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Ecomy (기억상실증�) 날 짜 (Date): 1996년06월26일(수) 22시30분11초 KDT 제 목(Title): 박영철 박영철 다채로운 이력의 전천후 친일화 |朴榮喆, 1879\\1939 |1926년 함경북도 지사 1930년 조선 상업은행 부두취 1930년 중추원 참의 3|1 운동 당시 함북 참여관으로써 @만세망동론#에 동참 3|1 만세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3월 이완용*과 민원식*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만세망동론#(萬歲妄動論)을 실어 세인으로부터 비난의 표적 이 되고 있을 때 그 대열에 동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한 출세주의자는 {매일신보}에 실린 ~이번 소요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조선인이 맨손으로써 독립만세를 부른들 무슨 효과가 있으리오. 이와 같이 성산(成算)이 없는 운동은 무모요, 생명|재산은 손상하고 장래 악영 향을 입을 뿐이라. 또한 한걸음 나아가서 설사 일본이 독립을 승인한다 할지라도 금일의 재정, 병력, 기술, 기타에 한 나라를 지탱해 갈 능력이 있는가. 구한국 악정의 상태로 돌아갈 뿐 아니라 러시아의 현상과 같은 비참한 지경에 빠질 뿐이니, 그 이해(利害)를 분별치 못하는 이번의 소요 는 그 의미를 해석하기에 곤란|고심하는 바이라. 독립만세는 무용(無用)하고 무모하다면서 이를 탓하고, 더 나아가서는 $ 독립은 구한국의 악정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라고 주장한 이 글의 필자는 당시 함경북도 참여관으로 있던 박영철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만약 신정 (新政)에 불평이 있다 하면 지방청이든지 도|부|군 참사든지 중추원이든지 상당한 기관이 있으므로 순서를 거쳐서 진정할 것이요, 반항적으로 소요를 일으키면 법률이 허(許)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 인민의 위협이라 고 굽히고 굴복하여 그 희망을 허용할 이유가 없다&고 하여, 불평이 있으면 진정의 방법을 택할 일이지 소요를 일으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꾸짖고 있었 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금후에 만약 소요를 다시 일으켜서 양 민을 협박하거나 영업을 방해하거나 관헌을 습격하는 자에게는 용서 없이 병력을 쓰기로 병대(兵隊)가 각처에 수비하여 있은즉, 생명이 위기일발의 사이에 있음을 각오하여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될지라&라고 하여, 같은 민 족에게 협박을 가하고 있었다. 친일무관으로서의 출세가도와 배정자와의 스캔들 위와 같은 만세망동론을 쓴 박영철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1879년 전주에 서 미곡상을 하는 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미 곡상은 개항 이후 일본으로의 미곡수출에 따른 호경기에 힘입어 계속 번창 하여 한말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토지를 사모아 지주계급으로 일어설 수 있 었으며, 1920년대에 가서는 만석꾼으로 불릴 정도에 이르렀다. 이런 집안에 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한학을 배웠으나 1899년 그의 나이 22세 때 전주에 일본인들이 세운 삼남학당(三南學堂)에 들어가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일생의 방향전환의 계기를 맞이하였다. 1899년부터 그것도 지방에서, 일본 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대단히 빠른 것이었다. 그는 여기서 만난 일본인 들의 권유를 받고 1900년에 가족 몰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일본에는 갑오개혁 이후 망명한 상당수의 개화파 인사들과 갑오개혁 당시 일본으로 파견된 상당수의 국비유학생들이 있었다. 박영철은 1902년 12월 재주 좋게 일본 육사에 15기로 입교하여 국비유학생이 되었다. 당시 일본 육사 15기에는 김기원, 김용선, 남기창, 이갑, 유동열, 박두영, 전영 헌 그리고 박영철 등 8명이 있었다. 그들은 이듬해 12월 졸업하여 도쿄근위 사단에 배속되어 견습사관 생활을 하던 도중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부 대를 따라 종군하게 되었다. 근위사단이 조선을 통과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정부로부터 원수부 관전장교(元帥府 關戰將校)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전선 이 만주로 확대|이동하자 각 전선을 자유로이 시찰할 수 있었다. 이들이 전선시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자 그들에게는 출세의 길이 대로 처럼 열렸다. 이는 물론 엄청난 힘으로 밀어닥치고 있던 일본세력의 비호로 제공된 것이었다. 더욱이 당시 근위사단장이던 하세가와(長谷川好道)가 대 장으로 진급하여 조선주둔군 사령관으로 부임해옴으로써 그들의 지위는 더 욱 확고해졌다. 사관양성소인 무관학교 교관으로 보직받은 이후 육군기병 정위, 육군 기병 참령, 경성위수참모관 등을 지냈다. 그런데 군대 해산 당 시 그는 시위혼성여단장 참모관 참령의 자리에 있었는데, 시위대 1연대 1대 대장 박성환이 자결하고 많은 장병들이 일제와의 항전에 나서고 있었지만 그는 군대 해산 조치를 순응하여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 해 10월 시종무관(侍從武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뒤에 설명할 배정자 스캔들로 12 월에는 그 자리에서 밀려났다가 이듬해 6월 통감부로부터 헌병대 근무를 명 령받고 여기에서 1912년까지 근무하게 된다. 그리고 1912년 8월에는 일제로 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받았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그의 동기생 이 갑과 유동열이 신민회와 관계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펴고, 1910년 이후에는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전선에 뛰어들었던 것과 잘 대비되는 것이다. 이 시기 그의 행적과 관련하여 또 하나 기록해 둘 것은 배정자(裵貞子)와 의 동거이다. 그는 러일전쟁에서 귀환한 직후 현영운(玄映運)과 그의 첩 배 정자를 알게 되었다. 다 알듯이 배정자는 어려서 일본에 건너가 일본말을 배우고 조선에 돌아와 이토(伊藤博文)의 양녀를 자처하면서 조선 왕실의 신 임을 얻어 궁궐을 출입하게 된 것을 이용하여 남편 현영운을 군부협판, 군 수부 참모국장의 자리까지 일약 출세를 시켰던 한말의 요녀(夭女)였다. 그 러나 그들의 관계는 현영운이 실각하면서 파탄이 나고 말았다. 이에 평소 배정자에 관심을 갖고 있던 박영철은 그에게 접근하여 마침내 배정자를 자 기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물론 이때 그의 고향에는 본처가 있었다. 그런데 이 일은 곧 당시 정계에 파문을 일으켜 박영철은 시종무관 자리를 두 달 만 에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배정자와의 동거는 5년 간 계속되었는데, 훗 날 그는 {50년의 회고}에서 이 일로 인해 세간에 조소거리가 되었던 일은 일생 잊을 수 없는 일대 통한사(痛恨事)라고 썼다. 한편 이 자서전 {50년의 회고}에서 쓰고 있는 이토에 대한 그의 평가는 이 시기 그의 현실인식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그는 이토를 $근대에 드물게 보는 대정치가로서<>어디까지나 성심성의껏 한국을 보호|지도하고, 한국의 개발과 한인의 복지를 증진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밖으로 열국의 신용을 안고 안으로 일선(日鮮)의 공영을 기도하였다&고 쓰고 있었다. 군인에서 관계|실업계로 이어진 친일 이력 박영철은 1912년 군인으로서는 더 이상 출세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는지 헌병대 사령관에게 군수 자리를 하나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의 소원은 성취 되어 마침내 1912년 9월 익산군수로 부임하였다. 이후 그는 1918년 함경북 도 참여관, 1920년 전라북도 참여관, 1924년 강원도지사, 1926년 함경북도 지사 등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도지사라는 최고의 관직에까지 승승장구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출세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일제에 대한 충직한 충성, 그것이었다. 앞서 3|1 운동 당시 그가 쓴 @만세망동론# 에 나타나 있는 한국독립불능론, 그리고 당시 친일파들이 일반적으로 주장 하고 있던 실력양성론 등은 그의 출세지향주의를 잘 뒷받침해줄 수 있었다. 박영철 등 친일파들이 당시 주장하고 있던 실력양성론은 무엇인가. 박영 철은 앞의 ~이번 소요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신정(新政) 이래 생명|재정의 안전 또는 교육|민업(民業)의 발달은 구한국 정치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에는 누구든지 이의가 없을 줄로 생각하며, 내선인의 차별이 신정의 결점 이라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정도 문제로 선인(鮮人)의 정도가 향상될수록 대우도 향상하여 결국 내선인이 같은 정도가 되면 권리|의무에 자연 차별이 없을 것은 내지조야(內地朝野) 유식자의 희망하는 바이요, 신문|잡지의 기 사가 증명하는 바이다&라고 하여 조선인이 실력을 향상시키게 되면 일본과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아직은 한국이 독립 할 수 있는 힘이 없으니, 일본제국 내에서 일본인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며, 이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실력을 길 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우리 동포는 속히 학문을 닦고 돈을 저 축하고 인격을 높게 하여, 이로써 내선동체(內鮮同體)가 되어 세계에 설 것 을 간절히 희망하노라&라고 썼다. 1929년 조선인으로서는 최고의 관직에 올랐다고 판단한 그는 명예롭게(?) 관직을 은퇴하고 실업계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먼저 그의 친구 백인기(白 寅基)가 가지고 있다가 사퇴한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 자리를 탐내어 그 자 리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당시 그의 부친이 전주에서 경영하고 있 던 삼남은행의 경영을 넘겨받아 두취(頭取)로 취임하였으며, 1930년에는 삼 남은행을 조선상업은행과 합병하여 부두취(副頭取)에 취임하였다. 이러한 그의 경제활동에는 당연히 그의 관직경력이 큰 힘이 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 1만원의 국방헌금 내다 그는 1929년 관직에서 물러나자마자 이른바 동민회(同民會)라는 친일단체 의 부회장으로 취임하였는데, 이 동민회란 1924년 재류일본인과 신석민 등 친일파 조선인들이 일본과 조선의 정|재계 거물들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아 세아민족 결합을 기조로 하고 일선융화의 철저를 기한다&라는 강령 아래 만 든 친일단체였다. 박영철은 이러한 동민회의 부회장이 되어 그 해 5월 같은 친일단체인 국민협회, 대정친목회, 교육협성회, 갑자구락부, 척식성조선제 외동맹 등과 함께 $조선을 척식성에 속하게 하여 식민지와 동일한 취급을 하는 것은 병합의 정신에 반하는 것이므로 이를 절대 반대한다&는 결의를 하고, 이러한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도쿄로 건너가 일본 정부 요인 들에게 이를 호소하는 운동을 하고 다녔다. 그들의 주장은 조선은 식민지가 아니므로 남양군도와 같은 식민지처럼 척 식성에서 속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박영철, ~日鮮融化策 私見 ^).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이들이 실제로 당시의 조선을 일본의 식민 지가 아닌 @일본내지가 연장된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박영철 등의 행적을 보면 그들이 그런 착각을 충분히 가질 수도 있었으리라 는 짐작이 간다. 어쩌면 그들은 그러한 착각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박영철은 이 때 동경에서 쓴 ~내선융화책 사견^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 다. 양 민족의 현상을 보면 유감이지만 완전히 융화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 병합 후 20년이 되는 오늘 아직도 융화 의 실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금 @조선은 잘 되 고 있지만, 조선인은 잘 안 된다#는 유행어가 있음을 보는데, 이는 무엇 을 의미할까. 개중에 혹은 조선인의 무능무식을 책하여 융화할 수 없었던 책임을 돌리는 자도 있을 것이다. 물론 조선인의 나쁜 점도 한둘에 그치 지 않는다. 그러나 본래 조선인은 이렇게 무능하기 때문에 자립할 수 없 었고, 선진 이웃 일본인의 지도를 바라서 반만년의 전통적 문화를 가진 2 천만의 민중을 들어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일본 인은 조선인의 만족스럽지 못한 점을 책하기 전에 그 지도|개발의 책임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인의 형편이 좋지 않은 것은 조선인의 무능과 일본인의 지도|개발에 대한 무책임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박영철 등의 친일 파의 의식 속에 자기 민족에 대한 철저한 비하, 일본 민족에 대한 열등감과 선망, 일본 민족의 조선 민족 지도에 대한 기대, 그리고 일본 민족이 조선 민족에 대해 겉으로는 @일선융화#를 외치면서 철저한 차별을 하는 데 대한 원망 등이 얽혀 있음을 볼 수 있다. 박영철은 그 이후 미곡창고주식회사, 조선철도주식회사, 조선신탁주식회 사, 조선맥주주식회사의 취체역으로 활동했고, 상공회의소 특별의원, 산림 회, 사회사업협회, 방송협회의 이사로도 활동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는 중 추원 참의가 되었으며,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이후에는 임시교육심의위원, 부(府)저축장려위원, 물가위원회 위원, 시국대책조사위원 등으로 활동하였 다. 중국침략 직후인 1937년 8월 7일 박영철은 1만 원의 국방헌금을 냈다. 또 그는 문명기*가 선창한 비행기헌납운동에도 참여하여 1937년 9월 한상룡*, 김연수*, 김사연, 박흥식*, 원덕상, 이승우*, 조병상 등과 함께 @경기도 애 국기 헌납기성회#를 발기하고 모금운동을 폈다. 그러나 그는 태평양전쟁에 서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고 1939년 3월 10일 사망하 였다.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한 총독부는 그에게 욱일중수장(旭日中綏章)을 수여하였다. ■ 박찬승(목포대 사학과) 주요 참고문헌 박영철, {五十年の回顧}, 大阪房號書店, 1929. @ ~~ ~~ ~ ~~~ ~~~~ ~ ~ 바람과 함께 떠나는 __=||=__-__-__ ? _ %% _ ###_ | :^^^^^^^^^^^^: ~~ ~` 기 차 여 행 '~~ ~ ~ ~ /_/ \ / \ / \| :- -:--:--:--: ~~~ ~~\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