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dalma () 날 짜 (Date): 1996년06월08일(토) 20시40분16초 KDT 제 목(Title): [퍼온글] 이희승, 그 신화를 벗기자... 하이텔에서 퍼왔습니다. 큰마을 (PLAZA) 제목 : 이 희승, 그 신화를 벗기자 #13277/13291 보낸이:김영환 (kimyhmar) 06/08 17:27 조회:45 1/5 미리 말씀드릴 것은 이 희승의 친일이 일제 시대가 아니라 해방 후에 서울 대학을 중심으로 경성제대의 식민지 학풍이 그대로 전 달되었다는 것입니다. 사학에서 이 병도의 학풍은 비판이라도 받 는데, 박 종홍의 황도 철학도 해방과 동시에 끝났는데 유독 국 어학계에는 식민지 언어학풍의 전수자 이 희승만은 아직도 우상 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가 감옥에서 고문을 받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런 말이 가져올 파장 때문인지 누구도 책임있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비판이 없고 자기들이 다수인 점을 이용, 그들은 마피아처럼 뭉쳐 비판을 막으면서 그네들끼리 명예마저도 돌아가며 나눠 먹습니다. 최근의 것을 보면 93년에 이 기문(그는 이 희승의 수제자로 그의 학설은 기본적으로 식민사관에 지배되고 있음.)교수의 학술원상 수상(이에 대해 저는 공개 토론을 요구했습니다. 이 점은 <<교수 신문>>93.9.1 및 93. 9. 15 <<뉴스메이커>>93.10.14 참조), 94년 10월 이 숭녕에 대한 훈장, 94년 10월 문화의 인물로 이 희승 선정 등입니다. 이 기문 교수에 대해서는 비판이 북한과 일본에 서 오래 전부터 나오는데 국내에서는 그는 가장 훌륭한 학자로 통합니다. 93년 가을에 그에 대한 비판을 못이겨 그는 동경대 교 환 교수 명목으로 일본으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94년부터 부분적 으로 국내에서도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숭녕은 정년 퇴임 강연에서도 주 시경은 아무 것도 없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 닌 사람으로 그에 대해서는 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희승입니다. 그가 옥살이를 했기 때문에 민족주의자 로 통하고 4.19대, 그리고 유신 때, 곧은 소리를 한 적이 있습니 다. 대중이 그의 학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의 제자들은 서울 대 교수인데 그들이 이 희승이 훌륭하다면 훌륭한 것으로 알겠지 요. 정치 부분의 허상이 서울대 교수라는 통념 때문에 학문 세계 에도 성립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 것입니다. 창비에서 나온 그 의 회고록의 제목에도 <<달깍발이>>란 말이 들어 갑니다. 그 의 학문이라야 한자 혼용과 맞춤법 제정 참여입니다. 앞에 대해 서는 주로 일본과 한자 문화권 논리를 앞세워 말하고 있습니다. 앞뒤가 안 맞습니다.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감옥까지 갔다온 분 이 이 일본을 모델로 한자를 쓰자하고 맞춤법 제정에 참여하는 동기도 이른바 과학적 언어학을 추구하는 데서 니왔습니다. 이들 은 주 시경 학풍은 민족주의 이념에 빠져 비과학적이라는 것입니 다. 일본 백과 사전 <<광사원>>을 많이 베껴 <<국어사전>>이 라고 하고 토박이말은 많이 빠졌습니다. 지식인이 가장 꺼리는 것이 남의 글을 베끼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로 이 희승의 학문 세계가 어떠한지 알 수 있다고 봅니다. 논문을 도용한 교수는 지 금도 직장에서 쫑겨납니다. 이래 놓고는 한자 혼용의 구실로 삼 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말의 70퍼센트가 한자말이라고 우길 수밖 에 없습니다. 겉으로 알려진 한자혼용론자인 남 광우는 그의 하 수인일 뿐이죠. 그는 학자로서 내놓을 만한 저서 하나 없습니 다. 이 국어 사전도 동기가 몹시 불순합니다. 57년에 <<우리말 큰사전>>이 나와 큰 업적으로 평가받자 서둘러 만들어 61년에 초판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이런 말이 근거없는 중상 모략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92년 초에 한글 학회의 <<우리말 큰 사전>>이 나오자 그들은 통일을 대비한 사전을 만 든다며 북한과 공동으로 10년 계획으로 사전을 만들겠다고 했습 니다. 그러나 그 뒤에 발표대로 된 것은 없습니다. 계획 자체가 몇 번이나 오락가락합니다. 이 사전의 정치적인 동기에 대해서도 말이 많습니다. 이런 계획을 언론에 공표하면서 교호하게 여론을 조작한 어용 교수가 서울대 안 병희 교수입니다. 그느 이 희승을 시월 문화 인물로 추천한 장본인으로 왜곡과 조작을 일삼아 이 희승을 겨레의 스승으로 미화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데에 비판 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언론도 없었습니다. 정치나 경제에 대해서 는 비판적인 기사를 쓰면서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히 인맥 과 학맥에 따라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이 희승의 생애, 그는 왜 평생을 주 시 경과 조선어 학회의 전통과 분투하였는가. 그가 젊었을 때 다니 던 경성제대의 영광을 위해서 그랬는가?. 그는 사실상의 친일 파입니다. 4.19와 유신 때 절조를 지킨 것이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결과로 보면 분명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동기를 따지면 그다지 반가울 게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 승만과 박 정희 정권이 한글 전용을 내세웠기 때문이라 봅니다. 왜 그리 눈이 삐둘어졌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때로서는 아주 절실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 는 전 두환과 노 태우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저항을 하지 않았 습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이 희승에 대한 친일 시비는 다음 자료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말>> 94년 10월호, 11월호, <<한겨레21>>94.10. 20<<월간조 선>>94,12월호. <<길>>95. 1<<한글 새소식>>95. 1월호, 2월호 호 <<퍼오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