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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Monami (쿠키몬수타()
날 짜 (Date): 1996년05월25일(토) 10시05분11초 KDT
제 목(Title): 이완용평전 (8)








7. 이완용에 대한 평가

반민족행위자로서 이완용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제국주의의 식

민지침탈과정이란 시류를 타고자 한  타락한 범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變節術패턴에서의  한계점으로 완전한 친일파로 둔갑을  시도하

는데, 예를 들면 소위 한일합방  후 그는 內鮮一體를 제일 먼저 다음

과 같이 주장하기도 했다.

日鮮 융화를 위하여는  먼저 우리나라의 황족과 일본의 황족 사이에  결

혼을 하여 자녀를 낳게 하는 동시에 일반 백성들도 역시  서로 결혼하여 

자녀를 낳게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두 곳 인민이 풍기는 자연히 혼

합되어 일인을 공격하면 鮮人이 보호하고 선인을 공격하면 일인이  이를 

도와서 서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인정상 자연적인 관계인 것이다. 또

한 이로 인하여 국민의 不逞 감정은 不知不覺間에 해소될 것이다.

그의 반민족행위는 단순한 실수의  차원에서 결코 다루어질 수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그의 이익추구를 위한 행각은 그의 인생관 그 자체

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이완용의 처세술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완

용의 생전에 그의 생질인 金明秀에게 처세술을 이야기한 바가 있다.

나는 처음 25세에 文科에 급제하였다.  그 때는 미국과의 교제가 요긴하

였기 때문에 그  당시 신설되었던 육영공원에 들어가 거기서 영어  공부

를 하고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후  을미년에 이르러 아관파천 

사건으로 해서 나는 親露派로 일컬어졌다. 그후 日露戰爭이 끝나자 나는 

다시 전환하여 친일파의 칭호를 얻었다.

무릇 天道에는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變易이라 한다. 또  人事에는 

동.서.남.북이 있어서  이것도 역시 변역이라고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이 없다고 하면 이것은 實理를 잃어 끝내는 성취할  바가 없을 

것이다. 지금 또 시세가 돌변하면 모름지기 이 기회를 타서 인사의 適宜

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일본에 붙어서  살던 그는 또한 기득권의  보장을 위해 끝임이  없는 

반민족행위를 확대재생산하였으며, 일본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고 공

을 세우려하는 데에서 더욱 그는 하나의 죄인으로 낙인이 찍히게 된

다. 이하의 내용은 이완용이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총독이었던 長

谷川好道大將이 경질되고  齋藤實총독이 부임한 후 이완용이  齋藤총

독 앞으로 보낸 '內鮮人融和問題具申書'의 요약된 내용이다.

첫째로 內鮮人融和問題로서 미국인이  조선에 오래 거주하게 되면  조선

의 습속에 오염이 되어 약하게  된다고들 하며, 여기에 대해서는 일본인

들도 미국인과 똑같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내

심으로는 한국인들을 개나 돼지같이 생각하더라도 외면으로는  친절하게 

대한다. 반면에 일본인은 미국인들과는 달리 조선인에 대한 멸시를 직접

적으로 나타내고 만다. 그러므로 조선인이 排日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

이 조선인을 무시하는 언동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는 진정한 內鮮人의 양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일본인에 대한 조처에 관여할 바는 아니나  조선의 

장래에 영향이 미칠 것을 우려하여  말을 하겠다. 일본은 한국을 병합한 

1910년부터 1920년까지 활동했던  종래의 일본인 관리들을 모두  경질하

였는데, 조선인들은 이를 일본인 관리들에 대하여 論功行賞하여 줄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바이다. 이는 그 관리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함으로써 조선 자체가 혜택을 입기 때문이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오

랫동안 조선에서  근무한 관리들은 특별히  세력을 소유한 자  이외에는 

거의 免官이 되어 귀국한 후 특별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한

다.

이유는 조선에서 오래 근무하는 동안에 악습이 오염된 때문이라는  것이

다. 현재 총독부 간부들 중에는 조선에 온 것을 후회하고 기회만 있으면 

일본에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일들이 조선인의 

귀에 들어간다면 아무도 좋아할 사람이 없을 것이고, 또한 일본 내의 관

민들도 조선을 악습이 오염되는 곳으로 인정하여 조선에 오기를  싫어할 

것이다.

'融和' 二字를 國是로 하여 조선인을 一視同人으로 한다는 말을 조선 臣

民들이 비로소 깨닫고 감개무량해 하는 차제에 일본인들이 조선을  악습

의 오염 지대라고 단정하는 생각들은  반드시 고쳐져야 할 것이다. 이렇

게 하는 것만이 장차 조선통치에 큰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이며, 그렇

지 못하게 된다면 內鮮融和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본다.

반민족행위의 확대재생산은  그로 하여금  끝임 없는 부를  축적하고 

또한 정치적 영향력을  보장해 주었다. 특히 3.1운동 후 사이토가  총

독으로 부임하고  문화통치가 이루어지면서 조선 귀족들의  이용가치

가 더욱  감소되어 조선의 귀족은 점점  푸대접을 받게 되는  상황을 

맞게 되며 또한  총독부 당국은 이들 조선 귀족에 대해서  "총독정치

에 거추장스런 존재이며  기대한 만큼 조선통치에 도움도  안되었다"

고 평가하면서 "앞으로 적당한 때 귀족을 정리해서  작위를 돌려바치

게 하고 빼앗기도 해서 새로 공로 있는 자에게 준다"는  방침까지 세

웠었지만 이완용은 이러한 일반적인 조선 귀족의 몰락에는 예외적으

로 송병준과 박영효  등과 같이 총독과 많은  면회 기회를 가졌으며, 

조선 통치에 대한 조언과 같이 이권에 대한 청탁을 계속했다. 또 '문

화정치'와 새로운 친일파 양성정책에 편승하여 새로운 형태로서 친일

활동을 하게 되는데, 특히 대체로 실력양성을 주장하던 민족개량주의

자들과 그 내용이  유사한 점은 특이한 점이다.  이러한 그의 친일에 

대한 적응 노력에 대한  성공여부는 다음 사실에서 알 수 있을  것이

다. 그가 죽었을  때에는, 유해가 일본식 마차로 발인이 되어서  용산

의 영결식장으로 옮겨졌고, 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영결식을 거행

할 수 있게 한다. 또한  특별열차에 실려서 그가 전북 관찰사 시절에 

점지해 두었던 장지인  전북 익산군 낭산면 선인봉의 묘지에  묻혔으

며 그가 사망한 다음날 정2위에 추서되고 대훈위 국화대수장이 수여

되었으며, 사이토 총독은 '국가의 대손실'이라고까지 말했다. 또한  장

례식장에는 고위급  인사들이 참가했고 그의 관뚜껏에는  총리대신이 

아닌 중추원 부의장이라고 썼고 장례식도 조선과 일본식을 절충해서 

시행했다. 그는 죽어서도 자신의 묘자리를 확보하는데 성공한 완전한 

이기주의자이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

나'를 싣고,  조선일보는 시평으로 '이완용병사'를  그리고 '이후작 輓

歌'를 실어서 그의 죽음을 비꼬았다. 결국 일본에게는 이용가치가  인

정되었지만, 자신의 민족에게는 영원히 버림받는 결과로 자기 인생의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이완용의  성장 과정과 그의 대표적인 반민족  행위

들을 살펴보았다. 어릴 적에 유학을 공부한 그는 비록 한미한 집안출

신이었지만, 그의 재능으로 인해서 양자로 입양되고 육영공원에서 근

대적인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그 후 외국  생활 속에서 반민족적인 

성향을 점차 띠게 되었다.  그리고 제국주의의 침략이 좀더 구체적이

고 본격적이 되자  그 시류에 따라 적극적으로  이익 추구에 힘썼다. 

그리고 그 종착점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회적으로 활동하는  친

일적인 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씻을 수 없는 오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완용과 같은 반민족행위자

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한일합방'을 전후로 친일을 중심으로 한  일

부 시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가, 근래에 그들의  이후 행적에 대한 

본격적이고 폭넓은 연구가 활성화되었는데,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면 이러한 연구가 비로소  본격화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이완

용과 그 밖에  친일파를 중심으로 하는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처분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직 그 연구의 성

과가 충분하게 나타날 수 없으며 결국 한계에 이른다는 것은 사실이

다. 앞으로 좀더 본격적인  연구와 여론화를 통해서 반민족행위자 처

벌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법안과 그 실행을 확보하는 것이 필

요하다고 보며 이러한 기반과 우리의 결단에 의해서 바로 민족 정통

성 마련의 기틀확립으로  역사의 교훈을 바탕으로 한 발전의  기틀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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