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4월 28일 일요일 오후 05시 20분 38초 제 목(Title): 임지현/ 에드워드 사이드와 오리엔탈리즘 출처: 이머지 2001.11.1 -------------------------------------------------------------------------------- 연재 / 모든 분야, 모든 시각 21세기의 諸子百家를 찾아서 -<1> -------------------------------------------------------------------------------- 에드워드 사이드와 오리엔탈리즘 '동양'과 '서양' : 길들이기와 만들기 임지현 / 한양대 사학과 교수 III. 옥시덴탈리즘: '동양'의 '서양'만들기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그리고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이라는 사이드 자신의 정의에도 불구하고, 오리엔탈리즘이 타자화하는 것은 비단 식민지 민중만이 아니다. 자기 사회의 자본주의 근대문명에 적응하지 못하고 배제된 서양의 민중들 또한 오리엔탈리즘이 겨냥하는 또 다른 '타자화'의 대상이다. 예컨대 농업의 전통적 생활리듬 때문에 자본주의의 시간이나 공장노동의 규율에 적응하지 못하는 '게으르고 무능한' 노동자들, 근대 국가의 '국민화 전략'에서 배제된 여성들, 근대 자본주의 국가권력이 '비정상'이라고 못박은 모든 주변인들 또한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유럽의 시민들과 구분되는 유럽의 '타자들'이었다. '동양적 정체성'은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하여 근대 권력에 버림받은 서양의 주변인들에게 부여된 속성이었던 것이다. '상상의 지리'로서의 동양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다발은 이처럼 서양의 근대권력이 배제하고자 했던 내외의 요소들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은 요컨대 식민지뿐만 아니라 본국을 규율하기 위한 제국의 권력담론이었던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이 이처럼 식민지와 본국의 주민들을 동시에 규율하는 제국의 권력담론이었다면, 옥시덴탈리즘은 주변부의 권력담론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국 서양의 주민들을 사실상 배제한 채 주변부 자기 사회의 주민 길들이기라는 점에서, 옥시덴탈리즘의 '서양' 만들기는 오리엔탈리즘의 '동양'만들기와 차원을 달리 한다. 즉 그것은 '서양'에 대한 '동양'의 우위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서양'에 대한 '동양'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뒷받침할 만한 물적 토대가 없는 허약한 담론에 불과한 것이다. 제국식민지 관계가 역전되지 않는 한, 서양에 대한 '동양'의 문화적 헤게모니는 불가능한 꿈이다. 따라서 옥시덴탈리즘이 만들어낸 '서양'은 궁극적으로 타자화된 '서양'을 반면교사로 자기 사회내부의 민중을 규율화하고 지배하려는 주변부 엘리트들의 상상력에 의해 연역된 것이다. 서양 문명의 기원을 아프리카의 독창성에서 찾는 '아프리카 중심주의'나 '세계의 시골'을 구성하는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가 서양 제국주의 도시들을 포위하여 승리한다는 도식의 '마오쩌둥주의'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그러나 문제는 '서양'에 대한 '동양'의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 고안된 옥시덴탈리즘이 그 출발에서부터 이미 오리엔탈리즘의 유럽중심적 담론의 헤게모니에 포섭되어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다. '주어'와 '술어'만 바뀌었을 뿐, 옥시덴탈리즘의 이데올로기적 기술이나 담론전략은 오리엔탈리즘과 지나치게 닮은 꼴이다. 이 점에서 옥시덴탈리즘은 오리엔탈리즘의 의붓자식이다. 버널Martin Bernal의 《검은 아테네: 고전문명의 아시아적 뿌리Black Athena》(1987)에서 보듯이, 고대 그리스 문명이 아프리카에서 비롯되었다는 식의 아프리카 중심주의는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진정한 거부나 대안이라기보다는 단순한 반작용일 뿐이다. 우선 고대 이집트 문명이 현대 아프리카와 연결될 지도 의문이지만, 더 큰 문제는 유럽중심주의의 큰 틀 속에 갇혀있는 아프리카 중심주의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단지 유럽의 역사적 기억을 아프리카의 역사적 기억으로 탈바꿈했을 뿐, 이미 '서양'의 고전·고대를 하나의 보편적 문명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유럽중심주의와 결을 같이 하는 것이다. 한반도 문명의 시원을 바이칼호에서 내몽골에 이르는 중앙아시아로 잡고 고대 그리스문명도 바로 이 한반도 문명의 시원에서 비롯되었다는 독특한 민족주의적 역사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 역사관은 한민족의 뿌리를 찾아 멀리 몽골이나 중앙아시아의 奧地로 원정을 가거나 낙후된 후진 사회를 이그조티즘exotism의 시각에서 타자화함으로써 전형적인 서구 제국주의의 전략을 모방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통해 대중화된 바 있다. 우선 카자흐스탄이나 몽골 등에 대한 한국의 '亞오리엔탈리즘suborientalism'을 드러낸다는 점이 지적되어야겠지만, 이 호전적 민족주의 역사관이 안고 있는 '서양' 콤플렉스라는 역설도 흥미롭다. "시골에 혁명기지를 구축해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한다"는 마오쩌둥의 反도시주의도 서양의 담론에 의지한다는 점에서 예외는 아니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전원적 이상에 대한 뿌리깊은 애착과 서양 제국주의자들 및 그 하수인인 도시 지식인들의 공간인 도시에 대한 깊은 불신을 담고 있다. 그러나 마오이즘에 대한 마이즈너Maurice Meisner의 분석이 잘 보여주듯이, 마오쩌둥의 반도시주의도 부분적으로는 루소Jean Jacque Rousseau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그것은 도시를 모든 사회적 사악함과 도덕적 타락의 상징으로 간주하는 서양의 지적 흐름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마오주의자들의 옥시덴탈리즘 또한 '서양'에 대한 완강한 부정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지적 전통에 기대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한다. 더 중요하게는 서양에 대한 안티테제로 제시된 마오이즘의 '제3세계' 혁명론 자체가 유럽중심주의의 인식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양/비서양'이라는 二項대립에 의거한 '제3세계'에 대한 본질주의적 접근은, 사실상 근대 유럽이 만들어낸 진보와 근대화라는 잣대에 따라 '서양제1세계'가 더 발전된 단계에 위치하고 있다는 인식을 밑에 깔고 있다. 타락한 물질문명의 '서양'에 대항하여 건강한 정신적 공동체로서의 '제3세계'를 내세우는 논리 자체가 이미 유럽의 역사적 경험을 보편적 기준으로 삼는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것은 아프리카 중심주의와도 닮은꼴이다. '서양' 만들기를 통해 옥시덴탈리즘이 강조하는 '동양'의 전통은 사실상 역사에서 객관적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적인 해석작업의 결과였다. 기든스Anthony Giddens의 표현을 빌면, "전통은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된다는 단순한 사실에서가 아니라, 현재를 과거에 얽어매는 끈을 확인하기 위해 수행되는 끊임없는 해석 작업으로부터 도출된다"는 것이다. 근대성과 전통이 제휴하는 것도 바로 이 해석 작업 안에서이다. 19세기 말 이래 주변부·식민지에서 정비된 전통 양식의 음악이나 무용, 가극 그리고 민족사national history 등은 서양과의 접촉이 없었다면 사실상 확립되지 않았을 발명된 전통이다. 그것은 요컨대 서양의 룰에 따라 재단된 자기 문화의 독자성과 고유성을 서양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촉발된 측면이 적지 않다. 서양의 논리를 모방하여 제국의 논리를 부정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서양에 대한 모방과 반발의 묘한 力學 속에서 서양의 담론체계에 기대어 고유한 역사상과 전통문화가 창출된 것이다. 전통은 모더니스트의 담론 구조 속에서 재구성된 이미지이며, 그래서 근대성이 배제된 전통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동양'의 전통은 어디까지 '서양'이 낳은 근대적 사고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 역설은 민족적 전통과 독자성을 강조하는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학에서도 잘 나타난다. 자본주의적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이 조선 사회 내부에서 준비되고 있었다는 자본주의 내재적 발전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正體性論과 他律性論이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타자화하는 일본식 오리엔탈리즘 담론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선의 자본주의적 맹아를 강조한 내재적 발전론은 그에 대한 대항담론이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식민주의가 이식한 이성과 진보의 담론 틀에 갇힌 것이었다. 즉 그것은 자본주의적 근대를 따라가야 할 준거로 설정함으로써 식민주의의 인식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주변부의 민족주의 역사학 일반이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인도의 민족주의 사학 또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도사의 발전 과정을 자본주의에 기초한 근대 민족국가로 나아가는 기획으로 간주한다. 인도의 민족주의 역사학이 결과적으로는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을 공유한다는 프라카쉬Gyan Prakash의 지적은 이 점에서 타당하다. 주변부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피식민자의 전통과 기원을 활용하여 식민주의에 저항하고자 했지만, 근대를 모방하려는 욕망의 포로가 됨으로써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오리엔탈리즘과 마찬가지로 옥시덴탈리즘도 서구중심주의의 자식인 것이다. 그러나 옥시덴탈리즘이 갖는 인식론적 한계를 드러내거나 '진실'과 '허구'를 가늠하는 데 그친다면, 그 논의는 지나치게 일면적이다.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옥시덴탈리즘의 담론이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는 한반도의 정치적 문맥에 대한 이해이다. 예컨대 '공산주의=서구사상=북한=전통 말살'이라는 등식으로 요약되면서 반공주의와 결합된 남한의 옥시덴탈리즘이 反共규율사회를 뒷받침하는 지식권력이었다는 점은 누구의 눈에도 자명하다. '美제국주의=서구문명=남한=매국노'라는 등식으로 이어지는 북한의 옥시덴탈리즘 또한 주체사상과 결합되면서 상시적인 전시동원체제를 가동하는 권력담론이었다. 즉 남·북한의 옥시덴탈리즘은 각각 '레드 콤플렉스'와 '양키 콤플렉스'를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사회의 심층에서 권력 엘리트의 지지기반을 만들어내는 담론체제였던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남한 민중의 요구는 서구의 小兒病的 개인주의의 발로라고 且置차치되었으며, 脫스탈린주의와 개인우상화를 비판하는 북한 반체제 지식인들 또한 비주체적인 사대주의자로 간단하게 매도되었다. 또 남과 북의 옥시덴탈리즘은 서구식의 갈등과 투쟁 대신에 덕과 관용, 지도자에 대한 情과 존경, 충성과 효도 등을 요구하고 민족을 영원한 생명체로 보는 유기체적 민족관을 공유하였다. 이는 大我에 대한 小我의 헌신이라는 명분으로 당당하게 민중의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권력의 논리로 이어졌다. 옥시덴탈리즘의 담론이 이처럼 누구를 위해서 어떠한 방식으로 행사되었는가 하는 구성주의적 문제제기에 이르면, 옥시덴탈리즘은 서양을 겨냥하기보다는 자기 사회의 내부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옥시덴탈리즘의 '서양' 만들기는 타자화된 서양을 반면교사로 하여 '동양' 내부의 구성원들을 길들이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촉발되었던 것이다. 사이드의 문제제기가 제국의 문화적 헤게모니에 대한 저항 담론뿐만 아니라, 주변부 사회 내부에서 토착 권력엘리트들이 행사하는 지식권력에 대한 저항 담론의 형식과 내용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IV. 본질주의에서 구성주의로 오리엔탈리즘이 제국주의적 목적을 위해 '동양'을 타자화했다면, 옥시덴탈리즘은 근대국가를 향한 동원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서양'을 타자화했다. 만들어진 '동양'과 만들어진 '서양'을 고정불변의 실재인 양 경계짓는 이분법은, '동양'과 '서양'에 대한 본질주의적 정의를 고착시키고 또 그렇게 고착된 본질주의적 정의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동양'과 '서양'에 대한 개념의 고정화는 결국 하나의 추상으로 전락하여 살아서 생동하며 끊임없이 변모하는 사회적 실재를 그 추상 속에 가두어버린다. '동양이란 무엇인가?' 또는 '서양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주의적 질문은 사실상 덧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본질주의적 질문에 시선이 고착되면, 그러한 개념이 사용되는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이나 상황들 또 그 속에서 작동하는 복잡다단한 정치적·문화적 함수들을 놓치기 십상이다. 더 중요하게는 '동양'과 '서양'의 만들어진 그 본질 밑에 숨어있는 지식권력의 작동방식을 간과하게 된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동양'과 '서양'의 개념이 어떠한 역사적 맥락에서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또 그것은 시민사회에서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 하는 구성주의적 시각이 요구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동양'과 '서양'이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파악할 때, 비로소 세계사와 지역사의 차원에서 진리의 이름으로 은밀하게 규율을 강요해온 동·서양 지식권력의 작동방식이 수면 위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란 그것이 착각임을 망각하게 된 착각"이라는 명제는 오리엔탈리즘에도 또 옥시덴탈리즘에도 망각하지 않고 적용되어야 할 '진리'인 것이다. 무우를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