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Ecomy (#기차여행#() 날 짜 (Date): 1996년05월25일(토) 02시30분35초 KDT 제 목(Title): [퍼온글] 김활란 1899-1970 [ Ewha ] in KIDS 글 쓴 이(By): doni (+ 도 니 +) 날 짜 (Date): 1996년05월25일(토) 02시21분48초 KDT 제 목(Title): [옮긴글] 김활란. 1899 - 1970. 부제: 여성교육과 지위향상에 앞장선 여성지도자 약력: 인천 출생 1931년 콜럼비아대. 철학박사. 1939-1945년 이화여전 교장 1945-1961년 이화여대 총장 1948년 UN 한국대표 1951-1953년 전시국민홍보외교동맹 위원장 1965-1970년 대한민국 순회대사 1966년 UN 한국수석대표 무테안경에 짧게 커트한 머리, 한복입은 맵시에서조차 서구적인 멋스러움이 느껴지던 우월 김활란. 그는 구한말에 태어나 역사의 격동기를 살았던 한국최고의 여성지도자였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기득 이며, 활란은 세례명인 헬렌의 한자표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는 인천에서 아버지 김진윤, 어머니 박또라의 3남 5녀중 일곱째로 출생하였다. 일찍이 기독교에 귀의한 진취적 기질을 가진 어머니의 인도로 온 가족이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으며, 당시 개화의 물결을 타고 변화해가던 사회를 개방적인 시각 으로 바라보는 가정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그 시절 여자로서는 드물게 이화학당에 진학하여 근대교육의 기회 를 누릴 수 있었다. 총명한 두뇌와 슬기로운 지도력으로 학당 선교사들의 사랑과 신망이 두터웠던 그는 중등과와 대학과를 거쳐 도미유학의 길을 떠났고, 1931년 콜럼비아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결실을 보았다. 그가 학업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와 모교의 강단에 섰던 30년대 한국사회는 남자들 조차 본격적인 학문수련을 쌓은 학자가 드물던 시절이었다. 그러한 때에 한국 최초의 여성박사학위 취득자인 김활란의 존재는 사회적 주목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학위논문의 주제는 [한국부흥을 위한 농촌교육]이었다. 그의 주장은 국권회복을 위한 최상의 수단은 국민교육이며, 이를 위해 전국 방방곡곡 어디든 한 마을 한 학교갖기 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요지였다. 이러한 그의 투철한 민족정신은 그 스스로를 일제 말기까지 일어를 말할줄 모르고 가르치지도 않는 교사가 되게 했다. 그리하여 1939년부터 그가 교장직을 맡아 책임지고 있던 이화여자전문학교는 끊임없이 일경의 감시를 받으며 폐교의 위협 속에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제약 때문에 행동의 자유가 억제되었던 김활란의 본격적인 활동기 는 1945년 8.15해방 이후부터라고 할 수있다. 일제시대에는 수차에 걸친 도미유학 으로 닦여진 유창한 영어구사나 서구식 민주교육사상이 오히려 탄압의 대상이 되었으나 해방은 이러한 그의 능력을 전폭적으로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김활란의 주된 활동의 장은 여성계, 교육계, 종교계였다. 그리고 그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사상적배경은 기독교신앙, 여성해방사상, 민족주의, 자유민주주의 등을 들수있다 첫째, 그의 사상형성 기저에는 확고한 기독교신앙이 자리하고 있다. 그의 신앙은 모태신앙으로 어려서 어머님 가슴에 안겨서도 `나의 자식 헬렌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의 뜻대로 쓰시는 그릇을 만들겠나이다.` 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가운데서 자랐다고 한다. 따라서 신앙은 일생동안 그의 삶의 초석이 되었으며, 어떤 사회활동도 기독교적 이념의 구현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있다. 둘째, 그는 이화학당 중등과 학생시절, 간절한 기도를 하는 가운데 `저 소리가 들리느냐. 저것은 한국여성의 아우성이다. 어째서 네가 저소리를 듣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느냐. 건져야 한다. 그것만이 너의 일이다.` 라는 인자한 음성과 함께 한국여성의 아우성을 들은 종교적 체험을 하였다고 한다. 그후로 소외되고 천대받아온 한국여성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된 그는 교육활동,여성 단체활동을 통해 이 사상을 구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경우 여성해방의 이론적 당위성은 차후의 문제였다고 보여진다. 셋째, 그는 이화학당에 들어간 초기시절인 1910년에 한국의 국권이 상실되는 뼈아픈 경험을 하였다. 이후 그는 조국광복의 날을 꿈꾸며 독립자금 모금활동에 참여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에 적극적이었다. 그의 논문 [덴마크인의 경제부흥론] 은 한 민족의 단결이 쓰러져가는 조국을 어떻게 부흥시켜갔는가를 연구한 것인데 그는 이러한 연구들을 통해 민족의 부흥을 구현하는 길을 모색하였다. 넷째,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다. 이는 일찍부터 미국 선교사들의 교육을 통해 전수되었으며, 미국 유학시절 직접 체험한 서구 민주주의의 장점을 그가 깊이 이해하고 터득한 데서 연유했다 하겠다. 그는 이화의 교사,학감,교장,총장 등의 학교직책을 수행하는 가운데 항상 민주주의적인 방법을 따르고자 했으며, 이화의 부속기관인 유치원,국민학교, 중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인간존중,개성존중 교복자율화등으로 상징되는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교육이념을 지향하였다. 위와 같은 사상적 경향은 상호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김활란의 사회활동을 뒷받침 하였다. 해방 직후, 그가 이화여자전문학교를 가장 먼저 대학교로 승격시켜 당국의 제 1호 인가서를 받게 된 것도 그 이면에는 기독교교육과 여성고등교육 기회 확대를 통한 여성해방을 지향한 결과하고 하겠다. 또한 그는 한국사회에서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여성지위 향상을 단기간 에 성취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흩어진 힘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일이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그의 YWCA 운동, 근우회 창설을 위시해서 여학사협회창립, 여성단체협의회 창설등 주로 여성단체의 연합체 구성에 진력하게 한 이유였다. 또한 그는 기독교전도 활동에도 주력하여 다락방전도협회 창설, 파키스탄등 해외 선교활동의 지원, 금란교회, 대신교회등 수많은 교회창건의 지원 등을 통하여 기독교계 부흥을 선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해방 직후, 미약한 국력을 신장하고자 그의 유창한 영어능력과 해박한 지식으로 유엔총회 한국대표, 대한민국 순회대사 등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오늘날 한국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이만큼 향상되고 여성고등교육의 기회가 이만큼 확대된 그 배후에는, 온몸으로 한국여성을 이끌어올리고자 진력했던 김활란의 헌신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1970년 2월 10일 그의 부음이 전해지자 정부는 사회장으로 예우했고, 장례식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국립교향악단의 주악과 이화여대 음대합창단의 [개선행진곡] 이 연주되는 가운데 거행되었다. 조사 대신 시인 모윤숙의 [임께 드리는 시]가 낭송될 때 참석자들은 죽음을 기쁘고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의 여정으로 승화시킨 김활란의 신앙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었다. ---------------------- 정 세화 <이화여대 교육학과 교수> ---------------- - <학계 언론계가 뽑은 광복50년 한국을 바꾼 100인> 중에서. 노가다 한 이유: 토론에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 P.S. 노가다는 힘들다! 나와 생각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미안해 내 목소리에 가리운 속삭임들까지도.....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이에게 고마워 내가 떠나보낸 나를 떠난 사람에게도..... Type <Return> Key. 뇨 @ ~~ ~~ ~ ~~~ ~~~~ ~ ~ 바람과 함께 떠나는 __=||=__-__-__ ? _ %% _ ###_ | :^^^^^^^^^^^^: ~~ ~` 기 차 여 행 '~~ ~ ~ ~ /_/ \ / \ / \| :- -:--:--:--: ~~~ ~~\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