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hess (채승병) 날 짜 (Date): 2004년 1월 26일 월요일 오후 09시 53분 34초 제 목(Title): Re: 유태인의 디아스포라에 대한 질문 유태인이 팔레스타인에서 밀려나게 된 것은 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일어났던 일이지 단순히 1세기경 반란에 의해 마사다 요새가 함락되고 그런 이후 급히 일어난게 아닙니다. 70년경 예루살렘이 다시 불타고 유태인의 종교/정치권력 기반이 와해되었어도 여전히 유태인의 예루살렘 거주는 가능했고, 유대교도 바리사이파를 중심으로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32년에 시몬 바르 코크바가 주동이 된 2차반란이 일어나면서 유대 교를 끔찍히도 싫어하던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유다 지방이 박살이 나게 됩니다. 그 때부터 유다가 팔레스타인으로 강제 개칭되고 예루살렘에서 유태 인들이 축출됩니다만, 여전히 북부 갈릴리 지방에 유대교 및 유태인들은 건 재한 편이었습니다. 이러한 2차에 걸친 반란을 통해 유대교 내에서도 무모한 저항을 계속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고 현실에 적응했기 때문이었죠. 오히려 유태인을 결정적으로 밀어낸 것은 유대교와 뿌리를 같이하는 두 종교,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영향이었습니다. 이미 기독교는 3~4세기에 걸쳐 저변을 로마제국 내에 계속 넓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 유대교를 누르고 예루살렘에 새롭게 그 발판을 확고히 구축합니다. 예루살렘에 축조된 여러 신전들이 무너지고 기독교 교회가 세워졌으며 유대교인들은 축출되어서 1년에 한번 통곡의 벽에서 울 권리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어버리자 기독교인들에 의한 유태인에 대한 테러가 더욱 극성을 부 리기 시작합니다. 시나고그에 대한 방화, 약탈이 이때도 성행하였습니다. 이러한 풍조는 비잔틴 제국으로 이어져서 제국의 영향 하에 놓인 팔레스타인 지방의 유태인들은 차별적인 정책과 기독교인들의 핍박 속에 시달립니다. 현 실세계의 법과 기독교 교회가 모두 옭아매는 판국이었으니 살아남은 유태인 들은 다른 지역으로의 탈출을 모색하거나 더욱 더 단단한 공동체로 굳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페르시아가 팔레스타인 일대를 침공해 들어오자 유태인들은 비잔틴 제국을 거부하고 페르시아를 해방자로 환영하기도 합니다만...전세가 역전되어 비잔틴 제국이 팔레스타인을 수복하자 다시 반역자로 몰려 된통 두 들겨 맞고 이때도 상당수가 팔레스타인 땅에서 축출됩니다. 그러다 아랍세계를 신흥 이슬람교가 휩쓸게 되자 남아있던 유태인들은 겨우 비잔틴 제국과 기독교 교회의 핍박에서는 벗어납니다만, 이슬람 제국들도 기 반이 잡히자 슬슬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은 이들에 대해 인두세를 물리면서 차별적 조치를 취해서 문제점들은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당시 유럽에서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게르만 제국들이 그 자리 에 들어서자 유럽의 여러 제후들은 유태인을 환영하는 조치를 여럿 취합니다. 유태인이 당시에도 상공업에 재능을 떨치고 있었으므로 각 영지로 끌어들여 상공업을 진흥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래서 또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팔레 스타인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유럽으로 흘러들어왔죠. 물론 알다시피 유럽 또한 슬슬 기독교 세력이 강해지면서 이들은 게토에 격리되고 걸핏하면 왕따 대상으로 찍혀서 핍박을 받는 역사가 되풀이된 것입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유태인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빠져나가게 된 것은 로마에 대한 두 번의 반란이나 유대교의 심각한 배타성만으로 설명될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로마가 기독교 기치 하에 편협해지고 기독교 교회가 발흥하며 더욱 큰 시련을 받고 쫓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현실적 필요에 의해 유태인이 환영받는 지역이 있으면 우루루 몰려갔다가, 다시 그곳에서 기독교 세력이 강해지면 핍박받고 쫓겨나는 과정을 반복한 것입니다. 투르크 제국의 영역에서 오히려 유대교인들이 적당한 차별만 받은채 성공리에 공존해왔다는 점을 되새겨본다면, 기독교의 유대교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와 핍박이 유대교 공동체를 더욱 폐쇄적이고 배타적으로 만든 중요한 원인으로 여겨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