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Davin (다빈) 날 짜 (Date): 2005년 9월 1일 목요일 오후 04시 34분 54초 제 목(Title): [펌] 일제시대 이야기 2 일제시대가 식민지 시대는 아니었다. 우리는 흔히 아무 생각 없이 일제시대를 식민지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한국 사람들은 당시에 모두 식민지의 백성으로 노예생활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사실일까요? 과연 우리는 남의 나라에 정복당해서 36년간이나 노예가 됐던 사람들의 후손들이겠습니까? 우리는 그렇다고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과거사의 족쇄에 옭아매어 끊임없이 자기부정과 비하의 연민에 괴로워하게 만드는 자학사관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한 때에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서, 그것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해서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무리한 근거와 아전인수적인 논리를 동원해서라도 그것에 맞서는 민족의 의기와 투쟁력을 증명하려 합니다. 작금에 한국정치의 화두가 되고 있는 과거사청산과 친일파척결이 이와 같은 역사관의 바탕에서 야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사에서 벗어나고 일본과 대등하고 당당한 관계를 정립하고자 하면 이 잘못된 과거사의 인식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어떤 시각에 의해서 보더라도, 우리가 일제시대라고 말하는 기간 동안의 한반도가 식민지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며, 당시의 한국인들이 식민지배를 받는 노예가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식민지(植民地)라는 것이 무엇인지 잠깐만 생각해본다면, 그리고 식민지라는 말의 의미와 개념에 비추어 일제시대를 돌이켜본다면 누구도 제 말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것이며, 양심과 이성을 가지고 이 문제를 대하는 한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그 시대를 스스로 지칭하기를 ‘식민지’ 또는 ‘노예’라 말하는 것은 식민지나 노예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모르거나 아니면 일제시대의 실상을 잘 모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 문제를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우선 ‘식민지’라는 말의 개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식민(植民)이라는 말의 뜻은 글자 그대로 ‘사람을 심는다’입니다. 힘으로 뺏은 땅에 자기 나라 사람을 이주시키는 정책인 것입니다. 이때 자기나라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새로운 땅이 바로 식민을 위한 땅, 즉 식민지인 것이죠. 그렇다면 원래 그 땅에서 살았던 원 주인들은 어찌 되느냐? 새로 그 땅의 주인이 된 사람들의 노예나 종이 됩니다. 식민지의 원주민은 법적으로나 실생활에 있어서나 결코 이주민과 대등할 수 없는 것이 제국주의 시절의 전 세계 식민지의 공통된 개념이었습니다. 그리고 식민지라는 것은 원주민의 대표(왕이나 족장)와 새 주인이 될 국가의 원수 간에 협약이나 문서로 맺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런 사례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식민지란 백프로 무력에 의해 병탄된 땅이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3백 년 동안 인종차별 정책이 법으로 유지되어 왔던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탈리아가 식민지로 삼았던 리비아와 이디오피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불령인도차이나나 모로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렇다면 일제시대가 저런 식민지들과 공통되는 점이 어디 하나라도 있는가 생각해 봅시다. 강점기에 일본의 정책은 인종차별정책이 아니라 동화정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식민정책은 이주민과 원주민을 법률과 제도에 의해서 신분적으로, 계급적으로, 혈통적으로 양분해 놓고 양자를 구별하고 차등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이주민과 원주민 간의 통혼을 법으로 금지시켜 방지하였습니다. 이주민과 원주민은 법적으로 주인과 노예의 신분으로 고정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제시대는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그런 신분과 계급의 차별이 없었고 일본인과 한국인의 연애와 결혼은 규제되거나 억압받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문서상의 법적으로는 한국인과 일본인은 차별되지 않았고, 거의 대등한 상태였습니다. 이름을 다르게 써야한다고 강제된 것이 아니라 같은 형식의 이름을 쓰지 않는다고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어느 나라의 식민정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사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인구의 이동에 있어서도 한일양국 사이에는 식민이 아니라 역식민이 이루어졌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일본인이 조선에 건너온 수보다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의 수가 훨씬 많았다는 것입니다. 종전 후 귀국선이 끊긴 후에 재일거류민의 수가 1백만을 조금 넘었는데, 조선에서 살다가 패전 후에 일본으로 쫓겨 들어간 일본인의 수는 약 30만 정도였습니다. 오히려 일본이 조선의 식민지였다고 해도 좋을 만합니다. 그 식민의 후손들이 지금의 재일교포들인 것입니다. 물론 혹자는 당시에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들은 자발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강제로 징용되거나 징발되어 건너간 사람이기 때문에 식민이라는 개념에 포함시킬 수 없다고 말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시 도일한 조선인들이 모두 강제징용에 의해 끌려간 사람들은 아니었고, 오히려 유학생들이나 일본인과의 결혼 또는 직장이나 일거리를 찾아간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태양의 제국’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요. 일본군이 홍콩에 진주하자 홍콩에 거주하던 영국인들이 항구로 가기 위해서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아우성을 치는 장면이 있고, 그들이 버리고 간 값비싼 호화가구들과 집기들이 들판에 가득하게 버려진 광경이 보입니다. 홍콩은 크지 않은 자그만 항구도시인데 이 도시 하나에 이주한 영국인들이 20만이 넘었습니다. 즉 식민된 사람들입니다.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홍콩의 중국 사람들은 영국인들의 종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했던 날, 북경에는 약 12만 명의 일본인 민간인이 살고 있었고, 청도에는 약 3만 명, 제남에는 2만 5천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만주의 하얼빈, 봉춘, 심양 등지에만도 30만 명 가까운 일본인 민간인이 살고 있었는데, 중국 대륙 전체로 보면 얼추 백만에 육박했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 살던 일본인 민간인의 수는 의외로 적어서 종전 후에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돌아간 재조선 일본인의 수는 30만을 약간 웃도는 정도입니다. 광복 후에 재일교민들의 상당수가 귀국선에 몸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에 남은 한국인의 수자가 1백만명에 달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2천1백만 명 정도였고, 서울의 인구가 2백만 명 정도였지요. 일본인들이 경제적인 부와 정치적인 권력의 대부분을 독점하고 있었지만 인구의 이동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식민지의 고전적인 개념을 적용할 때는 일제시대의 한반도가 식민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실제의 생활에 있어서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에 대해서 우월의식을 갖고 있었고, 통치 계급의 구성원들이 거의 일본인이었으므로 실제적으로는 일본이 지배자이고 조선이 피지배자로서 복속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 아니냐고 반론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타당한 주장입니다. 그러나 일제시대는 한마디로 정의하기에는 힘든 세계사에 비근한 예가 없는 특이한 사례입니다. 우리는 부모 세대의 생생한 체험과 수많은 기록과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나는 어떤 편견과 선입견도 배제한 연후에 오로지 진실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양심과 지성에 의지하여 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글의 의도와 결론은 한일합방을 합리화시키거나 일본의 한국통치를 정당화하거나 일제시대를 미화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서두의 글 몇 개만을 읽고 오해한 나머지 분개하는 분이 안 생기기를 바랍니다. 이 글을 읽는 어느 누구보다도 구름은 더 내 나라를 사랑한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구름은 한국의 마지막 민족주의자이기를 소원합니다. 이 글은 내 조국을 사랑하므로 쓰는 글입니다. 구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