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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om4ys (주전자)
날 짜 (Date): 2002년 5월  5일 일요일 오전 01시 13분 37초
제 목(Title): [펌] 역사와 건망증...


글쓴이: 이동식 등록: 2002-05-01 21:51:35 조회: 30 
   역사와 건망증


  1995년 8월15일 밤 중국 南京市 江東門 茶亭東街 195번지에 있는 侵華日軍南
京大屠殺遭難同胞紀念館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의 남경대학살과 난을 당한 동
포들을 위한 기념관)앞 광장, 검은 색 드레스에 옅은 회색 겉옷을 걸친, 검은 
양말을 신고 검은 구두를 신은 한 할머니가 나무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세월과 풍파를 많이 겪은 듯 얼굴에는 적지않은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75세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고 기품이 있는 얼굴이었다.
  밤 10시, 할머니 앞에 카메라와 마이크가 다가왔다. 그는 카메라에 대고 이
렇게 말했다:"저는 남경에서 영화 <南京大屠殺>의 개봉시사회에 참석했습니
다. 영화 속의 일본군은 정말 잔인하더군요. 그러나 영화는 이 기념관 안에 있
는 사진들이 담고 있는 실상을 완전하게 표현해내지 못했습니다. 중국인들은 
참으로 너그럽습니다. 중국인들이 와서 이 기념관을 보는 것보다는 일본인들
이 와서 봐야 합니다. 사회자님 당신도 와서 보십시오!" 할머니는 감정에 북받
친 듯 몸을 떨면서 일본에 있는 사회자에게 말했다.
 이 인터뷰는 일본 TBS(東京放送)의 화면을 타고 일본으로 생중계됐다.   일
본 시간으로 8월15일 밤 11시, 일본의 東京放送은 일본이 2차 대전 중에 아시
아 각국 국민들에게 저지른 죄악을 보다 많은 일본인들에게 알리기 위한 목적
으로 남경과 서울, 싱가포르를 묶는 四元 위성생방송을 하는 중이었다. 할머니
는 75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南京현장에서 사회자 겸 리포터를 맡아 東京에 
보도하고 있었다.


 이 할머니의 이름은 오오다카(大鷹淑子)이다. 그러나 전쟁을 체험한 많은 중
국인들에게는 오히려 李香蘭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다른 
이름 山口淑子라는 본명으로도 또 알려져 있다. 오오다카는 결혼 후 남편 성
을 딴 것,이름으로 보면 중국인인가 일본인인가가 헷갈린다. 과연, 그녀의 일
생도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이름만큼이나 기구한 것이었다.
  그녀가 태어난 것은 1920년, 이미 일제가 점령하고 있던 만주 撫順에서 였
다. 아버지는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군인이었거나 사생아였을 가
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태어나자마자 중국인 가정에 양녀로 들어
갈 리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인가정에서 큰 만큼 그녀는 크면서 일본군인들의 
잔혹상을 눈으로 직접 보면서 자랐다. 공부를 잘 했던지 그녀는 북경으로 올라
가 1937년 북경 翊敎女子學院을 나온다. 그리고는 만주로 다시 돌아가 그 해
에 일본이 세운 株式會社 滿洲映畵協會에 들어가 영화배우로서의 길을 걷는
다. 李香蘭이란 이름은 이 때에 쓰던 藝名이다. 그녀는 이 때부터 <萬古流芳
>,<내 일생중의 가장 빛나는 날>등의 영화에 출연해 이름을 날렸으며, 노래 <
夜來香>은 공전의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관동군은 이 좋은 선전
재료를 그냥 두어둘 리가 없었다. 그는 일본침략을 미화하는 영화에  수시로 
출연했고 일본군을 위로하는  노래를 불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뒤 이향란은 중국군(당시는 국민당군)에 의해 체포돼 
간첩죄로 재판을 받고는 사형언도를 받는다. 총살형이 일주일앞으로 다가온 시
점에 그녀의 호적이 일본으로부터 도착한다. 비로소 이향란은 중국인이 아니
라 일본인 山口淑子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죽음 직전에 생명을 구한 이향란, 
아니 일본인 야마구치는 1946년 일본으로 돌아간다.
  ***1993년 6월 중국의 중앙텔리비젼은 4부작 드라마 [안녕! 이향란이여}를 
방영했다. 이 드라마는 원래 일본의 후지텔레비전이 제작비 8억 엔을 들여 만
든 대하다큐드라마이다. 이향란, 아니 일본인 山口淑子의 자전적 소설 <나의 
前半生>을 드라마화한 이 작품은 쌍엽비행기, 열차, 증기선 등 당시의 교통수
단에다 2천여 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된 가운데 정성을 기울여 만든 작품으로서 
처음 일본에서 방송될 때에 25%의 시청률을 올리는 큰 히트였다고 한다. 일본
에서 텔레비전극이 영화를 누르고 시청률이 높았던 것은 이 한 편뿐이라고 하
는 데서 그녀의 생이 얼마나 파란만장했는지를 엿보게 한다. 국회의원이 돼 있
는 山口淑子도 이 드라마를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할 정도로 드라마는 
뛰어난 작품이었다고 한다.

  밤 10시55분,생방송 프로그램이 막바지에 이른 시간, 남경대학살기념관 안으
로 카메라와 마이크가 옮겨진 가운데 할머니는 다시 말을 한다:"일본군을 위
한 위안부들은 그들의 인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그들의 청춘 모두가 짓밟혔
습니다. 그들은 이제 나이가 너무 많아 시간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진심으로
부터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저는 이것을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 곳
의 텔레비전 사회자가 저한테 묻습니다. 일본의 중학교 교과서에 왜 중국을 침
략한 역사가 없느냐고. 왜 일부 일본인들은 남경대학살을 인정하지 않느냐고. 
저는 지금 말합니다. 이 일은 바뀌어야 합니다. 위안부사건은 응당 배상돼야 
합니다. 전국의 일본 국민들이 모두 마음속으로부터 그들에게 배상해야 합니
다."
  "중국과 일본사이에는 하나의 과거가 있었습니다. 이 과거를 인정하지 않고
는 진정한 중일우호는 없습니다. 과거를 얘기해야 오늘의 중일관계가 있습니
다. 남경사람들을 만나보니 남경대학살은 물로 씻어서 깨끗하게 말리어지는 
땀 같은 게 아니라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엄연한 역사입니다. 
대학생이나 중고등학생, 초등학교 학생에 대해서 현대사에 대한 교육이 강화돼
야 합니다. 현재 교육을 잘 못 받으면 이후 일본인들은 아시아인들과 경제활동
을 할 때에  큰 간격을 만날 것이며, 이 간격은 갈수록 커져서 충돌할 것입니
다. 저는 이 점을 걱정합니다."

  이 할머니의 말이 생방송을 시청하던 일본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
까?  그것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할머니의 말은 30만 명의 원혼이 담겨진 
이 남경대학살기념관을 울리고 있었다. 중국인이 아닌 일본인의 입에서 나온 
사죄의 말을 듣고 그들 원혼들이 조금은 풀어졌을까?



  1994년 5월  일본의 나가노(長野)법상이 남경대학살을 부정하면서 일본의 침
략이 침략이 아니라는 말을 해서 중국과 한국의 여론이 들끓을 때 남경대학살
기념관을 찾았었다. 신라시대 왕족으로 중국에 와 불교의 성인이 된 지장보살 
김교각의 유적지인 구화산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2만5천 평방미터의 부지 위에 세워진 기념관은 전체가 커다란 조각이었다. 
기념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다 보니 등소평이 친필로 쓴 기념관 이름
이 정면에 붙어있고 그 옆으로 계단이 나 있는데, 거기에는 한자와 영어로 '遭
難者(희생자) 30만 명'이라는 글씨가 까맣게 새겨져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
면 평평한 옥상이 나온다. 이 옥상에서는 기념관경내에 조성된 계란크기의 자
갈을 깐 기념광장을 내려다 볼 수 있다. 풀 하나도 없이 돌만 갈려 있는 메마
른 땅에는 죽은 나무 몇 그루가 서 있고 주위에는 파괴돼버린 듯한 담장이 둘
러쳐져 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침략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
고 중국인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재난을 준 것을 상징하고 있다. 계단을 내려
가서 기념관경내 작은 길을 따라 가다보면 13개의 작은 비석이 나온다. 남경 
시내에 있는 모든 학살기념비를 줄여서 복제해 놓은 것이고,  주요 학살지에 
관한 사료가 적혀있다. 담장에는 돌로 된 대형부조 3점이 있다. 일본군이 남경
에서 죽이고 불태우고 강간하고 약탈한 사실을 부조로 새기고 있는 것이다.
   희생된 중국동포들의 유골을 그대로 보관 진열하는 방도 있다. 수 천  수 
만의 백골들이 꺼먼 눈을 뜨고 아무 말도 못하고 흙 속에 묻혀 있다. 그들은 
말이 없다. 일본군 만행의 실물증거인 것이다. 그 진열실앞에는 커다랗게 어머
니상이 만들어져 있다. 비통한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파보는 자세이다. 학살돼 
숨져 불에 타버린 시체 속에서 아들을, 딸을 찾으려는 어머니의 심정을 묘사하
고 있었다. 그 어머니는 허공에 대고 무언가를 외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진
열실 안에는 당시의 관련 사진과 유물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일본군
이 죽이고 시신을 잘라 만두를 빚어먹었다는 어느 여자의 사진, 어린이들만이 
마치 돼지새끼처럼 죽어 나란히 누워있는 모습, 하루에 100명 이상을 죽이고
는 서로 누가 많이 죽였는가를 자랑하는 일본군 병사, 당시를 보도한 신문
들......학살, 인간의 광기, 짐승같은 야욕을 증언해주는 기록들이 2천백 평방
미터의 기념관건물 벽을 돌아가면서 가득 메우고 있었다.

   1937년 12월13일 일본군의 화력과 잘 훈련된 전투를 도저히 당할 수 없는 
중국군대가 철수해버리자 당시 중국의 수도 남경은 그야말로 민간인들과 총칼
을 빼앗긴 중국군 병사들만이 赤手空拳으로 남아있는 패전장이었다. 일본군 중
국파견군사령관 마쓰이(松井石根)대장의 휘하에 있는 제6사단의 다니(谷壽夫)
사단장은 그 전날까지 '양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준다'는  약속을 어기고 
미친듯한 살륙을 시작한다. 燕子磯 강변에 있던 5만 명의 피난민과 무장해제
된 병사들이 처음으로 기관총세례를 받아 피를 흘려 강물을 뻘겋게 물들이며 
강의 흐름까지를 막기 시작한 이래 14일 오후에는 남경성 주위의 주요 성문과 
열차역, 부두 등지가 선혈로 물들여지기 시작했다. 15일 오후에는 漢中門 일대
에서 1만 명,16일에는 화교초대소의 난민 5천명, 다른 데에서 수색해 잡혀온 3
천명의 비무장군인과 민간인들이 총에 맞아 죽고는 불에 태워졌다.
   12월17일 파견군의 마쓰이 사령관이 입성하면서 이른바 승리입성식이 벌어
졌고 그 다음날부터 살륙이 다시 시작돼 인근의 5개 부락에서 주민과 군인 등 
5만7천여 명이 처치됐다. 먼저 기관총을 쏘고 숨지지않은 사람들은 칼로 베
고, 그래도 남으면 기름을 부어 불질러버리고 시체는 양자강에 버려버린다.
  집단학살만이 아니라 개개 군인들이 살인유희를 즐기며 온 성내를 유린한
다. 일본군 준위 무카이(向井)는 동료인 노무라(野村)와 함께 먼저 100명을 죽
이는 자가 이긴다는 내기를 걸어 12월10일 紫金山 아래에서 만난다. 서로 몇 
명을 죽였냐고 물으니까  노무라는 105명이라 하고 무카이는 106명이라 한다. 
결국 내기는 무카이가 이겼다. 그러나 누가 100명을 먼저 죽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둘은 다시 누가 먼저 150명을 죽이는가를 내기를 한다. 당시
의 일본신문은 이 기사를 실으면서 득의에 찬 두 군인의 사진까지를 실었다.
  학살은 단순히 그냥 곱게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부녀자들의 강간과 
폭행을 동반한다는 데서 눈뜨고 보지 못할 참혹한 정경들이 곳곳에 펼쳐진다. 
일본군은 '일본에는 강간을 금지하는 법률이 없다. 강간은 일본군의 특허다'라
고 자랑하며 인간의 가장 더러운 본능을 있는 대로 발휘했다. 오죽하면 당시 
남경에 와 있던 나치스독일의 대사가 본국정부에 보낸 보고서 중에 일본군들
을 '짐승집단'이라고 표현했을까? 전쟁이 끝나고 세워진 국제법정에서는 엄밀
한 조사를 거쳐 남경에서의 학살자가 30만 명을 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남경대학살은 한꺼번에 가장 많이 죽인 기록일 뿐 그것이 전부는 아
니었다. 李香蘭이 12살 때인 1932년 9월16일 일본은 李香蘭이 자란 만주 撫順
市의 平頂山村에서 기관총과 장총을 난사해 3천 명을 죽였다. 오랫동안 함락되
지 않아 자기들이 피해를 입은 데 대한 분풀이였던 것이다. 물론 그 훨씬 전
인 1896년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군이 여순에 상륙해서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
함한 6만 명의 시민을 죽인 일도 있다. 1932년부터 1937년까지 2년 동안 동북
지방에서 일본에 대항한다는 이유로 6만7천 명을 죽였다. 1937년 11월4일부터 
12월12일까지 寧波, 上海, 杭州의 삼각지대일대에서 30만 명을 죽였다. 1943
년 5월 호남성 동정호에서 3만 명의 남녀주민을 죽였다. 산서성의 陽高縣등 7
개 현에서는 한 달동안 만6천 명이 죽었다. 1938년에서 39년 사이에 한 현에
서 4만 명이 죽었다. 하북성에서는 5만 명을 대소탕했다. 1937년부터 1945년까
지 하북, 산서, 중부 지방에서 일본군이 죽인 주민들은 300만 명이 넘는다. 
한 두 사람이 죽으면 신문에도 크게 나지만 무수한 사람을 죽이면 단순히 통계
숫자가 불어나는 데 그치는 것인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중국인 희생자는 3천만 명을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중국인들이 죽은 것을 '전쟁중이었으니까'라는 말로 넘어가 버
릴 수 있는 일인가? 과거 군인들의 광기어린 짓이었다고만 돌려 버릴 수 있을
까? 일본인인 李香蘭만은  일본군이 중국에 와서 무슨 짓을 했는지를 누구보다
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가노 법무상이나 시마무라 교육상은 일본
의 중국침략은 침략이 아니라 전쟁의 결과에 따른 용어상의, 개념상의 차이라
고만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남경대학살은 시민 속에 섞인 중국군 스파이를 찾
아 처단하는 행위였을 뿐 학살이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인가? 극악무도
한 만행이라는 나치독일의 유태인학살도 이처럼 광범위한, 무차별한, 무자비
한, 무도한 학살은 아니었다.


  1992년 10월 이향란은 중국정부의 초청으로  중국의 우수영화인과 작품에 대
해 시상하는 '金鷄''百花'영화제에 참석했다. 유명한 관광지 桂林에서 열린 
이 영화제에서 이향란은 중국 문화부의 劉德友부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과
거 저는 너무 나이가 어려서 일본 군국주의에 이용당해 옳지 않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오랫동안 이러한 심정을 표현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오늘 저
는 처음으로 정부의 관리가 앞에 있는 데서 정식으로 사죄를 표합니다."
   말을 미처 다 마치지도 못하고 이향란은 결국 울음범벅이 되고 말았다.

   비록 말을 다 마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당당했다. 그녀는 용기가 있었다. 
진정으로 고해성사를 하고 나면 속이 시원한 법이다. 이향란은 이 날 자신의 
잘못, 그것도 자신이 알고 한 것이 아니라 모르고 이용당한 것임에도 당당히 
사죄하고나서 3년뒤에는 자신의 조국,아직도 자기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를 모
르는 일본의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역할을 기꺼이 담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인이 아직도 소수에 머무르고 있다는 게 일본의 문제이
다. 남경의 대학살기념관에 20만이 넘는 일본인 참배객이 왔다가 갔다고 하지
만, 그들이 이곳에서 보고 느낀 일본의 죄악, 중국인들의 대일본 감정이 일본
에 돌아가면 스르르 녹아 없어져 버리는 듯한 느낌이다. 95년 5월 무라야마 총
리가 북경을 방문했을 때 2차대전의 시발지인 盧溝橋에서 일본의 과거 행위를 
사과했지만, 그 뒤 일본은 또 변했고 요즈음에는 세계 어디든 군대를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국내법을 고쳤다. 기회만 있으면 군대를 보내어 어디든지 출동할 
명분을 쌓고 있고, 미국은 자신들의 군사임무를 일본에 넘겨주기 위해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을 찬양하고 있다. 
    해마다 8월15일 오전 10시30분 태평양전쟁에서 죽은 246만명의 일본의 위
패가 안치돼 있는 일본 동경의 야스쿠니신사에서는 전몰자 추도집회가 열린
다. 이 집회는 <전후50주년 국민위원회>등 우익단체들이 주도하고 있다. 이들
은 말한다: '대동아전쟁은 일본제국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위한 전쟁이
었다.''용기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마무라 신임문부상처럼 말할 수밖에 없
을 것이다'.

    미국의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이 '일본의 방위청이 성으로 승격한다면 일
본이 유엔안전보장 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 되기 쉬울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외
신보도를 보면서 과연 미국이 일본의 이러한 역사와 그 속에 담겨있는 집단심
리를 알고 있을까? 과연 미국은 57년 전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과 맞서 싸우다
가 피를 흘린, 그리고 사이판과 오키나와에서 수많은 일본인들이 자살을 감행
한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의 후예가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역사의 교훈을 잘 잊어버리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아닌 것 같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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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whatishistory.com 역사기행 홈페이지, 이번호 칼럼중 이동식 님이 쓰신 
글을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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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