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landau () 날 짜 (Date): 2004년 5월 11일 화요일 오후 11시 12분 28초 제 목(Title): Re: [펌/한겨레] 김구 >그러나 1년 전인 47년 발표한 >‘나의 소원’이란 글에서 김구는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다. …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서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며 공산주의를 극단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개인의 정치사상이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하고, 공산주의자와 하나의 통일된 나라 안에서의 공존을 받아들이는 것이 왜 `모순'인지 이해할 수 없군요. 예를 들자면, 프랑스의 우익이나 사회당은 공산당의 주장이나 정책에 극구 반대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산당과 하나의 국가 내에서 정당으로 공존 하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진보적인 학자의 글에서마저 `공산당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공산주의에 찬성하는 것'이라는 냉전주의적인 사고방식이 무의식 중에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이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렇다보니 대통령이 `공산당도 인정해야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발언이 대번에 빨갱이로 몰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21세기에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공산당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김구의 행동을 왜 자기모순이라고 규정하는지 모르겠네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신탁통치’로 이해하고 격렬한 반탁투쟁을 선도해 이른바 >‘반탁 쿠데타’까지 나아갔다. 반탁투쟁은 해방공간 좌우대립구도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결국 남북 분단으로까지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신탁통치 맞지 않습니까? 당시에 신탁통치를 받아들였다면 지금보다 좌파에게 유리한 환경이 설정되고 남북분단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십년이 지난 오늘날에 생각하는 결과론이지 1945 당시에 일제의 통치를 갓 벗어난 국민들의 입장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가정법에 불과합니다. 이래서 `역사에는 가정이 필요없다'는 말이 생겼나 보죠. 까놓고 말하자면 좌익도 처음엔 신탁통치에 반대했었습니다. 김구가 우익이었으니 좌익에게 좋은 소리를 듣기는 어렵겠지만, 분단의 책임을 우익의 반탁운동에 전가시키려는 논리에는 어처구니없어서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한국의 남북분단은 기본적으로 미-소의 세력경쟁이 빚은 결과입니다. 우익과 좌익은 각각 미국과 소련에 빌붙어서 분단을 재촉했을 뿐이죠. 더구나 김구파는 이승만 파와 달리 미국에 빌붙지도 못했는데, 김구에게 분단의 책임을 요만~큼이라도 뒤집어 씌우는 것은 마치 `세계지도를 그릴때 하필 38선을 한국의 허리에 지나가도록 그린 놈이 분단의 책임자다'라고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해방공간 내내 반공, 반소로 일관한 김구의 남북연석회의 참가는 이승만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모든 정치적 전망이 사라진 조건에서 취해진 정치전술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앞서도 말했듯이 반공반소가 곧 분단이라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나 소련에 동조하지 않아도 그들과의 공존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김구가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것은 분단이 가시화 되어가는 시점이었기 때문이지, 김구가 정치적으로 밀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두 시점이 비슷하게 일치해서 오비이락이 되어버린 것이죠. 1945-6년 시점에서 남북이 분단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한국사람 별로 없습니다. 당시의 실향민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북쪽에서 살다가 공산주의 피해서 남쪽으로 옮겨오면서, 사정상 가족의 일부만 먼저 내려가고 나머지는 나중에 오려다가 어느 순간 38선이 막혀버려서 얼떨결에 반평생 이산가족 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만큼 당시의 조선인에게는 남북분단은 거의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김구가 남북분단이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한 시점에서는 본인이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공산주의와 협상하려하지 않다가, 남북분단이 가시화 되는 시점에서는 `비록 공산당과 협상을 해서라도 분단을 막아보자'는 행동을 취한 것이 어째서 모순인가요? 오히려 김구는 이념보다는 통일국가에 확고한 우선순위를 부여한 진정한 민족주의자였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당시에 김구가 정치적인 영 향력을 잃어가는 중이었던 우연을 이유로, 공산당에 대한 정치적 반대가 곧 분단획책이라는 요상한 논리를 동원해서, 김구의 행동을 정치전술로 몰아가는 극좌편향적인 논리에 분노를 느낍니다. >그 아우라는 >실상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몸”이라는 맹목을 가리는 장막일지 모른다. 나도 김구가 완벽한 인간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동시에 김구를 포함한 민족주의가 잘못되면 극우파쇼로 치달을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확고한 공산주의적 정치적 입장에서 보면, 김구는 극우의 위험을 내포한 극단적 민족주의자일 수도 있고, 해방공간에서 좌파에게 털끝만큼도 도움이 되지 못한 실패한 정치인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냥 좌파적, 혹은 공산주의적 입장에서 김구의 사상을 비판하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왜 거기에 김구를 정치전술과 기회주의를 구사하는 `정치꾼'으로 폄하하는 정치적 프로퍼갠더를 도입하려 합니까? 그러면 좌익이 더 유리해지나요? 윗글의 이상한 논리 - 공산당에 반대하는 사람은 공산당과 통일에 대해 협상하면 안된다 (이거 완전히 이승만+박정희 식 논리 아닙니까?) -를 걷어내고 나면, 김구는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일관되게 자기 신념을 관철시켜 나간 진정한 민족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민족주의에 반대하기 때문에 김구에 반대하는 것은 글을 쓴 황병주 강사의 정치적 자유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반대하는 정치사상을 가진 사람이란 이유로 근거없는 논리를 동원해서 그사람을 `정치전술을 구사하고 자기모순에 빠진' 자로 매도하는 정치적 프로퍼갠더는 그만두어야 합니다. 도대체 민족주의자는 공산당과 통일에 대해서 협상하면 모순이라는 논리가 왜 아직까지 진보적임을 자처하는 학자의 머리속에서 나오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공산주의자와 협상하는 놈 = 친북 친공 빨갱이, 자유민주주의자는 공산당과 협상해서는 안된다라는 논리가 조봉암을 죽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