도지게 할 뿐이다. 그와 동일한 짓을, 종래의 정신과 의사는 정신병자에게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병자에게 레인의 책을 읽게 하면, 그 피해망상적 또는 자기중심적 견해를 자극하고 강화할까 두려워서 읽게 하고 싶지 않은 정신과 의사가 있다고 하니, 이같은 태도는 정신병자로 하여금 그의 관점을 버리게 하고 자신의 관점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치료라는 관념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다툼의 경우도, 상대로 하여금 그 관점을 버리게 하고 자기 관점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은, 그것이 만약에 성공하면 자기를 위해서도 가장 안이하고 홀가분한 해결법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성공률이 낮은 해결법이기도 하다. 타인의 관점에 설 수 없는 자기중심성이 정신병의 한 특징이므로, 레인의 주관적 정신병 이론만을 옳다 하고 종래의 객관적 이론을 모조리 버리는 것도 잘못이지만, 레인의 이론이 종래의 이론에 맹점이 되었던 부위를 찌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정신과 의사는 정신병자와(같은 정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로 자기중심적이었기 때문에, 타인인 정신병자의 관점에 설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른바 객관적 이론은 정신과 의사의 주관적 이론이었던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looking for a unique item in the real worl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