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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Ecomy (기억상실증�)
날 짜 (Date): 1996년06월27일(목) 14시58분34초 KDT
제 목(Title): 김은호





김은호
친일파로 전락한 어용화사(御用畵師)

·金殷鎬, 창씨명 鶴山殷鎬, 1892∼1979
·1937년 이후 '선전' 참여작가
  1941년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 평의원






[금차봉납도]를 미나미 총독에게 증정

김은호는 이 땅이 일제식민지로 전락한 직후 순종의 초상화를 두 차례 그
린 어용화가이다. 또 봉건 왕조의 마지막 어용화사(御用畵師)로 출발하여 
맨 먼저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
린 친일파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순종의 어진 제작 경력과 빼어난 인물묘
사 솜씨로 윤택영, 윤덕영*, 민병석* 등 친일 매판귀족이나 일본인 고관들
의 초상화 주문에 응하면서 화단의 총아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후원
에 힘입어 조선인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선전'(朝鮮美術展覽會)에 16회
(1937) 때부터  심사위원격인 '참여'작가로 발탁되었다. 선전은 식민지 문
화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가 1922년부터 주최한 관제 공모전이다.
1937년 11월에 그린 [금차봉납도]는 제작 시기로 보아 참여작가의 '영광'
에 대한 보답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 그림의 주제는 1937년 8월 20일 결성
된 '애국금차회'의 일화를 담은 것이다. 순종의 외척인 윤덕영의 처 김복완
(金福緩)이 회장으로, 이윤용·민병석 등 매판귀족의 처와 김활란* 등이 간
사로 참여한 애국금차회는 국방헌금 조달과 황군원호에 앞장 선 여성부인회
이다.
애국금차회는 결성식 때 즉석에서 금비녀 11개, 금반지와 금귀지개 각각 
2개, 은비녀 1개, 현금 889원 90전을 모아 일제의 '성전'(聖戰) 승리를 위
한 국방헌금으로 냈는데({매일신보}, 1937. 8. 21), 김은호는 이 '감격스러
운' 광경을 담은 [금차봉납도]를 미나미(南次郞) 총독에게 증정하였던 것이
다.({매일신보}, 1937. 11. 20)
왼편에 금비녀(金釵) 따위를 증정하는 회장 김복완과 한복차림의 부인들
을, 오른편에 그것을 받는 미나미 총독과 총독부 고위관료들을 정밀한 초상
화법으로 그린 이 [금차봉납도]는 김복완의 남편 윤덕영과 김은호의 친분 
관계 속에서 그들의 부탁으로 제작된 것이다.
특히 김은호의 초기 화단활동은 윤덕영의 후원에 힘입은 바 컸는데, 김은
호가 어용화사로 발탁되었을 때 윤덕영의 옷을 빌려 입고 궁중에 출입할 정
도였다. 윤덕영은 김은호가 어려웠던 청년시절 가장 큰 도움을 준 보호자 
겸 은인이었다.
김은호의 [금차봉납도]는 개인적 출세욕에 눈먼 미술인들의 친일화를 부
추기고 그 길로 인도하는 데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군국주의 경향성의 첫 
작품이고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에 대하여 김은호는 윤덕영과의 교분상 어
쩔 수 없이 그린 것이라고 하지만 당치 않는 변명에 불과하다. 김은호는 이 
작품을 계기로 친일활동을 본격화하였기 때문이다.
1930년대 만주침략(1931)에 이어 대동아전쟁을 선포(1939)하고 태평양전
쟁(1941)을 일으킨 일제가 경제수탈과 침략전쟁에 광분해 있는 가운데 그는 
조선인의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 창씨개명에 동조하고 군국주의에 야합한 
가장 '모범적'인 예술인이었다. 창씨개명에 적극 동조하여 그는 쓰루야마
(鶴山殷鎬)라고 성을 바꿀 정도였다. 전시에 후방에서 화가로서 일본'천황'
을 위해 '화필보국'(畵筆報國) 및 '회화봉공'(繪畵奉公)하고자 한 조선미술
가협회(1941년 결성)에 김은호는 이상범, 이영일, 이한복과 함께 일본화부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일본화부는 내선일체에 동조하여 동양화부의 이름
을 바꾼 것이었다.
조선미술가협회는 총독부 학무국장이 회장인 관변단체로서 조선에 와 있
던 일본인 화가들이 포함된 친일 미술인의 총력 협의체였는데, 1943년 1월 
다른 예술단체와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에 배치되어 국방기금마련을 
위한 전람회 개최 등 전시체제에 열렬히 협조하였다.
이어 김은호는 이상범과 함께 친일미술전람회의 총화격인 '반도총후미술
전'(半島銃後美術展)의 일본화부 심사위원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1942∼
44). '선전'보다 한술 더 떠 총독부 정보과가 후원한 총후미술전은 조선인
에게 일제 군국주의 찬양과 황국신민화의 '영광'을 고무시키기 위한 공모전 
형태의 전람회였다. 그와 함께 김은호는 '조선남화연맹전'(1940. 10), '애
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전람회'(1943. 1), 총독부와 {아사히신문}이 후원
한 '일만화(日滿華)연합 남종화전람회'(1943. 7) 등 '성전' 승리를 위한 국
방기금 마련전에 열심이었다.

파벌조성과 왜색풍을 물들이는 데 앞장 서

김은호는 친일활동의 명성에 걸맞게 한국 근현대 채색화에 왜색풍을 수용
하여 유포시켰고 제자 양성에도 적극적이었다. 친일파로서 김은호 개인의 
이력은 물론이려니와 폭 넓은 일본 채색화풍 수용과 제자 배출은 우리 현대
회화의 정상적인 발전에 큰 장애물이 되었고, 아직까지도 극복되지 못한 식
민잔재로 남아 있는 형편이다.
김은호는 인천의 부농 집안 출신으로 구한말 인천관립일어학교(1906∼07)
를 다녔다. 일본 물결이 유입되는 세상의 변화를 그 누구보다 빨리 읽은 것
이다. 집안이 몰락하자 인흥(仁興)학교 측량과를 마쳤고(1908),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서울로 옮겼다. 그는 측량기사의 조수로 혹은 도장포와 인쇄
소 등을 전전하다가 영풍서관에서 고서를 베끼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곳에서 김은호는 어려서부터 보여온 그림에 대한 능력과 남다른 손재
주를 인정받아 이왕가가 후원하는 근대적 화가 양성기관인 '서화미술회'에 
제2기생으로 편입하였고, 화과(畵科)와 서과(書科) 과정을 마쳤다(1912∼
17). 그의 입학은 영풍서관에서 만난 서예가 현채와 중추원 참의 김교성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안중식, 조석진, 정대유, 강진희, 김응원 등
에게서 전통서화를 익혔고, 안중식으로부터 '이당'(以堂)이라는 아호를 받
았다. '이'(以)는 주역의 24괘 중 첫 자를 딴 것으로 김은호는 그 아호처럼 
모든 면에서 으뜸이었다.
김은호는 서화미술회에 입학하자마자 빼어난 묘사 솜씨로 친일세도가인 
송병준*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순종 초상을 제작하는 어
용화사로 발탁되었다(1915, 1928). 초상화가로 유명해지자 당대의 상류층인 
친일 귀족, 자본가, 관료 등의 초상화를 맡게 되고, 그들과 교분이 두터워
지면서 부와 명성을 동시에 얻는다. 이 경력은 김은호가 친일파 화가로 전
락하는 서막인 셈이다.
서화미술회 졸업 후 김은호는 민족미술에의 의지를 표방하며 결성된 '조
선서화협회'(1918년 발족, 1921년에 첫 협회전 가짐)전에 참여하였고, 1919
년 3·1 운동 때에는 독립신문을 배포하다 체포되어 옥고까지 당한 적도 있
다. 그러나 이후 화가로서 그림에만 전념하는데, 특히 일본식 채색화 기교
에 치중하면서 그나마 지녔던 민족의식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던 듯하
다. 1922년 이후의 작품 경향과 '선전' 참여 활동이 그것을 잘 말해 준다.
1920년대 후반 대부호 김용문의 도움으로 다녀온 3년여의 일본 유학(1925
∼28)은 자신의 전통적 기법에 기초한 화풍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일본식 
채색화 기법을 정식으로 습득한 것이다. 그는 3년 동안 도쿄미술학교 일본
화과의 청강생으로 일본화과 교수인 유키 소메이(結城素明)에게 사사받았
다. 유키 소메이는 서양화의 사생기법과 접목시켜 자연사생 중심의 새로운 
일본 풍경화풍을 일으킨 화가이다. 김은호가 귀국하여 제7회 '선전'(1928)
에 출품한 [늦은 봄의 아침](暮春の朝) 이후 섬세한 채색화에는 그의 영향
이 뚜렷이 나타난다.
사실 김은호는 인물화나 화조화에서 그 이전부터 이미 장식적인 일본 채
색화풍에 물들어 있었다. 선전에 입상하기 위해서는 일본인 심사위원의 구
미에 맞는 형식을 구사해야 했기 때문인데, 김은호는 1회 '선전'에 [미인승
무]로 4등상, 3회 때 [부활 후]로 3등상, 7회 때 [북경소견]으로 특선을 수
상하였다. 도쿄에 머물면서 일본의 권위 있는 공모전인 '제전'(제국미술원
전람회)의 일본화부에 입선하기도 하였고 '동양회화전'에서는 [단풍]으로 1
등상을 받았다(1928). 이들은 대부분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새로운 감각의 
채색화풍을 따른 것이다.
그런데 제8회 '선전'(1929) 때 출품작이 입선에 그치자 출품을 중단하였
고, 한때 발길을 끊었던 서화협회전에 다시 참여하였다. 이 행동은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철새 같은 미술인의 전형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 이후
는 허백련과 2인전을 갖거나 김용문의 도움으로 중국여행을 통하여 견문을 
넓혔고, 특히 후진양성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다가 8년 만인 제16회 '선전'
(1937) 때부터 '참여'작가로 선정되는데, 바로 그 해 가을 앞서 설명한 [금
차봉납도]를 그린 것이다.
이처럼 김은호는 자신의 출세욕에 따라 왕성한 활동을 통하여 화단의 자
리를 굳혔다. 그러니 주변에는 자연히 많은 사회 저명인사 애호가와 화가 
지망생들이 모이게 되었다. 김은호 자신도 후배양성에 관심이 많았고, 한편 
'인정미 넘치는 예술가'(이규일, 1992)로 지칭되듯이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던 것 같다.
1920년대 후반부터 그의 화실 낙청헌(絡靑軒)에 몰려든 사람들과 함께 
'이묵회'(以墨會)라는 서화연구회를 꾸렸고, 이들 중 백윤문, 김기창*, 장
우성, 조중현, 이유태 등은 따로이 '후소회'(後素會)를 결성하여 1936년부
터 정기전을 갖기 시작하였다. 또한 1937년에는 박광진, 김복진과 함께 체
계적인 미술교육기관으로 '조선미술원'을 개설하였으나 시도로 그쳤다.
'후소회'는 김은호의 장식적이고 정밀한 필치의 섬약한 일본식 채색화풍
을 전수한 모임으로서 일본 남화풍이 가미된 산수계열의 이상범 문하 '청전
화숙', 전통적 남종화풍을 고수한 허백련의 광주 '연진회'와 더불어 당시 
동양화 분야의 3대 후진양성 통로였다. 이러한 세 유형의 화가 모임 가운데 
특히 '후소회'의 활동이 가장 돋보여 해방 후 국전 운영과 화단까지 주도하
는 정치력을 갖게 된다. 여섯 번의 정기전(1936∼43) 외에도 후소회원들은 
'선전'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1934년부터 김은호가 지도한 백윤문, 한유동, 장운봉(장덕), 김기창, 장
우성 등이 입선과 특선을 차지하였고, 제21회 '선전'(1942) 때에는 동양화
부 입선작 60점 가운데 21점이 회원작품이었으며, 또 2점이 특선하여 세상
의 관심을 끈 바도 있다({매일신보}, 1942. 5). 뿐만 아니라 회원의 주축을 
이룬 백윤문, 김기창, 장우성, 이유태, 조중현 등은 최고상과 특선 등을 독
식하다시피 하였다.
그런 가운데 주변의 시샘과 방해공작도 있었던 모양이다. 김기창이 16회
부터 19회까지(1937∼40) 연속 4회 특선으로 김은호의 제자 중 첫 추천작가
로 선정되는데, 19회 특선 때의 일화가 그 한 사례이다. 심사중 특선후보 
작품 속에서 일인 심사위원이 김기창 작품을 치워 놓자 안면 있는 다른 심
사위원에게 간청하여 재심을 받게 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 심사위원이 김은
호의 제자사랑에 감복하여 무감사 특선으로 밀어 주었다고 하며, 김은호는 
답례로 자신이 아끼던 고려청자를 선물하였다고 한다. 청각장애자인 제자를 
생각하는 김은호의 '인정미'와 심사원 자격으로 '참여'한 정치력을 한껏 과
시한 것이다.
이 일화는 이후 화단에 친일파 화가의 대량배출, 인맥에 의한 파벌 조성
과 왜색조의 채색화풍을 풍미하게 한 요인이 되었음을 적절히 시사해 준다. 
이런 현상은 당대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기득권을 강화하며 해방 후 화단에
까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관변을 맴돌며 친일행각은 철저히 감춰지고

황국신민의 '영광'을 안고 열과 성을 다해 작품활동과 후진양성에 전념해 
온 김은호는 일제에 부역한 탓에 결국 해방 직후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
부'에서 이상범, 김기창, 김인승*, 심형구*, 김경승, 윤효중 등과 함께 제
외당했다. 그러나 김은호는 미군정 이후 친일파의 재기용 내지 득세에 편
승, '인정미'로 기른 제자들의 옹호 속에서 다시금 화단의 총수로 떠오르게 
된다. '미협'(대한미술협회)과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주도적 참여
를 시작으로 제자들과 함께 제도권 미술계의 가장 거대한 파벌로서 일제 강
점기에 이어 지속적으로 정치력을 키워 갔다.
해방 후에도 김은호는 여전히 정심한 필치와 채색의 인물화 분야의 일인
자였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 아래서 관변의 요청으로 많은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이순신, 정몽주, 신사임당, 논개, 성춘향, 안중근, 
서재필, 이승만 등은 물론 미국 대통령 윌슨,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주한
미국 대사 무초 등의 초상화는 화풍도 그러하려니와 일제 때 어용화사에서 
시작되어 관변에서 맴돌며 살아간 흔적의 좋은 사례들이다.
이에 힘입어 김은호는 군사정부 아래서 서울시 문화상, 5월 문예상 미술
부문 심사위원과 8·15 해방 17주년 기념 문화훈장(이상 1962), 3·1 문화
상 예술부문 본상(1965) 및 대한민국예술원회원(1966)과 예술원상(1968), 
제11회 5·16 민족문화상 학예부문 본상(1976)을 받는 등 다른 친일인사와 
마찬가지로 친일화가로서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그에 못지 않게 김은호에 대한 인간적인 평가도 존경과 찬사로 일관된다. 
이은상은 팔순기념으로 김은호를 다음과 같이 읊조린 바 있다.

솔거 가신 뒤에 천오백 년 긴세월을
동방화단에 누구누구 해옵던고
화선을 만나려거든 이묵헌을 찾으시오
붓끝에 새가 울고 먹 뿌리면 꽃이 피고
산수인물이 조화 속에 나타나고
담소로 팔십평생에 늙을 줄을 모르네
빼어나 고운 모습 학수(鶴壽)를 사오리다
수정같이 맑으신 뜻 석수(石壽)를 사오리다
문생들 화통을 이어 백대장생 하오리다.(畵仙以堂頌, 1971. 8)

또한 김은호에 대한 기존 미술계의 회화사적 평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통의 맥을 시대적으로 되살린 근대적 채색화의 개척자'로 '근대·현대 
한국화단에 새로운 채색화 계파를 형성시킨 유일한 존재'(이구열, 1990)라
거나 '극채세화(極彩細畵)의 화풍을 고수하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제자를 기
른 인정미 넘치는 예술가'(이규일, 1992)로 논평되고 있다. 그의 친일 협조
에 따른 반민족 행위와 왜색조에 물든 회화세계에 대하여는 '아쉽다'라거나 
'어쩔 수 없었던 일'로 치부하면서, 그가 이룬 사실주의나 제자 육성의 공
적에 비하면 크게 개의할 일이 아닌 것으로 넘어가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왜색풍은 마치 '엔가'풍의 트롯트 뽕짝이 '전통가요'로 
둔갑한 현실정서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 현대화단의 숙제로 남
아 있는 일제잔재 청산은 여전히 김은호에 대한 바르고 엄정한 재평가로부
터 시작될 것이다.
             ■ 이태호(전남대 교수·미술사,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주요 참고문헌
김은호, {書畵百年}, 中央日報社, 1977.
이구열, [畵壇一境一以堂先生의 생애와 예술], 1968.
한국근대미술연구소 편, 화집 {이당 김은호}, 국제문화사, 1978.
화집 {이당 김은호}, 예경산업사, 1989.
{한국근대회화선집} 한국화 3권 '김은호', 금성출판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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