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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parkeb (parkeb)
날 짜 (Date): 2004년 7월  8일 목요일 오후 07시 04분 01초
제 목(Title): Re: 펌/ 고구려는 한국 중국과 별개의 국가


훌륭한 이론에 반론을 제기하는게 좀 껄끄러울 수도 있겠지만..


1)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대동강 이북이나 함경도 등
한반도 북쪽 지역에 대해서는 ‘우리 땅’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 이 부분이 전혀 이상없이 받아들여지십니까? 대동강 이북이 아주 넓은
지역도 아니고 이미 고려 초기에 회복된 지역입니다. 함경도 지역도 윤관의
여진 정벌 이후에 이미 고려가 보유했던 지역이라는 논란의 지역입니다.(윤관의
9성이 함흥평야 지역만이 아닌 두만강 유역까지 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고려가 10년, 20년의 세월을 지킨 나라가 아님은 이미 알고 있는데, 한반도
북쪽 지역에 대해 우리 땅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은 고려를 아예 제외하는
생각 같습니다. 


2) 고구려의 문화나 제도, 언어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여러 주장중의 하나인데, 언어가 같았다는 주장도 있으니
더 반박하지 않겠습니다. 신앙이야 원래 국조신과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나
이후 불교가 득세를 했습니다. 백제와 신라도 비슷합니다. 백제는 동명묘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 동명은 부여의 동명이라는 연구성과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제도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사실상 모호합니다. 국가 조직이란 원래
연합정권->고대왕국이 되면서 자연스레 바뀌어 갑니다. 신라의 경우 사로6촌
에서 시작하여 6부가 세워지고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면서 다수의 조직을
만들어간 것으로 압니다. 고구려가 그렇게 않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5부족의
연합에서 5부로 개편되었으며 지방에 대한 조직도 나라가 점차 커지면서 계속
바뀌었으니까요.


3) 패수 경계 문제

패수 경계는 우선 당이 신라에 사신을 보낸 것에 근거합니다. 즉, 신당
전쟁에서 신라는 초기의 몇 전투에서 졌으나 이후 매초성 및 금강전투를
통해 당의 주력군을 격파했다고 보여집니다. 한편으로는 당에 계속 사신을
보내 당에게 복속하겠다는 강온 전략을 폅니다. 이때 근거가 되는 것이
문무왕 11년에 나옵니다. 즉 태종 이세민이 신라에게 평양 이남의 땅은
신라에게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계속 강조합니다. 이때 당나라 조정도
급변하게 되는데 고종이 죽고 측천무후가 세력을 잡게 되면서 신라와
싸울 필요가 없다고 판단 태종이 했던 약속을 지키겠다는 사신을 보냅니다.
(문무왕의 동생입니다.) 이것이 패수 경계입니다.

고구려의 영역을 통일할 필요가 없었다고 보기 보다는 당과의 전쟁을
끝낸 후 신라가 북진을 할 여력이 없었다는 쪽으로 보고 싶습니다. 신문왕은
문무왕 사후 즉위하였고 이때 소위 9주 5소경의 체제를 만들었습니다.(685년)
다시 말해 신라가 용가리 통뼈가 아닌 이상 당나라와의 전쟁을 분명히
치룬 상태에서(매초성 전투에서 당군 20만과 싸운 것을 본다면) 무조건 내땅
가지겠다고 가자 북으로 하는 짓은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요동지역에서는
계속 고구려 부흥군과 당군이 싸우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요동이 무주공산은
아닙니다.(고구려가 멸망해서 모든 성이 항복한 것이 아닙니다. 요동지역의
성들은 항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저항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발해가 세워집니다. 발해는 699년에 세워졌고 713년경에는 
고구려의 옛땅을 거의 회복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옛땅에 대동강이북이
안들어가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결국 신라가 국력을 회복하여 북진을
하기도 전에 고구려의 부흥이 먼저 일어난 것 뿐입니다.

신라가 그 이후에 북진을 생각할 수도 있겟으나 그 이후엔 이미 신라 내부가
권력투쟁에 빠져듭니다.

발해의 경우 요나라와 점차 충돌이 잦아지면서 발해왕이 신라로 사신을 보내
구원군을 요청했던 것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소한 발해가 보기에
신라쪽을 더 가깝게 생각한다는 것이구요.

오히려 신라 이후 고려가 세워지면서 왜 북진 정책을 표방했는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왕건은 북진 정책을 표방하며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대동강과
청천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을 회복합니다. 그가 조금 더 늦게 사망했다면
최소한 압록강 유역까지 다다랐을 겁니다. 물론 그 사후에 뿌린 씨앗들끼리
또 권력 투쟁을 벌렸지요. -.-;;

고려가 북진정책을 폈던 것은 공민왕이 요양을 공격해서 점령했던 부분까지
생각해본다면 고려시대에도 요동도 우리 땅이라는 개념이 확고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대개의 시대에 요동에는 강력한 국가가 있었다는
겁니다. 발해, 요, 금 물론 금이 망하면서 기회가 있을 수 있었으나 원이
고려에 들어오면서 역시 고토회복은 어려워 지지요.


4) 한국을 형성하는데 고구려가 역할을 한 것과 중국을 형성하는데
역할을 한 것의 차이는 없는가?

저는 있다고 봅니다. 고려라는 조선의 이전 왕조는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표방했고 그러한 표방은 적어도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는 없었습니다. 저는
고려, 조선을 지나면서 있었던 송, 요, 원, 명, 청이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를 한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금은 여진족이 세운 나라여서
또한 그 시조가 원래 신라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고 보여서 제외했습니다.

고조선도 저는 마찬가지로 봅니다. 고조선이 망한 이후 삼한의 국가가 성읍국가
이므로 어색하다고 하셨는데, 고조선이 망한 이후 그 유민들이 무조건 강력한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인 듯 합니다. 오히려 고조선이 망한 이후 부여,
고구려, 동예, 옥저, 삼한과 같은 국가 체제가 계속 세워진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들이 고조선의 영향을 받아서 세워진 것이 분명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조선이 망했어도 고조선의
영향으로 새로운 국가가 세워진 것이 없습니다. 한이 망한후 중간에 신,
위,촉,오 삼국, 5호 16국이었지만 그들이 고조선을 계승했다고 주장하지 않죠.



따라서 한국은 삼한만이 주류가 아닙니다. 이미 고조선부터가 주류입니다.
고조선에서 고대국가가 시작되었고, 그 고대국가에서 상대적으로 수준이
높은 정치 체계를 경험한 사람들이 기존의 사람들과 계속 융합되면서
끊임없이 국가가 만들어 졌습니다. 그 국가들 중 거대한 고대왕국이 
되어 남은 것이 고구려, 백제, 신라로 봅니다. 신라의 경우 삼국사기에 의하면
조선유민이 복속한 것으로 나옵니다. 조선은 고조선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유입은 결국 계속적인 발전으로 이뤄지는 것이죠. 계승의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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