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4월 28일 일요일 오후 05시 29분 36초 제 목(Title): 조한욱/ 로버트 단턴의 역사세계 출처: 이머지 2002.3.1 -------------------------------------------------------------------------------- 연재 / 모든 분야, 모든 시각 21세기의 諸子百家를 찾아서 -<4> -------------------------------------------------------------------------------- 로버트 단턴의 역사 세계 조한욱 1. 개인적 이야기 미국의 텍사스 주립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의 막바지를 보내던 시절에 내가 가졌던 많지 않은 즐거움 중의 하나는 학교 주변의 서점들을 순례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의 후반에 속하는 어느 날 나는 한 중고책 서점의 역사책이 꽂힌 서가에서 《고양이 대학살The Great Cat Massacre》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중고책 서점이라 하지만 새 책도 간간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 규모는 웬만한 도서관에 맞먹을 정도로 컸다. 결코 역사책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제목이기에 탐정소설이 잘못 배치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책을 빼들었다. 몇 페이지를 읽으면서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나는 그 책을 사들고 서점에서 나왔다. 그 뒤 샅샅이 읽어 내려간 그 책에서 찾은 흥미는 추리소설에서 얻는 것과는 종류가 달랐지만, 그에 못지 않게 진진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 책은 흥미에 더해 역사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내게 전달해주며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 흥미와 감동을 잊지 못해 책을 번역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면서 그 책의 저자인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에게 편지를 보내야 할 일이 생겼다. 판권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의 출판계 사정을 감안해달라는 문학과지성사의 부탁을 그에게 전해야 했던 것이다. 1996년 3월 25일 나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저는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의 교수로서 서양사의 여러 강좌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1980년대를 오스틴Austin에 위치한 텍사스 주립대학교에서 공부하며 보냈습니다. 그 수련기간에 저는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하였고, 그 속에 담긴 모든 것에 매료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 특강을 위해 오스틴을 방문하셨을 때 저는 청중 속에 있었습니다. 특강도 매력 그 자체였으며, 저는 그때 당신의 책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알려야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학위 논문을 마친 뒤 저는 한국교원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야 나의 소원을 실현시킬 위치에 서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당신의 책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의미를 만들어줄 수 있도록 번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저는 그 과업을 거의 마무리짓는 단계에 있으며, 당연히 이 책의 출판에 관심이 있는 출판사를 접촉했습니다. "세상 물정에 밝아지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으로서, 저는 제가 하고있는 일이 끝나기만 한다면 책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한국의 출판사 중에서도 특히 역사책을 취급하는 출판사는 곤경을 맞고 있습니다. 역사책의 시장은 아주 제한되어 있고, 따라서 출판업자들은 만일 《고양이 대학살》의 판권이 지나치게 높을 경우 출판을 포기해야 한다고 제게 알려줬습니다. 이 책이 아직도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러한 상황에 대한 하나의 증거입니다. 제가 접촉한 문학과지성사는 양심적이고 안정된 출판사이지만, 그들 역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책이 좋다면 시장의 조건에 맞지 않더라도 그들은 출판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국의 독서 대중이 당신의 목소리를 듣기 원합니다. 극동지역의 미래 독자들에게 당신의 사상을 전달함에 걸림돌이 될 장애물의 일부를 교수님께서 제거해 주신다면 저는 최선을 다해 당신의 섬세한 언어의 가장 미묘한 부분까지도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신속하게 답장을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답장은 신속하게 오지 않았다. 약간의 서운함과 함께 세계적인 학자는 역시 바쁜가 보구나 하고 생각하며 체념하고 있던 차에 4월 말에 다음과 같이 대단히 호의적이고 친절한 편지를 받았다. 당신의 대단히 친절한 편지는 프린스턴Princeton으로부터 이곳 옥스퍼드Oxford로 전달되어 방금 도착했습니다. 나는 《고양이 대학살》을 기꺼이 번역하겠다는 당신의 의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것이 어려운 작업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책을 한국의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만들려는 당신의 노력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한국어 판이 나올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꺼이 하려 합니다. 거기에는 내 몫의 저작권 사용료를 모두 포기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 책은 원래 베이직 출판사Basic Books에서 출판되었다가 지금은 판권이 하퍼 콜린스Harper Collins로 넘어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번 학기에 옥스퍼드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해 누구를 접촉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베이직에 이 편지의 사본을 보내 《고양이 대학살》의 판권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전해달라고 요청하겠습니다. 나는 한국 출판업계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판권을 절대적인 최저로 낮추어야 할 필요성과 내 몫의 저작권을 완전하게 포기하겠다는 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선수금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배려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문제는 출판사와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당신으로서는 베이직 출판사의 외국 판권 담당자에게 편지를 보내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어떤 배려가 있을 것입니다. 모든 어려움을 무릅쓴 당신에게 감사드리며, 당신 자신의 작업이 훌륭한 결실을 맺기 바랍니다. 결국 문학과지성사에서는 판권에 관한 모든 것을 위임하겠다는 미국 출판사의 대답을 듣게 되었다. "판권 문제가 이렇게 쉽게 마무리된 적이 없었다"는 문지 측의 말을 들으며 나는 번역에 박차를 가했고, 책은 빛을 보게 되었다. 물론 로버트 단턴의 세심한 배려도 고마운 일이지만, 베이직과 같은 대출판사에서도 의견을 존중해야 할만큼 로버트 단턴의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확인한 일이기도 했다. 2. 로버트 단턴의 초기 저작들 로버트 단턴이 자상하게 신경 써준 것에 보답하기 위한 마음이 번역에 더 큰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는 자극이 되긴 했지만,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책을 번역하려는 근본적인 추진력은 그 책 자체가 역사학에 대해 갖는 신선한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단턴이 이 책을 통하여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중반 《뉴욕타임즈》에서 잠시 기자 생활을 하였던 그는 1968년에 프린스턴 대학교의 교수로 부임한 이래 1984년 《고양이 대학살》을 출판하기 전까지 《메스메리즘과 프랑스 계몽주의의 종말Mesmerism and the End of the Enlightenment in France》(1968), 《계몽주의의 사업: "백과전서" 출판의 역사The Business of Enlightenment: A Publishing History of the Encyclop die, l775-l800》(1979), 《舊체제의 지하문학 세계The Literary Underground of the Old Regime》(1982) 등 세 권의 책을 이미 내놓은 바 있었다. 이 책들은 계몽의 시대인 18세기를 다루고 있지만 18세기를 연구하는 당시의 주류 방식에서는 벗어나 있고, 그러한 성격은 《고양이 대학살》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메스메리즘》에서는 18세기의 계몽주의를 이끌었던 중요한 사상가를 다루고 있지 않다. 그 책에서 단턴은 '동물의 자기animal magnetism'가 있어 그 기운이 영속적인 흐름을 반복하고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의학에 적용시켰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츠 안톤 메스메르Franz Anton Mesmer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대상으로 삼아, 그 신비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요소가 계몽주의의 쇠퇴와 갖는 관련성을 추적하고 있다. 단턴은 1780년대 파리에서 Mesmer가 동물 속에 있는 자기에 의한 치료회를 열어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던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처럼 돈벌이가 되는 협잡이 사회 개혁의 희망을 구체적으로 만들며 대중화시켰다는 것으로서, 메스메리즘Mesmerism은 정부의 관변에서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에 반대하는 문단의 주변인들의 정치적 관심사와 결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이성적인 메스메리즘Mesmerism이 유행되며 환영을 받았다는 것은, 기존의 해석과는 달리 프랑스 혁명을 주도하게 될 급진주의 작가들의 사회 비판이 계몽적 이성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것에 근거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고 단턴은 논한다. 한편 《계몽주의의 사업》에서는 계몽사상의 집대성이라고 일컬어지는 《백과전서》를 연구의 주제로 삼았다. 그렇지만 그 내용을 다룬 것이 아니라, 사업의 측면에서 《백과전서》의 판매를 연구함으로써 대량의 인쇄 문화와 서적 유통의 역사가 대중의 여론을 형성함에 끼친 영향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것은 연구의 대상에 있어서는 종래의 사상사나 지성사와 다르지 않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확실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舊체제의 지하문학 세계》에서는 그러한 구분선을 한결 명확하게 하고 있다. 그 책의 첫머리에서 단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8세기 지성사를 꼭대기에서 본 관점은 너무도 자주, 너무도 훌륭하게 기술되어 왔기 때문에 이제는 새로운 방향을 타진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즉 계몽사상의 밑바닥에 도달하도록 시도하고 그 지하의 세계까지 침투하여, 최근에 프랑스 혁명이 연구되고 있는 것처럼 계몽사상도 '밑으로부터' 검토해봐야 하리라는 것이다. 지성사를 밑으로 끌어내린다는 것은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자료를 찾아, 철학적 논문에 대해 명상하는 대신에 문서보관소를 뒤져야 할 것을 요구한다." 바꾸어 말하면, 주도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계몽사상의 '고급' 문화가 밑으로 전달한 영향력이라기보다는 밑으로부터 만들어진 영향력이 프랑스 혁명 이전의 사회에서 작용하던 방식을 연구하고자 하는 의도를 확실하게 밝히면서, 그 의도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그 방법과 자료 역시 새로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책의 내용보다는 그 인쇄와 유통 과정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회사에서 주로 사용하는 통계적 방법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한 그를 종래의 사상사가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는 '관념의 사회사'를 실행하고 있는 역사가이다. 물론 그의 방식에 선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선례는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Les Origines intellectuelles de la R volution fran aise 1715∼1787》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다니엘 모르네Daniel Mornet에게서 찾을 수 있다. 모르네는 단지 '18세기에 프랑스 사람들은 무엇을 읽었는가'를 질문함으로써 계몽사상이 실지로 프랑스 혁명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지 밝히려 했다. Mornet는 그 질문에 대해 1750년부터 1780년 사이에 경매를 위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이는 사설 도서관의 카탈로그 500여 개에 수록된 책제목의 숫자를 셈으로써 하나의 대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사회계약론Contrat Social》은 단 한 부만 발견되었고, 계몽사상가들의 위대한 저작은 그 비율이 놀라울 정도로 낮음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그라피니 부인Mme. de Graffigny, 리코비니 부인Mme. de Ricobini 등등 이제는 이름이 잊혀진 사람들의 저작이 그 서가를 채우고 있었다. Daniel Mornet의 이러한 발견은 계몽사상을 받쳐주던 버팀목 몇 개를 제거시킨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급의 계몽사상가들보다는 이류급, 삼류급의 작가들이 더 많은 독자층을 확보했다는 것은 계몽사상의 중요성을 삭감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 주장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쨌든 Mornet는 계몽사상과 프랑스 혁명의 관계에 대해 논하려는 역사가라면 반드시 직시해야 할 문제점들을 제기한 것이었다. 그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다. 구체제 문필 문화의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가? 18세기에 책을 생산하던 사람들은 누구였으며 읽는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의 직업은 무엇이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 주어지기 전에는 계몽사상의 문화적, 사회적 맥락 위상을 논할 수 없으며, 그것은 전통적인 연구 방법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舊체제의 지하문학 세계》는 바로 그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단턴은 오늘날 역사학계의 성과를 받아들여 Mornet가 내렸던 결론의 일부를 수정하고 있다. 예컨대, 《에밀Emile》의 제5권에 《사회계약론》의 내용이 훨씬 이해하기 쉽게 제시되어 있어 대중들이 굳이 《사회계약론》을 읽을 필요가 없었으며, Mornet가 제시한 카탈로그에 있는 《루소 전집》에 《사회계약론》이 포함되어 있어 그 책이 단 한 권밖에 없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며, Mornet는 많은 판본이 쏟아져 나온 구체제의 마지막 10년 동안을 연구 대상에서 제외했기 때문에 그의 자료는 결함을 갖고 있다는 여러 근거에서 Mornet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계몽사상가 루소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舊체제의 지하문학 세계》는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이 남겨놓은 틈새를 메우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틈새를 메우기 위해 단턴은 단순히 통계 자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한 텍스트 분석이나 상징의 해석도 함께 시행하고 있다. 이 책이 1983년 미국 최우수 도서상의 후보에 올랐던 사실은 책의 출판과 관련된 문학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실존의 모습들을 포괄적으로 그려내려 한 새로운 시도에 주어진 합당한 평가일 것이다. 3. 새로운 역사학으로서 《고양이 대학살》 그러나 정작 역사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학자로서 단턴의 모습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저작은 《고양이 대학살》이다. 《舊체제의 지하문학 세계》에서 "계몽사상의 밑바닥"과 그 "지하의 세계"까지 침투하려고 한 시도가 아무리 참신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고양이 대학살》에서 "계몽사상의 시대에 계몽되지 못했던 사람들의 정신 세계"까지 되찾으려던 노력이 갖는 선구적인 전망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이류급, 삼류급 작가들의 밑바닥 세계를 넘어 이 책에서는 대다수가 문맹이었던 농민과 노동자들이 18세기의 프랑스에서 생각하며 살아가던 방식을 복원시키려는 시도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여섯 편의 논문으로 구성된 이 책은 발간되었던 1984년에 《LA 타임즈》 선정 역사학 부문 최우수도서상을 받는 등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 논문들은 18세기의 프랑스라는 시간적, 공간적 공통점 이외에는 각기 동떨어진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농민들의 민담, 파리의 한 인쇄소에서 벌여졌던 고양이 죽이기 소동, 몽펠리에Montpellier市의 한 부르주아 주민이 쓴 도시 설명서, 서적 검열 담당 경찰 수사관의 조서, 《백과전서》의 서문, 한 시민의 서적 주문서 등등 역사책을 쓰기 위한 좋은 문서라고 볼 수 없는 자료를 이용하여 쓴 여섯 편의 글들은 서로간에 연관성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그 내막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 논문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서로를 보충하거나 혹은 한 사물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 글들은 하나의 책을 이루기에 충분한 일관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제1장의 농민들의 민담과 제2장의 직공들의 이야기는 도시와 농촌 모두에서 밑바닥 층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던가를 말해준다. 농민들의 민담과 직공들이 전래의 관습을 이용하여 고양이 죽이기 소동을 벌이고 그것을 "복사"라는 이름으로 흉내를 내며 즐거워했던 사실은 어떻게 혁명까지 이르지 않으면서도 '작은 사람들'이 '큰 사람들'에 대해 저항할 방편을 제공하였는가를 보여준다. 한편 제3장의 부르주아는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해 정반대의 관점에서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다. 스스로 귀족층에 편입하는 것은 열망하면서도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의 경계를 침투하던 것에 대해서는 위협을 느끼고 경계하던 평범한 부르주아의 모습에서 우리는 제2장의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에 대해 느꼈던 반감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만족스럽게 자신의 도시에 애착을 느끼며 Montpellier의 안내서를 서술하였던 그 부르주아의 여망은 현상 유지에 있었을 것이다. 제4장의 주인공으로서 서적과 저자들을 감시하던 경찰 수사관의 목표도 종교와 왕정에 위협이 될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왕국을 지탱시키려는 현상 유지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보던 바의 세계는 제3장의 부르주아가 보던 것과는 달리 모호한 정신의 영토에 있었고 명확한 정체도 파악할 수 없는 지식인의 세계였다. 그 경찰 수사관은 '지식인'이라는 단어에 대한 개념도 정의도 갖지 않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시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 한 계층으로 그들이 서서히 등장하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것이 지식인들에 대한 외부의 관점이었다면, 제5장에서는 지식인들 내부에서 그들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던 자신들의 사명감과 역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백과전서》의 서문과 지식의 나무에 대한 정교한 분석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경찰 수사관에게 지식인들의 정체가 아무리 모호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와 디드로Denis Diderot 같은 계몽사상가들에게 있어서 지식인들의 역할이란 군주제의 이론적 존립 근거를 제공한 기존의 계시 종교의 악폐를 일소하는 진보적인 추진력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당위였고, 그들은 그 목적을 위하여 때로는 모순적으로 보이는 모든 논리를 동원하였다. 제6장에서는 한 시민이 남겼던 서적 주문서의 분석을 통하여 독자들이 루소에 대해 반응하던 방식을 설명한다. 전반적으로 그것은 책을 통하여 저자와 지식인들의 영향력이 사회 전체에 점차 크게 자리잡던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제5장과 제6장은 맥락을 같이하고 있지만 그 접근 방식에서는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 즉 제5장이 이른바 텍스트 분석을 통하여 텍스트의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의 통일성을 찾으려고 시도하였다면, 제6장은 그 텍스트를 독자들이 어떻게 읽었는가를 추적하여 그 의미가 어떤 방식으로 다양하게 전달되었는가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여섯 편의 논문들은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유기적인 관련을 맺으며 18세기 프랑스의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이제 제2장의 고양이 죽이기 소동을 예로 들어 단턴의 접근 방식이 왜 새로운 종류의 역사학인지 이야기해보자. 1730년대 파리의 한 인쇄소에서 벌어졌던 고양이 때려잡기 소동을 니콜라 콩타Nicolas Contat라는 인물이 기록으로 남겼고, 단턴은 그것을 입구로 하여 18세기 노동자들의 정신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먼저 그 소동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자. 기록자인 콩타 자신을 허구화한 인물로 보이는 제롬과 레베이예라는 두 명의 견습공은 고된 삶을 살았다. 그들은 더럽고 추운 방에서 잤고, 학대를 받으면서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들은 고양이에게 주어도 거절당하는 음식을 먹어야 했다. 주인들에게 환대 받던 고양이들은 밤이면 견습공들의 침실 지붕 위에서 울어대 그나마 부족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이 견습공들은 복수를 모의했다. 흉내를 잘 내는 레베이예가 주인의 침실 지붕 위로 올라가 고양이 울음을 흉내냈다. 며칠 동안 이런 처사에 시달리며 잠을 자지 못하던 주인은 마침내 고양이를 죽이라고 견습공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단 여주인이 총애하던 고양이인 그리스만은 놀라지 않게 하라는 당부를 곁들였다. 그러나 견습공들은 그리스부터 시작하여 모든 고양이들을 때려잡고, 모의재판을 벌이며 고양이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소동을 안 여주인이 나와 보고 기겁을 했다. 직공들은 주인집에 대한 존경심이 너무 커서 그리스에게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뒤늦게 나온 주인은 단지 직공들이 일을 하지 않는 것에 화를 냈다. 여주인은 단순한 태업 정도가 아니라 주인집과 여주인에 대한 모욕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주인에게 설명할 방도가 없다. 주인과 여주인은 물러가고, 그들은 남아서 무질서와 환희 속에 즐겼다. 그 뒤에도 인쇄공들은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마다 이 모든 장면을 "복사"라고 불렀던 무언극으로 재생했다. 그리고 그 때마다 그들은 환희에 빠져들었다. 단턴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이 소동에 대한 기록을 통해 18세기 노동자들의 의식을 복구시키려 했다. 그의 시도가 어떤 점에서 새로운 종류의 역사학을 구현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간략하게라도 그가 극복하려고 혹은 해체하려 했던 전통적인 역사학의 모습을 살피고 대조해 보아야 한다. 객관적인 사실의 세계를 전문적으로 탐구해야 할 필요성과 방법론을 확립시킴으로써 역사학의 이론적 기반을 확립시켰던 사람들은 19세기의 역사주의자들이었다. 랑케Leopold von Ranke,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 리케르트Heinrich Rickert, 딜타이Wilhelm Dilthey 등 역사주의의 확립에 공헌한 역사가나 역사철학자들은 주지하듯 방법·목적·대상 등에 있어서 역사학의 고유성을 논리적으로 확립시킴으로써 역사학을 학문의 한 분야로서 존경받을 만한 위치로 격상시킴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랑케는 사실의 객관적 탐구라는 원리를 정립하여 역사학에 실증적인 방법을 정착시켰다. 역사가의 임무란 사실을 "과거에 있었던 그대로" 기록함으로써 "사실이 제 스스로 말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말은 가장 유명한 Ranke의 말이다. 랑케가 그 말을 했던 이유는 모든 시대가 신의 입장에서는 동등하고 따라서 인간의 지혜로서 어떤 판단을 내릴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모든 시대는 신에 직결"되어 있고, 각 시대는 "영원으로부터 같은 거리"로 떨어져 있다. 각 시대는 그 자체의 독자적인 가치와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서 있는 그대로 파악되어야 한다. 역사가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판단은 여기에 개입되지 말아야 한다. 그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엄정한 사료의 비판에 근거하여 원 史料를 엄밀하게 연구하는 것이다. 역사가는 사료의 진위를 가리고, 그 내용의 신뢰도를 측정한 다음 자신의 감정이나 신념 같은 것들을 소거하여 개별적인 과거의 사실에 도달해야 한다. 그런 한편, 그 개체에 대한 사랑이 단편적인 사실들을 무의미하게 쌓아놓은 것에 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역사가는 "보편을 향해 눈을 열고 있어야 한다." 랑케는 "특수한 것으로부터 보편적인 것으로 나갈 수 있고, 보편적인 이론으로부터는 특수한 것을 볼 수 있는 길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개별적 사실들을 인과적 연관성에 의해 파악하여 그것으로부터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질서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방식으로 역사학은 Ranke에 의해 과학성을 얻게 되었다. Ranke의 이런 생각은 그의 국가관에 반영되고 있다. 그는 각 국가마다 고유의 특징과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므로, 독일이 프랑스식의 혁명 이념을 받아들이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독일의 특색을 다원주의에서 찾으며 "각 민족은 그 자신의 고유한 정치를 갖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독일인의 과제는 독일 민족 정신과 일치하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그는 독일이 갖는 지방분권적인 성격을 옹호하긴 했지만, 그것을 국가의 권력보다 앞세우지는 않았다. 단적으로 Ranke와 그의 후계자들은 국민국가의 역사가 연구의 중심 대상이라고 확신했다. Ranke의 사학은 19세기 후반에 막강한 파급 효과를 지니며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으로 전파되었다. 많은 역사가들이 "과거에 있었던 그대로"를 되뇌며 과학화된 역사학의 규범을 따르려 했다. 사료 비판을 위한 세미나의 방식은 여러 나라의 대학원에서 정규적인 수업법으로 채택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국가'가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비록 이념적, 학문적 진영이 다르다 할지라도 국가가 역사 속에서 갖는 역할이 역사학의 중요 주제로 부각된 것이다. 민족주의 사학이 역사 속에서 민족국가의 표상을 찾고자 했던 것에 못지 않게, 실증주의 사학은 실증의 이름 아래 외교사와 정치사에서 국가 권력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 주력했다.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며 줄여 말해, 랑케에 따르면 역사학이란 '객관적 진리'를 찾는 학문이며, 그 방법에 있어서는 제도화된 규범을 따라야 하며, 그것을 통해 연구해야 하는 것은 '국가'와 같은 거대한 체제에 대한 '보편사'라는 것이다. 단턴은 Ranke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학에 대한 정의의 대부분을 전도시키고 있다. 먼저 단턴은 '제롬'과 '레베이예'라는 실명을 가진 노동자들을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국가는 물론이거니와 국왕이나 위대한 정치가를 통해 보편사를 쓰는 것을 목표했던 랑케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우연히 우리에게 이름이 남겨진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권력 구조나 지배 관계를 살피려고 한 이 시도는 이른바 소우주를 통해 대우주를 엿보려 하는 '微時史'의 대표적인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 대상의 설정은 계속 문제를 발생시킨다. 일회적이고 별로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 이 소동을 통해 어떻게 노동자들의 문화로 침투한다는 말인가? 여기에서 단턴은 역사학의 제도화된 규범을 넘어 민속학, 인류학, 문학비평 등 인접 학문에서 자유로이 도움을 요청한다. 그는 사회사가들이 꼼꼼하게 복원시켰던 인쇄공들의 생활상은 물론 민속학자들이 밝혀놓은 민속 속에서 대중의례와 고양이가 갖는 의미를 고양이 죽이기 소동의 배경으로, 즉 컨텍스트로 설명하면서 그 틀 속에 인쇄소에서의 소동을 위치시킨다. 이것은 상징인류학자인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가 말하는 '두꺼운 묘사thick description'의 뛰어난 예이다. 이를테면, 고양이를 비롯한 짐승을 학대하는 행위는 유럽의 전역에 널리 퍼져있었고, 단턴이 말하는 고양이 죽이기 소동 역시 외견적으로는 그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껍데기(기표)에 담긴 내용(기의)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 두꺼운 의미의 층위로 파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상징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일회적인 그 소동은 문학비평가들이 말하듯 담론의 질서 속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일회적인 소동은 노동자들의 정신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훌륭하게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단턴은 원래의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읽기를 시작한다. 왜냐하면 컨텍스트에 대한 지식을 얻고 난 다음에 읽는 텍스트는 새로운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렇게 텍스트와 컨텍스트 사이에 일종의 변증법이 이루어지며, 텍스트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달라진다. 단지 문학적인 표현에 불과하리라고 여겼던 '마녀' '사바트'와 같은 단어들은 물론, 노동자들이 고양이에게 가했던 모의재판과 같은 것들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다가오게 된다. 그리하여 단턴이 도달하게 된 결론에 따르면, 고양이 대학살이란 노동자들의 주인에 대한 상징적인 공격이었다는 것이다. 즉, 노동자들은 고양이 죽이기라는 정교한 의식을 통하여 주인들을 조롱하고 비난하였으며 유죄라고 판결하였다는 것이다. 그 죄란 주인들이 인쇄업 초기의 목가적인 '공화국'을 떠나 다른 세계로 물러가면서 인쇄소의 직공들을 혹사시켰다는 죄이다. 궁극적으로 단턴은 그 소동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객관적 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턴 스스로가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또 하나의 허구fiction일 것이다. 그는 각 논문마다 그가 해석한 텍스트를 부록으로 첨부하였다. 그 목적은 "독자들이 나름대로 해석하여 나와 견해를 달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렇듯 단턴은 문학적 방식을 통한 접근이 역사학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나름의 방식으로 입증하고 있다. 이렇듯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은 19세기 이래로 역사학이 안주해왔던 규범을 하나하나 해체시키며 새로운 역사학의 한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그에 더해 단턴의 시도가 갖는 의미는 역사학의 자료를 확대시키고 그 서술의 방식을 문학적으로 실험할 토양을 마련하여 역사서술이 풍요롭고 다양하고 흥미로워질 수 있는 하나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4. 논쟁과 학문 공동체 새로운 시도에는 언제나 비판이 뒤따른다. 그것은 새로운 시도에 대한 기존 전통의 반발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새로운 만큼 허점이 많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고양이 대학살》이 출간된 다음 해인 1985년 미국의 시카고 대학교에서 발간한 《현대사 잡지Journal of Modern History》에는 '역사가들 중에서 이론적으로 가장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로제 샤르티에Roger Chartier의 신랄한 비판이 실렸다. 그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현대사 잡지》는 몇 년에 걸쳐 《고양이 대학살》과 관련된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1986년에는 Chartier의 비판에 대한 로버트 단턴의 반박 논문이 실렸고, 1988년에는 커넬 대학교의 도미니크 라카프라Dominick LaCapra와 시카고 대학교의 제임스 페르난데즈James Fernandez가 각기 그 논쟁에 대한 장문의 논평을 기고했다. Chartier는 단턴이 프랑스 역사학계의 경향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제시하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단턴의 해석이 갖는 문제점을 장황하게 열거하였다. Chartier의 여러 비판 중 본고에서 예를 든 제2장과 관련된 부분은 다음과 같이 압축될 수 있다. '단턴은 고양이 죽이기가 부르주아에 대한 상징적 공격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는 상징은 엄밀하게 개념 정의가 내려지지 않았다. 그는 Clifford Geertz를 따라 "개념 전달의 수단이 되는 모든 물체, 행위, 사건, 특성, 혹은 관계"라고 규정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포괄적인 정의라서 오히려 효용성이 의심된다. 더구나 18세기 초 프랑스에서 발간된 앙투안 푸르티에르Antoine Furti re사전을 보더라도, 표상representation을 포함하는 상징symbol은 단순한 기호sign와는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상징의 개념을 엄밀하게 사용해야 한다. 상징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며, 따라서 그 의미는 그 전달의 과정에서 多重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턴은 18세기 초 파리에 일관성이 있고, 폭넓은 공감대를 갖고 있는 통일적인 상징 체계에 의해 규정되는 인쇄공의 문화가 존재한다고 상정했다. 18세기 프랑스 사회는 연령, 성별, 지위, 직업, 종교, 주거지역 등등에 따라 단턴의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하게 분기된 복잡한 사회였다.' 궁극적으로 Chartier의 비판은 단턴이 Nicolas Contat가 남긴 기록을 투명한 텍스트로 생각하면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으로서, 그 글을 남길 때 집필자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는지 동시대인의 입장에서 더 심도 깊게 파악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단턴은 Chartier의 상징 개념을 문제 삼는다. Chartier가 상정하는 상징이란 18세기의 Antoine Furti re사전에서 제시한 "사자는 용감성의 상징이다"라는 예에서 보이는 것처럼 기표와 기의 사이의 직접적인 "표상의 대응관계"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턴은 지적인 엘리트에 의해 단어에 부여된 의미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18세기의 사전이 유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문맹의 노동자들 사이에 퍼져있던 상징의 개념을 알기 위한 "원주민 정보제공자"의 역할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단턴은 Chartier의 논지를 조목조목 반박한다기보다는 역사 속에서 상징이 이용된 여러 경우를 열거함과 동시에 고양이 죽이기 소동의 기록을 다시 검토하고 해석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가 도달한 결론은 상징에는 다중성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징을 이용하는 儀式은 이미 정해져 내재화된 제약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식의 행위들은 고정된 유형은 물론 이미 정해진 범위의 의미를 따른다. 그러나 모든 참가자들이 의식에서 모든 의미를 모두 똑같이 얻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가 하는 일은 그 의미의 범위를 탐색하고,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그 의식을 이용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더라도 가능한 한 정확하게 그 범위의 윤곽을 그리는 것이다. 상징의 개념이 모호하다는 Chartier의 비판에 대해 단턴의 오히려 그 상징의 의미는 확실하다고 대응한다. 그러한 반박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단턴이 예로 들고 있는 역사 속의 상징적 요소까지 찾아볼 필요도 없다. 단턴은 Chartier에 대한 반박 논평의 초두에서 그가 보았던 조그만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 도서관 C층 구석의 개인 독방 문 앞에 "피지 $499"라는 신문의 광고 문안이 붙은 것을 보았다. 그것은 기호이다. 그 내용은 피지까지 왕복 비행기 요금이 499달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상징적 의미는 다르다. 그것은 한겨울 도서관의 폐쇄된 개인 독방에서 논문을 쓰며 골머리를 앓고 있는 학생이 "나는 이곳으로부터 탈출하고 싶다. 공기, 태양, 더 많은 빛을 다오!"라고 외치고 있는 농담처럼 보인다. 다른 여러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독방이란 학생이 논문을 쓰기 위해 오랜 시간에 걸쳐 고투하는 장소이며 프린스턴의 겨울은 축축한 수의처럼 학생들에게 드리워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 그 광고 문안의 상징적 의미는 명백하다. 이렇듯 신랄하게 서로의 논지를 논박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단턴과 Chartier는 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 둘은 절친한 친구이자 학문적인 동료이다. 단턴은 Chartier가 재직하고 있는 사회과학고등연구소EHESS에 세 차례에 걸쳐 객원교수로 초빙되었으며, Chartier가 편집한 여러 책에 논문을 기고하기도 하였고, 그 둘은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와 함께 문화사의 전망을 논하는 대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논쟁을 통하여 상대방의 장점을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논지를 더욱 세련되고 강력하게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동일한 학문 공동체에 속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그런 풍토는 못내 아쉬울 수밖에 없다. 5. 경계를 넘나드는 로버트 단턴 로버트 단턴은 여러 가지로 경계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미국 태생으로서 1968년 이래 프린스턴 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그는 한 나라의 울타리를 넘어서, 학문의 국제화를 개인 속에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71년 파리의 사회과학고등연구소 객원교수로 유럽에 상주하였던 것을 시작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는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지의 연구소나 대학교에서 연구 책임자나 학술지의 편집인, 혹은 객원교수와 명예교수로 활약하며 유럽에 머물렀던 기간이 미국에서 활동하던 시간보다 더 길었다. 그것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서적과 서적유통이 갖는 의미를 주요 연구 대상으로 하였던 그의 저서들이 다소간 협소하게 보이는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경을 초월하는 공감을 얻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가 명망 높은 "국제18세기학회International Society for Eighteenth-Century Studies"에서 1983년부터 1987년까지는 부회장을 1987년부터 1991년까지는 회장을 역임하였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는 다니엘 로슈Daniel Roche, 미셸 보벨Michel Vovelle 등의 프랑스 역사가들과 책을 공동으로 편집하거나 집필하기도 하였으며, 유럽 여러 나라에서 발간되는 학술지의 편집진에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11개국 언어로 번역된 《고양이 대학살》을 필두로 그의 책들은 여러 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되어 있다. 그는 주로 영어로 글을 쓰지만 불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등으로 씌어진 그의 책이나 논문의 일부가 아직도 영어로 번역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를 단순히 미국의 프랑스사가로 간주할 수만은 없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그는 역사학 내부의 영역들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앞서 소개한 초기의 저작으로 출발하여 《고양이 대학살》을 거쳐 《라무레트의 키스The Kiss of Lamourette: Reflections in Cultural History》(1990), 《출판과 선동: 18세기 비밀 문학의 세계Edition et s dition: L'Univers de la litt rature clandestine au XVIIIe si cle》(1991), 《혁명 이전 프랑스의 금서 베스트셀러The Forbidden Bestsellers of Pre-Revolutionary France》(1995), 《프랑스 비밀문학 대계The Corpus of Clandestine Literature in France 1769∼1989》(1995) 등에 이르기까지 그의 주요 저서들에 관통하고 있는 주제가 있다. 그것은 '관념의 사회사'라고 말할 수 있다. 지식의 보고인 책을 대상으로 설정한 그의 연구는 전통적인 사상사나 관념사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의 내용보다는 대량 인쇄의 문화와 서적 유통의 역사가 대중의 여론을 형성함에 끼친 영향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회사에서 주로 사용하는 통계적 방법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있는 그를 종래의 사상사가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는 '관념의 사회사'를 실행하고 있는 역사가이다. 그의 접근 방법을 통해 계몽 사상의 고급 문화가 '밑으로' 전달한 영향력뿐만 아니라 '밑에서' 만들어진 영향력이 프랑스 혁명 이전의 사회에 작용하던 방식이 연구될 수 있는 한 통로가 뚫리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학의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그에게 있어서 연구 대상 사이의 경계도 모호하게 만들었다. '밑에서' 만들어진 영향력도 '밑으로' 전달된 영향력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라면, 새롭게 부각되어야 할 연구의 대상은 민중의 삶과 그들이 영향력을 만들어가던 방식임이 확실하다. 이리하여 단턴은 《고양이 대학살》에서 밑바닥에 사는 사람들도 "철학자만큼이나 지성적일 수 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농민과 노동자가 어떻게 그들에게 전승된 문화를 전유하며 외부의 세계에 대처하였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민중의 문화가 귀족들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던 길도 있었음을 논증함으로써, 고급문화와 민중문화의 구분도 임의적일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더구나 같은 책 속에서 그는 '백과전서파'로 대변되는 계몽사상가들이 《백과전서》의 집필을 통해 기존의 체제를 변혁시키려던 방식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민중들의 사유체계와 사상가들의 정신세계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은밀히 보여주려 하고 있다. 그것은 《혁명 이전 프랑스의 금서 베스트셀러》에서 그가 밝힌 바, 금서는 여론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사건의 의미는 철학자들의 저작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의사 소통망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결론과 유사하다. 그러나 민중의 정신세계를 복원시킨다는 작업은 그들에 의한, 그들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다는 이유에서 실제적인 난관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단턴은 인접 학문 분야에서 도움 얻기를 꺼리지 않는다. 그 결과 단턴은 역사학과 타학문 사이의 경계까지도 흐리게 만들고 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의 선배이자 동료 교수인 Clifford Geertz로부터 배운 상징인류학의 방법이나 민속학의 방법을 거리낌없이 사용하여 농민들의 민담이나 노동자들의 고양이 죽이기 소동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두껍게' 캐내고 있고,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로부터 얻은 영감을 이용하여 달랑베르의 글을 분석하기도 하며, 문학비평의 이론을 원용하여 텍스트와 컨텍스트 사이를 오가며 사소한 역사적 자료로부터 중대한 의미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최근 그의 연구 작업이 포르노그라피를 비롯한 금서와 그것의 검열에 관계되는 문제들에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은 지식/권력/담론 사이의 불가분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현금 인문학계의 전반적인 동향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97년 그가 미국 역사학회의 회장으로 피선된 것은 그러한 선구적 업적에 대한 정당한 평가일 것이다. 그의 경계 흐리기 작업은 하나의 중심적인 논리, 혹은 거대한 논리를 무너뜨리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 전략과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위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을 서술 대상으로 삼고,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오만한 자세를 유지했던 역사학이 다른 학문으로부터 기꺼이 배워야 한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보인 그의 태도는 종래의 역사학과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것은 린 헌트Lynn Hunt,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 카를로 진즈부르그Carlo Ginzburg 등 이른바 '新문화사'의 주창자들이 내세우는 논지와도 일치하고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의 여러 층위를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그들의 시도가 궁극적인 성공을 거둘지 아직은 예측하기 이르지만, 그들로 인하여 이미 역사학이 풍요롭고 흥미로워졌다는 사실은 그 전도가 유망함을 가리키고 있다. 3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일관적인 주제를 천착하며 역사가로서 중요한 업적을 쌓고 명성을 올린 로버트 단턴은 행복한 학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책이라는 매체를 통한 의사 소통의 구조'라는 그가 선택하였던 연구 주제가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서 지속력을 가지며 새로운 의미를 계속 창출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보의 시대'라고 일컫는 오늘날 그러한 역사가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 단턴은 미국 역사학회의 회장으로서 2000년에 행한 연례 연설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새로운 세기에 역사학이 나아가야 할 바를 진지하게 고려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경청해야 할 것이다. 2000년의 문간에 서니 새로운 밀레니엄의 길은 실리콘 밸리를 통과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정보의 시대에 돌입하였고, 미래는 미디어에 의해 결정될 것처럼 보입니다. 실지로 어떤 사람들은 현대 세계의 추진력으로서 의사소통의 양식이 생산 양식을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하곤 합니다. 저는 그 관점을 논박하고 싶습니다. 그 주장은 예언으로서 가치를 가질지는 몰라도 역사로서 작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늘날이 과거와 결별하고 있다는 그럴싸해 보이는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모든 시대가 나름의 방식을 갖고 있는 정보의 시대였으며, 그 의사 소통의 체계가 언제나 사건을 결정해왔다고 주장합니다. --------------------------------------------------------------------------------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 1939년 뉴욕 출생. 필립스 아카데미와 하버드대학교를 거쳐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이후 2년간 《뉴욕타임즈》의 리포터로 활동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연구와 강의를 했으며, 현재 프린스턴대학교 유럽 역사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 대학교 유럽문화연구프로그램의 책임을 맡고 있기도 하다. 다음과 같은 저서들이 있다. 《Mesmerism and the End of the Enlightenment in France》 《The Business of Enlightenment: A Publishing History of the Encyclopedie, l775∼l800》 《The Literary Underground of the Old Regime》 《The Great Cat Massacre and Other Episodes in French Cultural History》 《Revolution in Print: the Press in France l775∼l800》 《The Kiss of Lamourette: Reflections in Cultural History》 《The Forbidden Best-Sellers of Prerevolutionary France》 《The Corpus of Clandestine Literature in France, 1769∼1789》 《Denkende Wollust》 《George Washingtons Falsche Zahne oder Noch Einmal: Was Ist Aufklarung?》 무우를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