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dalma () 날 짜 (Date): 1996년07월17일(수) 03시29분31초 KDT 제 목(Title): [갈무리] 고려 혁명군... <<갈무리 시작>>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키즈의자연) 날 짜 (Date): 1996년07월16일(화) 17시01분15초 KDT 제 목(Title): [퍼온글] 고려혁명군.... 일제시대 러시아를 무대로 항일 무장투쟁을 벌이던 독립군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고려혁명군의 실상을 밝혀주는 자료가 러시아의 정부문서보관소에서 최초로 발견됐다. 독립군들의 구체적 신상명세까지 포함된 이 자료는 사회주의자라는 이 유로 백안시당해온 면이 없지 않았던 고려혁명군의 실체는 물론 독립운동사 연구 에도 새로운 전기가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한 선대들에 대해 후손들은 과연 얼마나 올바른 자리매김 을 하고 있을까. 해방 이후 반세기간 계속된 남북대결로 굴절된 우리의 역사인식 과 의식의 근저까지 파고든 편가르기는 독립군에게도 변함없이 투영돼 왔다. 조 국 광복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가에 관계없이 그들이 어디에서 투쟁했고, 누구의 힘을 빌렸느냐에 따라 우리는 삿대질을 하거나 백안시해왔다. 소련땅 혹은 북간도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로 치부해버리고, 또 그렇게 해야만 했던 시절이 이제는 과거로 접어들고 있음에도 아직 그 흐름에는 큰 변화가 없다. 6·25가 끝난 지 40여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전사 자들의 유해를 찾기 위해 북한에까지 손을 벌리는 미국이나 2차대전 종전 후 소 련땅으로 포로로 잡혀가 숨졌거나 아직 생존해 있는 자국민을 찾기 위해 노력하 는 일본에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이러한 의문과 답답함, 한편으로는 자괴심 이 러시아의 독립군을 추적하게 된 동기였다. 일제시대 때인 1920년 전후 러시아 지역인 연해주와 시베리아 일대에는 최고 5천 명 가량의 한인 독립군들이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지역은 당시 일제의 압제를 피해, 또는 독립운동을 위해 조국을 떠나온 동포들이 많이 몰려 있던 중국의 북간도 및 서간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나라를 찾기 위해 투쟁을 할 수 있는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를 무대로 활동하던 독립군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로 구 성돼, 어떤 투쟁을 전개해 왔는가는 학계에서조차도 미해결의 연구과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가운데서 일제시대 러시아를 무대로 활동하던 고려혁명군 7백90명 의 명단과 부대활동을 보여주는 관련문서들이 발굴된 것은 적잖은 의미를 지니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19년 3·1운동 후 반일 무장투쟁에 나선 단체와 사람들을 우리는 「독립군」 이라 부른다. 일제가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지역에서의 한인 독립군 활동에 대해 대규모 토벌작전을 전개한 것은 1920년 겨울이었다. 일본군의 대대적 공세에 직 면한 독립군 부대들은 「옥쇄를 각오하는 전면적인 반(反)소탕작전에 나설 것인 가」 아니면 「일단 적의 예봉을 피해 전열을 재정비할 것인가」라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북간도와 연해주, 시베리아의 독립군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 이 결과 4천5백여명에 이르는 독립군들이 1921년 봄 러시아 흑룡강주로 집결하게 된다. 도처에서 몰려든 독립군 부대 가운데 대한의용군과 더불어 최대 세력을 형 성하고 있던 부대가 바로 고려혁명군이었다. 통수권 문제를 놓고 대한의용군과 갈등을 빚기도 했던 고려혁명군은 여기서 이어지는 자유시사변을 겪는 우여곡절 끝에 2천1백명의 대규모 반일 무장부대로 새롭게 통합되기에 이른다. 고려혁명군은 당시 러시아의 지원 아래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주둔해 유격투쟁 에 착수한다는 만주 출정계획에 따라 설립됐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본과 러시 아 극동공화국간에 상호 적대행위금지가 논의되면서 결국 이 계획은 무산됐었다. 모스크바 시내의 중앙군사아르히브(아르히브는 우리의 문서보관소에 해당함)에서 발굴해낸 고려혁명군 관련 문서는 8종, 1백10여장에 이 른다. ................... 곳곳에 나타나는 혁명군의 반일운동 경력 고려혁명군 관련문서는 △사병 6백80명의 명단과 신상명세서 △장교 63명의 명단 과 신상명세서 △부대 제대자 47명의 사진과 신상명세서 △혁명군 3연대 상황조 사표 △혁명군 편제명령서 △혁명군 보통학교 계획안 △혁명군사관학교 운영상황 서류 △사관학교 장교심리 조사표 등으로 구성돼 있다. 6백80명의 사병 중 당시 러시아 극동지역에 본부를 두고 있던 고려공산당 당원으 로 가입된 경우가 2백55명이고 나머지 4백25명은 비당원이었다. 63명의 장교 가 운데는 러시아 5군단에서 파견됐던 것으로 추정되는 4명의 러시아 장교도 포함돼 있다. 러시아의 아르히브에서 발견되는 대다수의 한국관련 문서가 러시아어로 돼 있는 것과 달리 제대자 명단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20년대의 한글 어투로 기록된 이번 발굴 문서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고려혁명군 사병 7백27명과 장교 63 명의 명단이다. 주목할 만하다고 하는 이유는 이 문서들을 통해 그간 거의 잊혀 진 채 일부로부터는 「빨갱이」라는 박대까지 받아온 고려혁명군 실체를 보다 객 관적으로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고려혁명군 3연대 상황표를 보자. 1921년 9월에 작성된 「적위군인과 장교와 위생청결의 형편과 민족에 대한 성기 」라는 제목의 이 문서는 고려혁명군 3연대 군정위원이 작성한 것이다. 문서의 내용중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조사대상인 9백14명의 연대병력 가운데 6백63명 이 「의병에 다니던 자」라고 한 부분이다. 이 부대가 1921년에 구성됐음을 감안 하면 이는 혁명군이 독립운동 출신자들이 중심이 돼 구성된 부대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장교들을 대상으로 한 「고려혁명군 장교일람표」라는 문서는 혁명군의 성격을 더욱 뚜렷이 보여준다. 먼저 63명의 혁명군 장교 전원의 입대 전 반일(反日)운동 경력이 눈에 띈다. 혁명군 장교들의 첫 부류는 1907년부터 10년 사이에 의병전쟁 에 참가했던 사람들이다. 구한국 군대의 분대장을 지낸 조재건이라는 인물을 비 롯해 고명수·김병일·손웅진 등이 모두 1907년부터 10년 사이에 의병활동을 한 것으로 기술돼 있다. 두번째 유형은 1910년 서북간도 반일 무장투쟁 참가 경력자다. 여기에는 우리에 게 알려진 이름도 나타난다. 먼저 1919년 북간도에서 「무관학도 양성, 의병대 조 직」이란 경력으로 이청천(李靑天)의 이름이 나오고 「북간도 하마당 울도거우에 서 의병을 모집하야 1919년 7월 혁명에 참가하다」라고 표기된 최호림(崔虎林)도 등장한다. 채영(蔡英)에 대해서는 「1919년 북간도에서 의병조직」이라고 표기돼 있다. 장교들 중에는 3·1운동 당시 대중정치운동 참가경력자도 다수 있는데, 김명하 같은 이는 「모험대를 조직 반일 테러단체에 가담」이라는 항일경력이 기록돼 있 다. 혁명군 장교들을 군활동을 시작한 시기별로 볼 때 3·1운동 발발 이전 입대 자가 8명이다. 1919년 3·1운동 발발 후부터 그해 12월 사이에 입대한 사람이 15 명이다. 이들은 대부분 항일 조선인 무장부대 참가자들이다. 1920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표방하고 전국민의 호응을 호소한 시점에서부터 일본군이 간도로 독립군 토벌에 나선 같은 해 10월 사이에 입대한 사람은 30명으로, 이들은 모두 항일을 목표로 입대한 사람들이다. ......................... <<갈무리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