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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이(By): Param (Param)
날 짜 (Date): 2007년 6월  7일 목요일 오후 12시 22분 21초
제 목(Title): 일진회, 한일합방청원서, 손병희 


한일 합방 청원서(통감에게 올리는 병합 청원)

통감 자작 소네 아라스케 각하  대한국 일진회장 이용구 등 1백만 회원은, 
대한국 2천만 민중을 대표하여, 황송히 머리 숙여 재배(再拜)하면서, 대일본 
천황 폐하를 대신하는 한국 통감 소네 아라스케 각하에게 삼가 글을 
바치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귀 대일본 천황 폐하께서는 천명을 받으시와, 지극하신 
위엄으로 여러 나라의 화합을 도모하시며, 동양 평화의 중심이 되셨습니다. 
경륜의 크심이 하늘과 같고, 황위가 해와 같으니 어찌 장하다 하지 않으리까. 
이제 각하께서는 나라 밖에 병권을 맡으시와, 덕을 팔방에 펴고 계십니다. 
문무의 교화와 덕택이 초목에까지 미치니 완고하고, 미욱한 백  성도 새로운 
생각을 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이용구 등이 또한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감히 2천만 민중을 대표하여 각하에게 호소하고, 간절한 소리가 천황의 귀에 
들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 나라 만세에 변함이 없을 튼튼한 터전을 오늘날 태평 
무사한 시간에 미리 세워 놓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가 지금껏 
국시를 정하지 않았다는 탓입니다. 지금껏 경국의 대본을 세우지 않은 
탓입니다. 그 국력은 항상 강한 이웃의 형세에 의존함으로써, 민생을 장구하게 
할 계책이 마침내 없었던 것입니다. 완고하게 약소만을 지키면서 스스로 시대 
조류에 맞지 않은 어리석음을 모릅니다. 이용구 등이 아아, 그 심정을 어찌 
말로써 다하리까. 

만일 귀국 천황 폐하의 지극하신 인덕에 의지함이 아니면, 우리 나라의 몰락과 
사직의 폐허는 멀지 않았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임금과 신하가 어찌 태양을 
오늘에 우러르며 문명을 장래에 바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귀국과 
이해가 이미 상통하여, 정교가  이미 상합하여, 이른바 일촵한의 관계는 좋은 
일 궂은 일에 일체를 이루고 있으매, 이 또한 하늘의 뜻이요, 전혀 인력이 아닌 
것입니다. 마땅히 이 때로써 그러한 관계를 양국의 청사에 비치고 … 

우리 나라의 허깨비 같은 국시와 구름 같은 국본을 깨쳐 뽑은 후, 우리 2천만 
백성과 함께 새로이 시작함으로써 …아아, 우리 나라 2천만 백성이 하늘 아래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근심하겠습니까. …이에 이용구 등은, 우리 대일본 
천황 폐하께옵서 지극하신 인덕과 하늘과 같은 넓으심으로 보위를 무한에 세워, 
일·한 합방을 창설하시고, 우리 군신을 만세에 어여삐 여기시와, 황실과 
신민이 종시일천, 길이 신성 무궁한 은혜를 입도록 하여 주심을, 황송히 머리 
숙여 감히 소원하나이다. …

바라는 바는 새로운 합방의 힘으로써 양으로는 동방 치안의 근기를 굳혀 동아의 
형세를 지탱하고, 음으로는 천리와 인도로 계양하여 세계 열국의 평화를 보임할 
뿐  입니다. …길이 모범을 선진 문명한 여러 나라에 널리 편다면 이 또한 
지극한 경사요,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이용구 등은 삼가 2천만 민중을 대표하여 
충심으로 이를 우러러 하늘에 호소하나이다. 


-
 
손병희 (孫秉熙) 
 
1861 충북 청원~1922. 종교가. 

천도교 지도자이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밀양. 
초명은 응구(應九)·규동(圭東). 호는 소소거사(笑笑居士), 도호(道號)는 
의암(義菴). 

동학입도 
아버지는 두흥(斗興)으로, 22세 때인 1882년(고종 19) 큰조카 천민(天民)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했다. 이필제(李弼濟)의 난에 연루되어 정부의 탄압을 받아 
산간지방을 전전하면서 포교활동을 전개하던 동학교문은 1880년대 들어 
손병희를 비롯하여 
손천민·김연국(金演局)·박인호(朴寅浩)·서인주(徐仁周)·황하일(黃河一)·김은경(金殷卿)·윤상오(尹相五) 
등 새로운 인물들이 입도하면서 교문(敎門)의 체제를 정비하고 교세를 
삼남지방으로 급속히 확대시켜나갈 수 있었다. 1894년 4월 남접(南接) 주도하에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최시형(崔時亨)·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북접세력은 
농민항쟁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이고 집강소를 통한 폐정개혁사업을 
저지하고자 했으며, 남접계열의 농민군세력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하고 
토벌에 나서고자 했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동학교문 전체에 대한 공격에 
직면하는 한편, 교도들의 집요한 요구가 계속되자 북접은 손병희의 주도 아래 
농민군에 합세했다. 

동학의 재건과 도통의 전수 
농민전쟁 이후 북접의 지도부는 지하에서 명맥을 유지하며 조직재건작업을 
시작했으며, 그는 1896년 1월 손천민·김연국과 함께 최시형으로부터 각각 
의암·송암(松菴)·구암(龜菴)이라는 도호를 받고 교단재건작업을 진행했다. 
그는 동생 병흠(秉欽)과 함께 이북지역의 개항장 부근이나 국경 근처의 
상업지역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를 비롯한 
손병흠·이용구(李容九) 등의 포교 결과 황해도·평안도에 새로 형성된 
포(包)·접(接)의 두령들이 늘어났으며, 이들은 1897년 4월 최시형에게 신 
접주로 정식임명장을 받았다. 손병희가 개척한 지역의 교도들이 증가하여 
그들로부터 거둔 미곡(米穀)이 중앙교단의 기본 활동 유지비의 재원을 
이루었으므로 최시형은 새로이 교세가 확장되어가고 있는 관서지역에서의 
포교활동을 중요시하고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했다. 1897년 북접대도주가 
되었으며 1898년 최시형이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자 동학교문을 통솔하게 
되었다. 1900년 풍기에서 거행된 설법식에서 스스로 북접의 
법대도주(法大道主)가 되어 김연국을 신도주(信道主), 손천민을 
성도주(誠道主), 박인호를 경도주(敬道主)로 삼고 교문의 종주(宗主)의 지위를 
확립했다. 

근대화론의 수용 
그는 동학교문의 체제를 새롭게 정비하여 교세를 확장시켜가면서 근대화론에 
입각하여 동학교문의 진로를 전환할 것을 모색하고 있었다.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이종일(李鍾一)과 자주 만나 시국문제와 동학운동의 방향에 대해 
의논했으며 여러 차례 동학에 입교할 것을 권유했다. 또 개화파 인사였던 
양한묵(梁漢默)·장효근(張孝根) 등을 동학에 가입시켜 교세의 확장을 도모하고 
이들로부터 개화사상을 수용했다. 1901년 손천민이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김연국 또한 체포되어 종신형에 처해지자 직제자(直弟子)들과 
상의하여 손병흠·이용구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 망명한 뒤에도 
국내의 동학교도들을 계속 통솔했으며 충청도 부호 이상헌(李祥憲)이라 
자칭하며 일본에 망명해 있던 
조희연(趙羲淵)·오세창(吳世昌)·권동진(權東鎭)·조희문(趙羲聞)·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파 관료들과 사귀면서 이들로부터 근대화론을 받아들였다. 그당시 
자신의 개혁론을 정리하여 〈삼전론 三戰論〉(1902)·〈명리전 
明理傳〉(1903)을 저술하고 이를 국내 동학교도들의 교양자료로 삼게 했다. 
그의 근대화론은 동학교문 북접의 사상적 기반이기도 했던 유교이념에 바탕을 
둔 것으로 식산흥업(植産興業), 즉 자본주의 발전을 통한 국부(國富)의 달성을 
가장 강조했다. 국부를 달성하기 위한 조건으로 근면과 절약을 제시하는 한편 
식산의 방법으로는 식산회사의 설립과 외국 유학을 통한 생산기술의 도입을 
제안했다. 아울러 서생(書生)을 유학시켜 서구의 학문과 기술을 익히게 하고 
이를 농공상업 발달의 기초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또 식산흥업의 발달과 함께 
정치체제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서양의 근대적 정치체제의 도입을 통해 
이를 실현하고자 했으며, 군주의 통치권을 전제로 하는 입헌정치를 구상했다. 

일본에서의 활동과 갑진개혁운동 
1903년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 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손병희는 
러일전쟁을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이를 계기로 일본군과 협동, 동학교도를 
동원하여 러시아 세력을 축출하는 한편 한국 정부를 개혁하고 정권을 장악할 
것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일본군 당국과 사전양해가 성립되어야 할 것이라고 
보고 권동진을 통해 일본군 참모총장 다무라[田村]를 만나 합의를 보고 
손병흠을 국내에 파견하여 교도들로 하여금 거사준비를 서두르게 했다. 그러나 
다무라가 1903년 8월 5일 갑자기 죽었으며 또 국내에 파견되었던 손병흠도 
일본으로 건너가는 도중 8월 3일 부산에서 원인 모르게 죽음으로써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내의 두령 40명을 불러 정치단체를 결사하여 
러일전쟁에 공동출병할 것을 지시했다. 서울로 돌아온 두령들은 
대동회(大同會)를 조직하고 비밀리에 도인을 모았으나 조선정부와 동학세력을 
배제하고 독자적으로 조선에 대한 패권을 장악하려는 일본 군대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때문에 같은 해 4월 박인호·홍병기(洪秉箕)를 일본에 불러 
7월중으로 다시 이름을 중립회(中立會)로 바꾸어 재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호남지역과 관서지역에서 중립회가 설립되었으며, 〈대한매일신보〉에 
100원의 격려금과 함께 자신의 내정개혁론에 대한 5개 조항을 실어 중립회의 
취지를 선전했으나 정부와 일본군의 탄압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해 
8월경부터는 그의 지도하에 갑진개혁운동(甲辰改革運動)이 시작되어 9월 하순 
전국 각지에서 동학교도들에 의해 진보회(進步會)가 결성되기 시작했다. 
진보회의 통고문이 각 지방에 배포되었으며 각 지역의 동학교도들이 모임을 
갖고 단발을 시행하고 흑의(黑衣 : 개화복)를 입기 시작했다. 또한 진보회를 
통해 군용철도인 경의선·경원선 철도부설에 동학교도들을 동원했다. 정부는 
이러한 동학교도들의 발기에 대응해 전국 지방관과 진위대에 이를 토벌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일본의 후원하에 있던 일진회(一進會)가 정부의 동학탄압 
지시를 강력하게 비판하자 그해 11월 1일 그동안 갇혀 있던 동학교도들을 
석방했다. 김연국을 비롯한 모든 동학교도들이 석방됨으로써, 동학은 40년간에 
걸친 지하포교를 청산하고 비로소 국가의 공인을 받게 되었다. 1904년 12월 2일 
동학이 일진회에 합동청원서를 각 도별로 제출하는 형식을 거쳐서 동학과 
일진회는 공식적으로 합동했다. 

천도교 창건과 일진회와의 분립 
그동안 동학을 탄압해오던 광무정권(光武政權)이 무력해지자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다. 1906년 1월 28일 일본에서 귀국하여, 2월 16일에는 
천도교 대헌(大憲)을 반포하고 스스로 천도교 대도주가 되어 조직을 정비하여 
서울에는 중앙총부를, 각 지방에는 교구를 설치했다. 교단 내에 
권동진·오세창·양한묵 등 망명 개화관료 출신들과 일진회를 이끌었던 
송병준(宋秉畯)·이용구 일파 및 김연국 일파가 서로 반목하게 되자 
정교분리(政敎分離)를 표방하고 일진회의 지방지회 해체를 지시했다. 이에 대해 
송병준·이용구는 천도교 결의서를 각 지방에 배포하여 자신들을 중심으로 
교도들을 결속시키고자 했다. 이를 직접적인 계기로 1906년 8월 23일 손병희가 
일진회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던 이용구 이하 62명을 
출교처분(黜敎處分)함으로써 천도교와 일진회는 분립하게 되었다. 1907년 8월 
대도주직을 김연국에게 이양하고 중앙총부의 간부를 개선했으나 김연국이 
시천교(侍天敎)에 가담하자 이듬해 1월 차도주(次道主) 박인호로 하여금 
대도주의 직을 승임(承任)하게 하고 자신은 성사(聖師)로 불리면서 활동했다. 

근대교육사업과 출판사업 
손병희는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천도교의 활동을 종교 중심으로 전개하면서도 
개화정책을 추진하여 근대교육을 실시하려 했다. 일본 망명중에도 동학교도의 
자제 64명을 일본에 유학시켜 근대적 교육을 받게 했으며 귀국 직후부터 더욱 
활발하게 교육사업을 추진하여 203개의 사립학교를 원조했다. 그러나 교회의 
재정이 어려워져 교육사업을 전개하기 힘들어지자 한동안은 교회의 유지에 
주력했다. 1910년 한일합병 직후부터 다시 교육사업을 추진하여 1910년 
재정난에 빠진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을 원조하고 같은 해 12월 
보성학원(普成學院)을 인수했으며, 1912년 12월에는 동덕여학교를 인수했다. 
그밖에 지방의 7, 8개교를 직접 관할했다. 한편 일본에서 귀국할 때 인쇄기와 
활자들을 구입해 가지고 들어와 
한영호(韓榮浩)·최석창(崔錫彰)·민건식(閔建植) 등과 협력하여 주식회사 
보문관(普文館)을 설립하고 출판사업을 했다. 그러나 한영호와의 분규로 
1910년초 새로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하고 당국과 교섭하여 종교적 논설과 교도 
상호간의 소식 등을 게재한다는 조건하에서 천도교 기관신문인 
〈천도교월보〉를 발행했다. 1910년말에는 보성학원 소속 인쇄소 보성사를 
창신사와 병합하여 보성사로 확대하고 〈천도교월보〉 및 학교 교과서 등을 
인쇄·간행했다. 

3·1운동 
1918년 1차대전이 종결되고 강화회의의 한 원칙으로 제기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국내외 인사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해외망명인사들과 
일본에 유학중인 한국 학생들의 움직임은 국내인사들에게 자극을 주어 
국내에서도 독립운동 방안을 강구하게 되었다. 손병희는 오세창·권동진 등과 
독립운동 방안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 최린(崔麟)과 협의를 계속하게 했다. 이들은 협의를 통해 운동의 방침으로 
독립운동을 대중화시킬 것과 일원화시킬 것, 비폭력으로 할 것 등 3개 원칙에 
합의했다. 독립운동의 첫번째 연대대상으로서 
박영효·한규설(韓圭卨)·윤치호(尹致昊) 등 구한국 관료와 친일파를 
포섭하고자 하여 손병희가 직접 박영효·이완용(李完用)과 교섭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기독교·불교·천도교가 합작을 추진하여 3·1운동을 준비했다. 
천도교 내부에서는 1910년대초부터 이종일이 천도교구국단을 조직하고 
민중봉기를 통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을 건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병희는 폭력적 민중시위의 경우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있을 것이며 또 서구 
문명국의 동정을 얻기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비폭력을 절대적인 전제로 하면서 
평화적인 만세시위 방침을 받아들이고 3·1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일본 경찰에 자진출두하여 검거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징역 3년형에 형집행정지를 언도받고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받던 중에 1922년 5월 19일 병세가 악화되어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고려대학의 사람들 2-손병희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발행, 1986 
위대한 한국인-의암손병희 : 이광순, 태극출판사, 1972 
한국근대인물백인선 : 박현서, 동아일보사, 1970 
의암손병희선생전기 : 의암손병희기념사업회 편·발행, 1967 
한국의 인간상 6 : 신구문화사, 편집부 편, 신구문화사, 1965 
동학사 : 오지영, 영창서관, 1940 
손병희의 정치사상에 대한 연구 〈논문집-사회과학편〉 22 : 정진오, 
제주대학교, 1986 
 

That old law about "an eye for an eye" leaves everybody blind. The time is 
always right to do the right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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