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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hopin (** 쇼팽 **)
날 짜 (Date): 2007년 2월 23일 금요일 오전 04시 55분 26초
제 목(Title): [펌] 대륙백제는 사실인가 - KBS 1 Radio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67편>

 '대륙 백제'는 사실인가 
 
방송 : 1.29(일) 00:05-01:00
 
<해설>  안녕하십니까. '역사를 찾아서'의 김연갑입니다. 
  지난 시간에 백제의 건국 주체가 누구냐, 하는 문제를 짚어보았는데요, 
당시의 문헌기록을 보더라도 워낙 여러 사람이 시조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단정해서 얘기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 왕실에서 용납 받지 
못해서 갈라져 나온 온조가 세웠다'는 내용을 차용하고 있는 현행 우리 국사 
교과서의 기술은 문제가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시죠. 
*인서트-1. 테입<76>  이도학
(10:25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이제 백제의 건국시조를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내려와서 나라를 세운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액면 그대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국사기만 보더라도 백제의 
건국설화가 두 가지 설화가 수록 이 돼 있습니다. 하나는 온조가 시조라고 하는 
설화가 있는 것이고 이것은 고구려 계통 입니다. 그러나 작은 글씨로 적어놓은 
또 다른 기록에 보면은 백제의 시조는 비류이고  비류는 북부여 계통의 인물로 
돼 있는 것입니다. 김부식의 경우도 이제 국내에 전승돼  내려온 두 가지 설화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 자기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어느 
쪽이 옳다, 라고 말을 못하고 같이 수록을 해놨던 것입니다. 11:11)
<해설>  뿐만 아니라 구태라는 인물이 옛 대방지역에 백제를 건국했다는 설이 
여러 문헌에서 확인되고 있을 뿐 아니라 도모왕이라는 인물이백제의 시조라는 
기록 역시 일본사서 등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쨌든 백제를 건국한 세력이 
고구려 계통이기보다는 부여계통이라는 데에는 학자들이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그런데, 기존에 알려져 내려온 백제의 건국과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만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어서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백제가 처음 건국됐던 
곳은 서울지역도 아니었고 인천지역도 아니었으며 만주대륙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대륙백제설이 그것인데요, 그 요지는 이렇습니다. 
낭독자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세력이 백제를 세워서 만주지역에 있었는데,  그  
중 한 갈래가 떨어져 나와 1차 이동을 해서 지금의 서울지역에  정착, 마한 
54개 나라 가운데 하나인 백제국이 되었다. 만주에 계속  남아 있던 종가(宗家) 
격의 백제는 4세기 중반 무렵에 고구려와 모  용선비족과의 세력다툼에 밀린 
나머지,  결국 한반도 쪽으로 이동해와서 먼저 내려와 있던 서울지역의 백제와 
통합하였다. 이 때 백제의 왕실세력이 나중에 내려온 종가 세력으로 
교체되었다. 
<해설>  방금 소개한 내용에서, 만주에서 먼저 내려와 서울지역에다 
백제국이라는 소국을 세운 세력을 온조세력이라 하고, 만주에 계속 남  아서 
부여나 연나라 등과 세력다툼을 벌이다 나중에 내려와 합류한 세력을 
비류세력이라 가정을 한다면 어느 정도 아귀가 맞아 들어가지 않습니까. 백제 
건국이 1차적으로 만주대륙에서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 대륙백제설은  
1988년도에 열렸던 학술대회에서 당시 30대 초반이던 이도학이라는 소장학자에 
의해 제기됐는 데, 이 학술논문은 학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논문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른바 대륙백제설을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당사자인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의 설명을 바탕으로 탐색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먼저 중국사서인 자치통감에 수록된 부여 관련 내용 중에서 서기 346년 
정월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할까요?
낭독자  처음에 부여는 녹산(鹿山)에 거처하였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  
락이 쇠산해져서 서쪽으로 연나라 근처로 옮겼으나 방비를 하지 않  았다.  
<해설>  부여가 처음 터를 잡은 곳으로 돼 있는 녹산은 만주의 송화강변에있는 
지역입니다. 부여가 백제의 침략을 받아서 서쪽 연나라 근처로 밀려났다는 
얘긴데, 부여를 공격해서 밀어붙인 이 백제가, 온조가 서울지역에 세웠던 그 
백제였을까요?  참고로 3세기 후반에 씌어진 삼국지 위서동이전의 마한 관련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죠.
낭독자  마한은 삼한 중에서 서쪽에 위치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은 산과 바  다 
사이에 흩어져 살았으며 성곽이 없었다. 마한의 여러 나라들을보면 
원양국(爰襄國), 모수국(牟水國), 유외국(柔外國), 소석색국(小  石索國, 
대석색국(大石索國), 백제국(伯濟國), 목지국(目支國)…
<해설>  이 사서에는 마한에 속한 54 개에 달하는 소국(小國)의 이름들이 
열거돼 있습니다. 이 54개 나라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는 
목지국이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온조가 서울지역에 세웠던 백제는 초기에는 
마한에 속하는 54개국 중 하나였을 만큼 아주 미약한 세  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나라가 만주지역까지 올라가서 부여  를 침략했다는 것이 가능한 
얘기일까요? 
학자1  아니, 당시 백제는 마한의 속국으로서 국력이 보잘 것 없었는데 어떻  
게 만주벌판까지 올라가서 부여를 침략하겠습니까? 말도 안 됩니다. 
학자2  그렇습니다. 국력도 국력이지만 서울지역에 있던 백제가 송화강변까  지 
올라가서 부여를 치려면 그 이동거리만도 엄청납니다. 더군다나  중간에 있는 
낙랑과 고구려를 거쳐 가야 되고…
학자1그렇다면 자치통감에 나오는 그 기록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학자2아, 그것은 고구려를 잘 못 쓴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고구려가 부여를 
침략했는데 엉뚱하게 백제가 침략한 것으로 잘 못 기록한 것이지요. 
<해설>  우리 학계에서는 자치통감에 나오는 백제 관련 기록을 고구려를 백제로 
잘 못 적은 것으로 치부했습니다. 왜냐면 한반도 중부의 서울지역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 백제가, 만주 한복판까지 올라가서 부여라는 큰 세력을 침공해서 
연나라 쪽으로 밀어붙였다는 사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인서트-2. 테입<76>  이도학
(1:00:35 아, 뜬금없이 백제의 존재가 만주지역에서 탁 나타나고 있다는 거죠. 
뭐, 잘못 된 기록인 것 같다, 그래서 이제 일제 관학자들 이래로 많은 학자들이 
이 백제는 고  구려의 잘못이다, 고구려가 부여를 격파한 것이지 어떻게 백제가 
돌출적으로 만주 땅에  그것도 한복판에 나타날 수 있겠느냐, 라고 보면서 
무시를 했던 거죠. 그것은 무시할사안이 아니고요, 진서 모용황제기에 보면은 
모용 선비족이 세운 전연의 군대하고 교전  을 벌여가지고 포로를 발생시킨 
4개의 나라가 나옵니다. 우문부, 단부, 고구려, 그리고  백제가 있어요. 
1:01:17)
<해설>  이도학 교수가 거론한 진서 모용황제기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할까요? 
연나라 봉유(封裕)라는 장수가 자기나라 국왕인 모용황에게 건의한 
상서(上書)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봉유 황제폐하, 고구려, 백제, 우문, 단부의 사람은 모두 병력을 옮겼는데  
중국의 의(義)를 사모해서 온 것 같지는 않으니 모두 돌아갈 생각이  마음에 
있사옵니다. 그렇잖아도 좁은 도성에 이들이 몰려들고 있어  서 장차 국가에 큰 
해가 될까 두렵사옵니다. 마땅히 그 형제 종족을  분할하여서 서쪽 경계의 여러 
성으로 옮겨 이들을 은총으로 위무하  고 법으로 단속하면 될 것이옵니다. 
<해설>  무슨 얘기냐 하면 연나라가 전쟁을 벌여서 고구려, 백제, 우문, 단부 
출신의 포로들을 잡아왔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서 도성 안에다 살게 할 수는 
없으니 변방으로 나눠서 배치하고 단속하자, 그런  내용입니다. 바꿔 말하면 
당시 백제가 대국이었던 연나라와 한바탕  전쟁을 치를 정도로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연나라와 전쟁을 벌였던 나라들 이름을 
열거하면서 고구려와 백제  를 나란히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나오는 
백제도 고구려를잘 못 기록한 것이다, 이렇게 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4세기 중반 무렵까지 서울지역에 온조가 세운 백제 말고, 만  주 
대륙에 또 하나의 백제가 존재했다고 봐야 설명이 가능한 문제  다, 이도학 
교수의 주장이 그렇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이 교수가 대륙 백제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한 또 하나의 문헌 
기록은 송나라 사서인 송서의 다음과 같은 부분입니다. 
낭독자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 밖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해설>  여기 나오는 요서 경략에 대한 내용은 다음 기회에 거론하기로 하지요. 
이 송서가 편찬된 시기는 기원후 488년입니다. 대륙백제설을받아들이기로 
한다면, 이 때는 이미 만주에 있던 백제세력이 남쪽으로 내려가서 서울지역에 
있던 온조백제 세력과 통합을 한 이후입니다. 그러니까 송서를 펴내는 488년 
당시에는 만주에 있던 백제가 남쪽으로 내려가고 없지만, 본래는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리쯤 되는 곳에 있었다, 이런 얘기가 되겠지요.
*인서트-3. 테입<76>  이도학
(1:02:04 '본래'라고 하는 기록이 나와요.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지금은 
그렇지 않  다는 거죠. 송서가 씌어진 488년의 시점에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 있다는 것을  중국 송서를 쓴 역사가는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본래 
원래는 고구려와 함께 요동 동  쪽 천여 리에 있었다, 만주 지역에 있었다는 
말하는 것이죠. 백제 세력이 이동해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인제 부차적으로 많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  겠습니다만 삼국사기에 
보면 백제의 주민 천여 호가 고구려로 망명한 기록이 또 있어요. 그것도 
기근으로 인해서요.1:02:43)
<해설>  백제 주민의 고구려 망명 얘기가 나왔는데, 그 대목을 들여다보기로 
할까요? 
신하1대왕마마, 천여 호(戶)에 달하는 백제의 백성들이 우리 고구려로  
넘어와서 받아줄 것을 애걸하고 있사옵니다. 어찌하면 좋겠사옵니까? 
대무신  음, 생활이 곤궁하여 살길을 찾아 넘어온 그들을 어찌 내칠 수 
있겠느냐. 더구나 백제는 다 같이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형제나라가 아니더냐. 
그들에게 양식을 주어 목숨을 부지하게 하고 땅을 나눠 주어 일구게 하라.
낭독자  대문신왕 2년 봄 정월에 도성에 지진이 있었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백제의 백성 천여 호가 와서 의탁하였다. 
<해설>  고구려 대무신왕 2년, 그러니까 서기로는 기원후 19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온조가 서울지역에 백제를 건국했던 때가 
기원전 18년이었기 때문에, 이때는 온조왕 37년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이 망명사건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볼까요? 
낭독자  온조왕 39년 봄 3월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달걀만하여 새들이  
맞아 죽기도 하였다. 여름 4월에 가뭄이 들었으나 6월에 비가 내렸다. 한수의 
동북 부락들에 기근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하여 가는 사람이 천여 호나 
되었으며…
<해설>  고구려 본기의 기록과 백제본기의 기록이 잘 맞아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도학교수는 이 기록에 나오는 백제가 서울지역에 있던 백제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척박한 만주벌판보다는한반도의 땅이 훨씬 
비옥한데, 기근이 들었으면 남쪽 어디로 가야지 머나먼 만주까지 올라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더군다나 서울지역에서 고구려까지 가려면 중간에 낙랑을 
거쳐야 하는데, 거기 가면 지상낙원이 펼쳐진다는 보장도 없는 터에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그 먼 길을 올라갔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런 얘깁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서울지역에 있던 온조백제의 주민들이 올라간 게아니라, 
만주에 있던 또 한 갈래의 백제, 즉 대륙백제의 주민들이인근나라인 고구려로 
망명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얘깁니다.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음악>  (브릿지)
 
<해설>  자, 그렇다면 만주지역에 있던 백제와 서울 지역에 있던 마한의 여라 
나라 중 하나였던 그 백제국은 어떻게 통합되었을까요? 
<효과>  (전쟁터-병장기 부딪치고 말들 달려다니는)
장수1  (말 타고 달려와서)대왕마마, 연나라 군사의 수가 너무 많아 우리 
백제군이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철수를 명하시옵소서! 
백제왕  흐음, 안 되겠다. 백제군은 말머리를 돌려 철수하라! 
장수1(북소리 울리며)철군하라! 모두 철군하라! 
낭독자  서기 343년쯤으로 짐작되는 시기에 만주에 있던 '대륙백제'는 연나라, 
즉 전연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게 된다. 더군다나 고구려의 압박도 심해져서 
더 이상 만주지역에서 나라를 유지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된다. 
백제왕  (에코)백성들은 들으라! 우리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먼저 내려간 
우리의 형제국과 힘을 합하여 강대한 나라를 만들 것이다. 가솔들과함께 길 
떠날 채비를 하라! 
<효과>  (우마차 굴러가고 사람들 이동하는)
<해설>  이렇게 해서 만주에 있던 비류계의 백성들이 서울지역에 먼저 내려와 
터를 잡고 있던 온조 세력과 통합하기 위해서 대규모 이동을 감행했을 것이다, 
그런 주장입니다. 그런데, 만주에서 한강유역으로내려오기 위해서는 고구려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했겠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계명대 
노중국 교수 역시 비슷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인서트-4. 테입<77>  노중국
(1:05:57 한강유역으로 내려오려고 하려면 어디로 와야 되느냐, 고구려를 거쳐 
와야 됩니다. 고구려를 거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강유역으로 내려오려면. 
과연 그런데 그게 상당한 규모의 전투력을 가진 세력들이 고구려를 과연 
무사통과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이런 점 하고요, 그 다음 또 하나는 대개 
어떤 나라든 지간에 고구려도 그렇고 신라도 그렇고 가야도 그렇고 첨에 인제 
작은 데서부터 시작해갖고 점차점차 커나가는 모습들, 이렇게 보입니다만 
백제도 그런 성장과정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죠. 1:06:48)
<해설>  그런데, 이도학 교수는, 그 당시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영토 혹은 
국경개념과는 많이 달랐기 비류계 백성들의 남쪽으로의 이동에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인서트-5. 테입<76>  이도학
(1:12:02 인구가 희소하다는 것을 전제해야 되고요. 그리고 국가규모의 대규모 
적어도  만 단위 이상의 움직임, 이것을 적어도 3세기 4세기 단계에서는 
통제하기 어려워요. 지나가도록 그냥 방치하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인 것이고, 
또 그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브레이크를 걸면서 싸워야 될 
이유가 없는 겁니다. 1:12:48)
<해설>  이도학 교수는 신라의 건국설화에 나오는 박씨, 석씨, 김씨 등이 모두 
북방에서 내려온 유민으로 설정돼 있는 점과 역사상 숱한 세력의 이동이 
있었지만 중간에 제동이 걸린 적이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자, 그렇다면 대륙에 있던 비류계의 백제 세력이 남쪽으로 이동해와서 
온조계 세력과 통합하여서 왕실세력의 교체가 이뤄졌을 것이라고 보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이도학 교수는 우선 삼국사기를 편찬했던 고려시대까지도 백제의 
건국시조가 두 명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인서트-6. 테입<76> 이도학
(1:14:10 백제 왕실이 교체됐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시조가 두 명이라는 거죠. 
온조하고  비류. 두 명의 시조가 있는데 어느 게 맞고 어느 게 틀리냐? 어느 게 
암까마귀고 어느  게 수까마귀냐, 이런 흑백논리로 따질 수 있는 게 아니고 다 
인정해야 돼요. 시조가 두  명이라는 걸. 이건 왕실이 교체됐다, 왕실의 시조가 
두 명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거죠.두 개의 왕실이 공존할 수 없는 거죠. 
왕실교체가 단행됐기 때문에 시조가 두 명이 된다. 1:14:45) 
<해설>  쉽게 얘기하자면 대륙에서 내려온 비류계 세력이 설화에서 
형으로나오고 있기 때문에, 한강유역에 자리잡고 있던 온조세력을 흡수하여 
주도권을 장악했을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이 교수는 대륙백제 세력이 내려와서 
온조백제를 흡수했던 시기를 근초고왕 때부터이거나 그 바로 직전왕인 비류왕 
무렵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효과>(말 타고 달려와 멈추고)
태자 대왕마마, 지금 고구려왕 사유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진을 치고 우리 백제의 민가를 약탈하고 있사옵니다. 
근초고오호, 그래? 태자는 듣거라. 군사를 내어줄 터이니 지금 즉시 치양으로 
달려가서 고구려군을 물리치도록 하라! 
태자 예, 대왕마마. 백제의 기병들은 나를 따르라! 
<효과>  (군사들, 말 타고 출정하는)
<해설>  근초고왕 24년, 서기로는 369년에 백제 태자가 거느린 군사가 출동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5천여 명이나 되는 포로를 사로잡아돌아옵니다. 그리고 
2년 후인 서기 371년, 이번에는 근초고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이고 돌아옵니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정복활동은 사방으로 그 위세를 떨쳐  나갑니다. 
*인서트-7. 테입<76>  이도학
(1:14:54 근초고왕 때 보면 백제가 369년부터 371년 단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그 전에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 
발전은 전복전쟁의  승리죠. 동아시아의 강국인 고구려하고 싸워서 연전연승을 
거두었습니다. 369년에 고구려의 3만병력 격파하고, 371년에는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그것도 평양성에서 전사시키고 있습니다. 동남쪽으로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해서 가야 나라들을 복속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제 
남쪽으로는 마한 나라들을 예속시켜. 그리고 현해탄 건너에 있는 왜세력을 
정치적인 영향권내에 넣게 되고 그러한 개념으로 칠지도라는 칼을 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1:15:42)
<해설>  무슨 얘기냐 하면, 그 이전까지는 백제가 마한 연맹체의 일원으로서 
국력이 미미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 들어서 갑자기 
동북아시아의 강국이었던 고구려와 싸워 연승을 거두는가 하면, 마한의 다른 
세력들을 복속시키는 등 정력적인 정복활동을 한것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만주에서 내려온 대륙백제의 세력이 온조 세력과 통합하여 국력이 막강해졌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얘깁니다. 
*인서트-8. 테입<76>  이도학
(1:15:43 3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에 가히 정지할 줄 모르는 운동력, 정복력을 
가지고뻗어나가고 있는 것이죠. 그 전 단계의 백제의 경우는 정체돼 있는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발전하고 있는 거죠. 이것은 계기적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볼 수는 없는 것이고요,수혈에 의해서, 외적으로 세로운 세력이 들어와 가지고 
백제가 급팽창을 했다, 이렇게  봐야 될 것 같고요, 그리고 이러한 정복력의 
원천이라고 하는 것은 중장기병 부대의 출현이라고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사람이나 말이나 모두 쇠갑옷을 입힌 중장기병 부대가  만주지역에 있다는 
거죠. 비류계통의 만주지역 백제가 남하해 내려왔기 때문에 보병전  단계에 
머물러 있던 마한 세력들을 단기간 내에 제압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1:16:27)
<해설>  뿐만 아니라 서울의 석촌동 고분군 지역에서 계단식 석실을 갖춘 
적석총이 발견되었는데, 이 역시 만주지역에 있던 백제세력이 한강유역에 
정착했던 시기와 고고학적으로 맞아 떨어지고, 또한 4세기중반 이후부터는 
만주지역에서 백제의 활동에 관한 기록이 사라지고 없는 것도, 대륙백제세력을 
한강유역으로 내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 교수의 주장이 대체로 그렇습니다. 
앞으로 대륙백제에 관련된 이 부분들은 더욱 활발한 논의가 이뤄져야 하겠지요. 
<음악>  (브릿지)
 
<해설>  그럼 다시 삼국사기 백제본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낭독자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  
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라 하였다. 
<해설>  백제 건국설화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왕성의 이름을 어째서 
위례성으로 지었을까요? 이 '위례'가 지닌 의미를 학자들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석하고 있는데, 우선 다산 정약용의 견해를 계명대 노중국 교수로부터 
들어볼까요? 
*인서트-9. 테입<77>  노중국
  (1:10:46 다산 정약용 선생도 위리, 우리 ,울, 울타리 그렇게 봐도 좋지 
않겠느냐, 나라를 세우고 났을 때 중심지하고 그 다음에 일반민들이 사는 곳을 
구분하려면 울타리를 치게 되는데 그 울타리 우리, 그게 이제 위례하고 통할 수 
있고 그게 인제 그냥 일반명사인데 백제로서는 나중에 왕성을 나타내는 의미가 
되면서 고유명사화되어진 것, 그래서 이제 위 례성이라는 게 백제 왕성을 
나타내는 이런 표현으로 이제. 1:11:36)
<해설>  다시 말해서 위례성의 '위례'는 담을 나타내는 울타리, 한자로는 
위리(圍 )라는 말에서 파생된 이름일 것이다, 그런 얘깁니다. 그러나위례라는 
이름의 어원이나 유래에 대한 분석은 그 밖에도 더 있습니다.
<음악>  (적당한) UP & BG…
낭독자  -위례가 왕성을 뜻한다고 보기도 한다. 중국 사서인 주서에 백제편을 
보면 백제는 국왕을 어라하(於羅瑕)로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접미사인 '하'를 떼버리면, '어라'가 위례성의 '위례'와 닮았다. 따라서 
위례는 '왕이 거처하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강변에 위치한 성'이라는 견해도 있다. 고구려의 왕성이었던 위나암성에서 
'위나'는 강을 뜻하는 만주어 '우라'에서 비롯되었다. 위례성의 '위례'와 
위나암성의 '위나'는 음이 서로 통할 뿐 아니라 위례성이 한강변에 세워진 
데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위례성의 '위례'를 빨리 읽으면 '열'이 되는데 백제 최초의 국호가  열 
십(十)자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해설>  그러나 이런 여러 가지 유래에 대한 분석들 중에서 이도학 
교수는위례성이 '큰 성'을 의미한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싶다고 얘기합니다. 
*인서트-10. 테입<76>  이도학
(1:22:32 위례에 대해서는 울타리, 우리에서 나왔다, 이런 견해도 있습니다. 
다산 정약 용 선생의 견해가 되겠습니다만 그게 아니고 이것은 크다는 뜻에서 
나왔다 이렇게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한강을 욱리하, 아리수 했는데 아리, 
욱리, 전부 크다는 뜻입니다. 바로그런 데서 위례, 大城, 큰 성이다, 실제로 
기록에 보면 왕성은 대성이라고 적어놨습니다. 여느 사람이 거처하는 성이 
아니고 왕이 거처하는 성이기 때문에 근댓자를 써서 대성, 이걸 우리말로 
위례성, 욱리성, 아리성, 이런 뜻으로 위례성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봐야만 될 
것 같습니다.1:23:12)
<해설>  실제로 일본서기에는 이 성이 훗날 고구려군에 의해 정복당했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낭독자  고구려 군대가 7일 동안 밤과 낮으로 대성(大城)을 공격하여 왕성이  
함락되었다. 드디어 백제가 위례를 빼앗겼다. 
<해설>  여기서 큰 성(城), 즉 대성과 위례라는 말, 그리고 왕성을 같은 
명칭으로 함께 쓰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위례성의 명칭에 대한 유래는 
그렇다 치고,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신화에서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하남위례성의 주변환경을 설명하면서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인다"고 함으로써 첫 도읍지가 하남, 즉 한강 이남인 것으로 설정돼 
있습니다.그러나, 같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온조왕대의 기록을 보면 첫 
도읍지는 한강이북이었던 것으로 돼 있습니다. 
<효과>  (왕이 탄 수레 굴러가고 신하들 여럿 뒤따르는)
온조왕  오늘은 강을 건너 한수 남쪽으로 순행을 할 것이니 배를 준비하도록 
하라. 
신하2예, 대왕마마. 
<해설>  온조왕 13년 5월, 왕은 영토를 순행하는 중에 한강이남 지역을 
둘러보는데, 돌아와서는 대신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온조왕  내가 어제 순행 중에 한수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매우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 곳으로 도읍을 옮겨서 조정이 영원히 평안하도록 계획을  세울 
것이니 도읍을 옮길 준비를 하도록 하라.
<해설>  그리고 이듬해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건국 신화에서 보이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는기록과 배치됩니다. 
뿐만 아니라 위례성을 그냥 위례성이라 하지 않고 '하남 위례성'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명칭의 상대개념인 '하북 위례성'도 존재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첫도읍지는 한강 이북인 하북위례성이었는데 나중에 
하남 위례성으로 왕실을 옮겼다, 이렇게 정리를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에 나오는 하남위례성이 있었던 자리는 어디였을까요? 풍납동 
토성일까요, 몽촌토성일까요? 노중국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시죠.
*인서트-11. 테입<77>  노중국
(1:09:54 풍납토성하고 몽촌토성을 다 합쳐가지고 대성, 또는 왕성, 위례성, 
이렇게 부 른 게 아니겠느냐, 그걸 따로 부를 때는 남성, 북성, 풍납토성이 
위치가 북쪽에 있으니까 북성, 몽촌이 이제 남성, 그 둘을 합쳐서 부를 때는 
대성, 왕성, 위례성 또는 한성, 이렇 게 부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굳이 따로 나눠 가지고 얘기하기보다는.  1:10:32)
<해설>  지금은 풍납동 토성을 몽촌토성과 더불어 백제 임금이 거처했던 
왕성으로 규정하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가 거의 없습니다만, 1990년대에 
풍납토성이 발굴되기 이전까지는 풍납동 토성은 전혀왕성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내력을 잠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일제는 1916년도의 조사에서 풍납동 토성을 조심스럽게 한성도읍기의 
백제 왕성으로 지목했습니다. 그러나 국사학계의 태두라고 불리는 두계 이병도 
박사는 풍남동 토성은 왕성이 아닌 사성이라는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 
근거는 이렇습니다. 개로왕 시기의제방 축조 기록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낭독자  강 언덕을 따라 둑을 쌓았는데 사성의 동쪽에서 시작하여 숭산의 
북쪽에 이르렀다. 
<해설>  뿐만 아니라 책계왕 시기의 기록에는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해서 
아단성과 사성을 수리했다"는 내용이 수록돼 있습니다. 
  여기서 뱀 사(蛇)자로 표기된 사성(蛇城)이 바로 풍납동 토성일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왕이 살았던 왕성이 아니라 군사적 목적으로만든 작은 규모의 
군사진지, 즉 진성(鎭城)에 불과하다, 그런 주장입니다. 그런데, 그 성터에서 
금팔찌, 백동경 등 예사롭지 않은 유물들이 발견됐는데, 그 때도 이병도 박사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병도  (에코)유물이란 본래 이 곳 저 곳으로 유동되는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도성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논할 거리는 되지 못합니다. 
<해설>  그러나 을축년 대홍수 때는 제사 지낼 때 사용한 종묘 제기로 볼 수 
있는 초두( 斗) 두 점이 큰 항아리 안에 담겨서 발견됩니다. 그러니까 그 
곳에서 발견된 유물이 이 곳 저 곳으로 유동되는 유물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지요. 뿐만 아니라 그는 풍납동 토성의 입지 조건이 왕성과는 맞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이병도  (에코)임금이 사는 왕성이 한강변에 있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한강변은 상습 침수지역인데 그런 곳에다 도성을 축조했겠습니까?
*인서트-12. 테입<76>  이도학
(1:25:23 왕성에 대한 이해가없었기 때문에 부여의 부소산성이라든지 공주의 
공산성  다 금강을 끼고 있어요, 백마강을 끼고 있고. 제가 또 답사를 했지만 
만주에 있는 부여의 동단산 남성자, 송화강을 끼고 있습니다. 그게 고대 한국의 
왕성의 기본패턴이에요.  평양성의 경우 장안성 이것도 대동강을 끼고 있고요, 
그런데 한강변에 있다, 상습침수  구역이고 물난리 나는 곳인데 왕성이 거기 
있으면 위험하다, 이런 논리, 그리고 음운가지고 갖다붙인 거죠. 바람들이 
배암들이 해가지고 이제. 김원룡 선생은 그 견해를 따라가지고 발굴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맞다, 그래서 그 지역에 민가들이 들어차게 되고  
아파트들이 들어서게 되고 하다 나중에 뭐 발굴하다 보니까 아, 이게 보통 성이 
아닌가  보다 왕성인가보다.1:26:15) 
<해설>  지금은 그 성터가 서울시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하고 있지만 이전에는 
경기도 광주의 풍납리에 있었기 때문에 광주 풍납리 토성이 정식 명칭입니다. 
바로 이 성이 위치한 '풍납'이라는 동네 이름에서 사성과의 연결성을 찾기도 
했습니다. 이도학 교수의 얘기 이어집니다.
*인서트-12. 테입<76>  이도학
  (1:24:08 지금 풍납 할 때 바람 風자에다 들일 納자인데 바람들이, 들일 
납자니까. 그리 고 뱀의 경우 방언으로 배암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을 아마 
백제 때 들이라고 하지 않 았겠느냐, 이건 근거는 없지만 두계 선생이 그렇게 
추측을 했어요. 배암들이, 바람들이, 같다, 그러니까 풍납동 토성은 바람이 
불어서 그런 게 아니고 배암성, 사성에서 나왔다,  그래서 풍납동 토성은 
사성이다. 이렇게 비정을 했어요. 그래서 67년엔가 서울대학에서  김원룡 
교수가 또 발굴을 했어요. 그래 스승의 견해를 따라서 사성이 맞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고.1:24:48)
<해설>  만일 60년대에 이뤄진 발굴에서 그곳을 군사진지 성격의 사성으로보지 
않고 백제의 왕성으로 보았더라면 후속 발굴작업이 대대적으로 시행됐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본모습에 가까운, 3.5 킬로미터에달하는 백제왕성의 모습이 
드러났겠지요. 1990년대말의 일부지역발굴을 통해서 "그 곳이 하남 위례성일 
가능성이 크다"는 쪽으로의견이 모아졌지만 그 때는 이미 그 일대에 아파트를 
비롯한 고층건물이 즐비하게 들어서버린 상황이어서 백제사의 보물창고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 왕성의 많은 부분은 지하로 묻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 그리고 고고학 사상 유례를 찾기힘들 정도의 졸속 
발굴로 비판 받고 있는 무녕왕릉 발굴 등, 백제유적 발굴에 얽힌 얘기는, 
나중에 따로 주제를 설정해서 탐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토성의 
명칭에 관한 얘긴데, 사성을 연상시키는 '풍납토성'이라 부르지 말고 성이 
위치한 지역 이름을 따서 부를 바에는 '풍납동 토성'이라고 부르는 게 바른 
호칭이라는 게 이도학 교수의 설명입니다. 
*인서트-13. 테입<76>  이도학
(1:29:00 성 이름이 어느 성인지 몰라요. 성 이름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아마 
하남위례 성이 아닌지 원래 이름이 아니겠는가 생각됩니다만 그런 경우는 이제 
그 유적이 소재하 고 있는 지명을 따서 이름을 붙이는 거죠. 풍납동에 있기 
때문에 풍납동 토성인데 풍납 토성, 풍납토성하는데 풍납동 토성이라고 붙여야 
되고요, 그리고 정식 명칭은 이 일대가 지금은 송파구지만 경기도 광주였어요. 
풍납동 토성, 이렇게 제대로 불러야만 되는데 풍 납토성 하면 사성을 
연상시켜요. 1:29:41)
<음악>  (브릿지)
 
<해설>  자, 그럼 이제 삼국사기에 백제의 시조로 나와 있는 온조왕 시기의  
기록을 들춰보기로 할까요? 
낭독자  온조왕 원년 5월,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해설>  온조왕이 맨 처음 했던 일로 올라 있는 기록이 바로 동명왕묘(廟),즉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당은 어디에 
세워졌을까요? 계명대 노중국 교수의 얘깁니다.
*인서트-14. 테입<77>  노중국
(1:16:47 한신대학에서 발굴한 경당지구가 있습니다. 풍납토성 안에 
경당지구에서 발굴 을 했는데 그 중에 상당히 정성들여 만든 건물지가 하나 
나왔습니다. 그 건물지는 발굴 자인 권오영 선생은 이제 제사공간이 
아니겠느냐, 이럴게만 추정하고 있습니다. 제사공 간이라고 했을 때 누구를 
제사 지냈는지 이것까지는 현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는 이제 고고학적 
발굴에 기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1:17:28)
<해설>  그런데 이도학 교수는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검단산에 동명왕 사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삼국사기에 '숭배하다'라고 할 때 쓰는 높을 
숭(崇)자를 쓰는 '숭산'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그 숭산이바로 검단산이었을 
것이고, 바로 그 곳에 사당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주장입니다. 
*인서트-15. 테입<76>  이도학
(53:02 단순히 산을 숭배한다는 것이 아니고 산에 뭐가 있기 때문에 신성한 
어떤 사당  이라든지 제사시설 이런 게 있었기 때문에 숭산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려졌다 이렇게  봐야만 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제가 지난 시기에 
하남시 검단산을 답사했을 때 제단유 고를 확인했어요. 아마 이게 동명묘가 
있던 장소가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동명묘가 있는 하남시 
검단산이라고 하는 곳은 배제 왕성인 풍납동 토성이라든지 몽촌토성에서 볼 때 
정동쪽이에요. 동명 할 때 동녈 東자에다가 밝을 明자라고 합니 다. 동쪽의 
밝음, 동명묘라고 하는 사당은 동쪽에 있어야 하고 해가 솟아오르는, 왕이 
거처하는 공간 왕성에서 바로 동쪽인 검단산에 소재하고 있었다. 53:53)
낭독자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이라는 사람은 하백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하여 태어난 사람이다. 
<해설>  속일본기 서기 789년 기록에 이런 대목이 보이고, 이듬해인 790년의 
기록에는 백제의 사신들이 일본왕에게 올린 표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신 백제의 태조 도모대왕은 태양신이 몸에 내려온 분으로 부여에 머물러 
나라를 열었습니다. 천제(天帝)가 녹( )을 주어 모든 한인  (韓人)을 통솔하고 
왕을 칭하게 하였습니다. 
<해설>  이렇듯 백제 사람들은 시조가 태양으로부터 내려왔다고 믿었고, 
동명이라는 글자 역시 '동쪽이 밝아온다'는 뜻이기 때문에, 당시 왕궁이 있었던 
풍납동 토성이나 몽촌토성에서 정동쪽에 있는 숭산, 즉검단산에 사당을 지었을 
것이라는 얘깁니다. 왕성에서 바라보면 동쪽에 있는 검단산 위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이 동명의 이미지와 부합되지 않습니까. 검단산이라는 이름 자체가 '신성한 
단이 있는 산'이라는 의미이고 실제로 백제시기에 제단으로 설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서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음악>  (브릿지)
 
<해설>  삼국사기에는 온조가 한성에 백제를 세웠을 때 백제를 위협하는 가장 
큰 외적은 말갈과 낙랑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온조왕  말갈이 우리의 북쪽 국경과 인접하여 있는데 그 사람들은 
용맹스러우면서도 거짓말을 잘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기를 수선하고 식량을 
비축하여 그들을 방어할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효과>  (말 한 마리 달려와 멈추는)
장수2대왕마마, 지금 말갈군이 북쪽 변경을 노략질하고 있사옵니다. 군사를 
내어 그들을 물리치도록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온조왕  아니다. 내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말갈을 소탕할 것이다. 자, 
가자! 
<효과>  (군사들 몰려가는)
낭독자  온조왕 3년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왕은 정예군을 
이끌고 재빨리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였다. 적군 중에 살아 돌아간 자가 열 
명에 한두 명이었다. 
<해설>  온조왕이 처음으로 군사를 통솔해서 전장으로 나가 승리한 
기록을이렇게 적어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고구려와 발해사를 탐색할때 
말갈족에 대한 얘기를 여러 차례 한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말갈족이 
한반도의 중부지방인 한강유역에도 출몰했다는 얘길까 요? 학계에서는 백제가 
물리쳤다는 이 말갈은 북방에 있던 진짜 말갈이 아니고 강원도 북부와 함경남도 
지역에 있던 예족(濊族), 즉 동예였을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노중국 이도학 두 
교수의 얘기를 차례로 들어보시겠습니다. 
*인서트-16. 테입<77>  노중국
(1:19:01 여기 대해서 학계의 대체적은 견해는, 저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만 
이건 동 해안 지역, 함경도 주로 동해안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예족이 
아니겠느냐, 동예도 있고 옥저도 있고, 그 예족들, 이네들이 이제 동해안 
지역에 이른 시기부터 자리잡고 있었고 이네들이 백제를 공격을 해온 거를 
삼국사기 쪽에서 말갈로 후대의 인식인 말갈로 대체 해서 표현한 것이 
아니겠느냐, 1:19:42)
*인서트-17. 테입<76>  이도학
(1:34:52 이 말갈에 대해서는 東濊로 보는 견해가 조선시대 때 실학자들 이래로 
제기돼왔던 겁니다. 만주지역에 잇던 말갈이 아니고 이건 가짜 말갈이라는 
거죠. 僞靺鞨考라는 논문도 있습니다. 가짜말갈에 대한 고찰이라는 그런 제목의 
논문도 있습니다. 동예  지역에 있던 세력, 이 글을 후대 와서 어떤 연유로 
인해서 역사 기록에 말갈로 채색이  됐다는 거죠. 말갈이 아닌 사람들인데 
말갈로 돼 있다는 거예요. 이들이 내려온 침공방향이라든지, 또 그리고 
삼국사기 보면 고구려가 전쟁을 일으킨 가운데 보면 말갈을濊라고 이렇게 
기록한 경우가 있어요. 아, 예가 바로 말갈로 기록된 사람들이구나.  1:35:39)
<해설>  어쨌든 온조왕은 북쪽 변경을 침략했던 말갈군을 보기 좋게 
무찔렀는데, 이 때 왕과 함께 군사를 지휘하여 나가 싸운 사람은 '을음'이라는 
장수였습니다. 이 을음은 온조왕의 재종숙부, 즉 집안의 삼촌벌이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낭독자  온조왕 2년 3월, 왕이 그의 재종숙부 을음이 지혜와 담력이 있다 하여 
우보로 임명하고, 그에게 군사관계의 일을 맡겼다.  
<해설>  백제의 관직 중에서 우보와 좌보가 기록상 가장 먼저 나오는 
관직입니다. 기록에도 나타났듯이 군사를 움직일 수 있는 병권을 가진관직이 
우보였는데, 왕이 자신의 숙부를 우보로 임명한 배경은 무엇일까요? 
*인서트-18. 테입<77>  노중국
(1:24:46 맨첨에 인제 족부 을음을 이제 그러니까 자기 친족내에서 이제 한 
사람을 우보로 삼고 군사권을 맡긴 걸 봤을 때, 그게 첫 단계고 두 번째 단계는 
북부 해루한테맡기고 자기 친족 바깥 집단한테 우보직을 넘겨주는 것이죠. 
결국은 초기에는 왕족 중심으로 하다가 조금씨 조금씩 자신감이 생기니까 
주변세력도 끌어넣어서 그 뭐랄까 통치에 참여시켜 나가는. 1:25:28)
<해설>  왕의 숙부를 가장 중요한 관직인 우보로 임명한 것은, 아직 주변세력을 
아우르지 못한 건국초기인 탓에, 그래도 가장 믿을만한 사람이 왕실의 
친족이었기 때문이겠지요. 
  어쨌든 동예로 추정되는 이 말갈군의 공격은 그 한 번에 그친 
게아니었습니다. 
장수2(말 타고 달려와서)대왕마마, 지금 말갈군이 우리 도성까지 밀려오고 
있사옵니다. 
온조왕  군사의 수가 얼마나 되느냐? 
장수23천여 명에 이른다고 하옵니다. 우리도 군사를 움직여 나가 싸워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효과>  (멀리서 군사들 몰려오는) 
장수2적군이 성문앞까지 몰려오고 있사옵니다.
온조왕  아니다. 군사들을 모두 성안으로 불러 들이고 성문을 단단히 
닫아걸도록 하라!
<효과>  (군사들 성안으로 몰려들어가고)
 (성문 닫히는)  
 (말갈군, 말타고 몰려오는) 일부 BG
낭독자  온조왕 8년 봄 2월, 말갈군 3천 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했다.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적군은 군량이 떨어져 
말머리를 돌렸다. 
온조왕  적군이 후퇴한다. 성문을 열고 추격하라! 
<효과>  (성문 열리고)
  (군사들 몰려나가는) (뒤엉켜 싸우는)
낭독자  왕은 정예군을 선발하여 대부현까지 추격하여 단번에 이기고 적병  
50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해설>  이 후로도 말갈과의 전투는 계속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동예로 추정되는 말갈과의 충돌 말고도 백제와 창칼을 겨누었던 
세력으로 낙랑이 있었습니다. 낙랑은 지금의 평양지역, 즉 대동강 유역을 
근거지로 삼고 주변에 많은 현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달리 표현하면 중국의 
식민도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낙랑군은 당시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에 
자리하고 있던 삼한을 통제하거나 삼한과의  교류와 교역을 맡아보던 중국의 
식민기지였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시조인 온조왕이 백제를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낙랑과 긴장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장수2대왕마마, 말갈의 침략은 우리 백제의 정예병으로 하여금 능히 막아낼 수 
있다 하나, 낙랑군의 움직임 역시 심상치 않으니 그들의 침략에도 대비를 해야 
할 것이옵니다. 
온조왕  알았느니라. 낙랑과의 접경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워서 낙랑군의 
침략에 대비하도록 하라! 
낭독자  온조왕 8년 가을 7월, 마수성을 쌓고 병산에 목책을 세웠다. 
<해설>  여기서 마수성은 대동강 발원지인 함경남도 요덕군 일대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고, 목책을 세웠다는 병산은 평안남도 맹산군의 병풍산남쪽의 
철옹산성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온조가 백제를 세운지8년밖에 안 된 
상황에서 백제의 영토가 그처럼 북부지역까지 멀리뻗쳤을까요? 그 부분은 
나중에 규명해 보기로 하고-. 어쨌든 백제가 낙랑과의 접경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자 낙랑태수가 사람을보내서 항의합니다. 
태수 (에코)지난날 우리 낙랑과 백제는 서로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관계를 맺어 
한 집안과 같이 여기고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지금우리의 영역에 
접근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고 있으니 혹시 우리 땅을 야금야금 차지하려는 
속셈이 아닌가? 만일 옛날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면, 성을 허물고 목책을 
제거하여 즉시 억측과 의심을 풀어줘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전투로서 승부를 가리자! 
<해설>  낙랑태수의 이런 위협에 온조왕은 이렇게 맞대응합니다. 
온조왕  (에코)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수비하는 것은 고금의 
상도(常道)가아니던가! 어찌 이 문제로 화친과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다 하는가?
  이는 당연히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일 낙랑태수 당신이 강한 것을믿고 
군사를 출동시킨다면 우리 또한 맞아 싸울 것이니라! 
<해설>  이런 날선 공방 끝에 백제와 낙랑의 우호관계가 단절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 기록대로라면 백제는 건국하자마자 초기부터 이미 막강한 힘을 
가진 국가인 셈이지요. 그런데, 온조왕 10년의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보입니다. 
낭독자  가을 9월, 왕이 사냥갔다가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이를 마한에 
보냈다. 
<해설>  백제의 왕이 사슴을 잡아 마한의 왕에게 바쳤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마한은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걸쳐 있던 3한 중의 하나였는데, 중국 사서인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건국 당시 백제는 마한의54개 나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54개나 되는 작은 세력들이 일종의 연맹체 형식으로 마한을 
구성하고 있었고, 전체 마한을 대표하는 종주국은 목지국이었습니다. 따라서 
백제의 온조왕은 사냥터에서 잡은 신기하게 생긴 사슴을 목지국의 왕에게 
진상함으로써 마한 연맹체의 일원으로서 예를 표한 셈이지요. 
  온조가 맨 처음 한강유역에 도착해서 나라를 세울 때의 이야기가삼국사기에는 
이렇게 기술돼 있습니다. 
낭독자  왕이 애초에 강을 건너와 발붙일 곳이 없을 때 마한의 왕이 동북방  의 
100리 땅을 주어 살도록 하였다. 
*인서트-19. 테입<76>  이도학
(1:42:54 아마 기존의 마한 판도 속에 이제 백제가 들어간 것으로 봐야만 될 것 
같습니다. 그 당시는 사실은 인구가 적은 그런 상황이고 그러기 때문에 좀 
선진문물로 무장한  세력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마한의 토착세력하고 타협을 
한다든지 또는 경우에 따라서는  제압을 한다든지 무력으로 복속을 시킨다든지 
이런 방법을 써서 지금의 서울지역에 둥지를 틀지 않았겠느냐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1:42:21)
<해설>  아무리 온조가 북방의 선진 문물로 무장하고 내려왔다 하더라도, 
처음에 손바닥만한 100리 땅을 얻어서 둥지를 틀었는데, 몇 년이지나지 않아서 
대규모의 정복활동을 펼쳤다는 기록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시조인 
온조왕 시기에 벌써 영토가 충청도를 지나멀리 전라도 지역까지 뻗쳐나간 
것으로 돼 있습니다. 
*인서트-20. 테입<77>  노중국
(1:35:50 온조왕조에 보면 정복활동이 다 끝납니다. 온조왕 때. 그 외 삼국사기 
백제본 기에는 정복활동이 안 나옵니다. 온조왕 때 이미 고사부리까지 정복한 
것으로 해가지고 전부 끝난 것으로 나오는데 이거는 온조왕 때 다 됐다기보다는 
그 이후에 이루어진 일들, 이걸 인제 시조의 어떤 탁월함 시조의 뛰어난 공적 
이걸 보여주기 위해서 후대 사실 을 앞에다가 끌어놓은 게 아니겠느냐, 그렇게 
보고서 백제의 온조왕기에 보이는 남쪽으 로 영역을 확대해가는 과정을. 
1:36:38)
<해설>  그러니까 건국초기의 백제는 마한 연맹체의 54개국 가운데 하나로서 그 
세력이 미약했는데, 건국시조의 위대성을 나타내기 위해서후대에 다른 임금들이 
정복활동을 통해 이룬 업적을 온조왕 대에이룬 것처럼 끌어다 붙였을 것이다, 
그런 얘깁니다. 삼국사기 온조  왕대의 기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켰다는 기록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낭독자  온조왕 27년 여름 4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이 마침내 항복하였다. 
그곳의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마침내 마한이 멸망하였다. 
<해설>  온조왕 27년, 그러니까 서기 9년에 백제가 마한의 종주국이었던 
목지국을 멸망시키고 마한을 접수해버렸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이후로는 
마한이니 목지국이니 이런 기록이 안 나와야 할 텐데, 그 한참  뒤에까지 
중국사서를 비롯한 여러 기록들에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서트-21. 테입<77>  노중국
(1:34:42 여기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특히 일제 시기에는 
근초고왕 이전  거는 전혀 믿을 수가 없다 해서 부정해버리는 견해도 있었고, 
또 한편 거기에 대한 반작용 비슷해가지고 삼국사기를 그대로 봐야 된다 믿어야 
된다, 믿고 보니까 이미 온조  왕 때 이미 영역국가 또는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이렇게 보는 극단적인 견해도 있습니다. 저는 양쪽 다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절충하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뭐냐면 
백제라 하는 것도 처음에는 작은 국가에서 점차 커져갔다는것.1:35:29)
<해설>  그렇다면 온조왕 때 있었던 일이라고 기록돼 있는 그 사건들은 
실제로는 언제 어느 왕 시기에 일어났을까요? 그리고 또 하나의 백제였던 
비류의 얘기는 어디로 갔을까요? 다음 이 시간에 그 의문들을 짚어보기로 
하겠습니다. 

http://www.kbs.co.kr/radio/1radio/history/aod/1380440_1174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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