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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4월  6일 토요일 오전 11시 17분 50초
제 목(Title): 이정우/ 칸딘스키 


출처: 한겨레21

[ 이정우의 철학카페 ]  2002년04월03일 제403호   
 

육체를 딛고 초월을 향해 

이정우의 철학카페23 ㅣ칸딘스키 

존재론에 기반한 추상 회화의 탄생… 합리성의 사다리를 탄 정신적 갈망 



 
사진/ <인상Ⅲ(음악회)>(1911). 캔버스 유채, 77.5×100cm, 뮌헨, 
렌바흐하우스.

고전적인 그림들과 현대의 그림들을 보면서 직관적 수준에서 가장 먼저 느끼는 
차이점은 재현의 현존과 부재일 것이다. 고전적인 그림들이 무엇인가를 
재현하고 있다면, 현대의 그림들은 얼핏 보아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기 힘들다. 
“이 그림은 무엇을 그린 것인가?”라고 물으면 촌스러운 사람으로 취급당한다. 

현대 회화의 이런 특징을 ‘추상’이라고 한다. 어떤 면에서 이 말은 현대 
이전의 그림자를 담고 있다. ‘추상한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사물을 
전제하고 그로부터 일정한 측면들을 사상한 채 일정 측면을 ‘뽑아내는’ 것을 
뜻하기에 말이다. 즉 이 말은 현대 회화가 전통 회화에서 벗어나는 중간 과정을 
담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화가는 칸딘스키일 
것이다. 


현실에 기대어 현실을 벗어난다 


‘추상’ 회화라는 말은 아이로니컬한 데가 있다. 그림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추상이기에 말이다. 한자(漢字) 같은 글 역시 추상이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인간이 행하는 모든 표상 작용은 다 추상이다. 보는 것도 추상이다. 산을 
바라볼 때, 거대한 산이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기에 말이다. 동북아 
사람들은 그림이 추상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깨달았던 것 같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오랜 기간 서구 예술가들은 재현을 추구했고, 추상 회화의 
탄생은 이런 담론사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칸딘스키의 경우 추상 행위는 인식론적으로만 규정될 수 없는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맥락을 띤다. 의식적인 형태의 추상이란 현실에서의 벗어남을 
뜻한다. 초기의 작품 <인상 III>(1911)은 유심히 보면 음악회를 그렸다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칸딘스키는 종래의 음악회 그림과는 
판연히 다른 음악회를 그려냈다. 현실과의 끈을 유지하면서도 우리에게 
평균적으로 각인된 현실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칸딘스키가 진정 
표현하고자 한 것은 음악회‘로부터의’ 추상이 아니다. 이 경우 
‘추상’이라는 말은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칸딘스키는 음악회의 
‘실재’를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수준에서 보면 르네상스의 그림과 칸딘스키의 그림은 같은 
존재론 위에 서 있다. 두 예술 모두 현실을 넘어 실재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실재의 모습은 너무나도 서로 다르다. 왜인가? ‘실재’를 찾는 
행위가 존재론(의 한 측면)이라면, 두 회화가 서로 다른 존재론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벗어나고자 한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초월에 대한 갈구를 나타낸다. 
서구 문화에서 이런 갈구는 피타고라스-플라톤적 뿌리와 유태-기독교적 뿌리를 
가진다. 유태-기독교적 뿌리, 그리고 피타고라스-플라톤적 뿌리의 일정 측면은 
현세에 대한 부정과 내세에 대한 믿음이 특징이다. 현세를 부정한다는 것은 
물질성을 부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현실을 이루는 원초적인 요소는 바로 
물질성이기에 말이다. 물질성의 인간적 형태가 곧 신체다. 따라서 초월이란 곧 
우리의 신체를 내던지고 ‘정신적인 것’을 추구함을 뜻한다. 고전이 된 
칸딘스키 책의 제목이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종교적·이성적 초월의 놀라운 결합 



 
사진/ <최후의 심판>(1912). 유리에 수채와 먹, 33.6×45.3cm, 파리, 
국립현대미술관.


칸딘스키에게 이런 초월성에의 갈구는 유태적 형이상학, 특히 일종의 이단인 
그노시스교에 기반한다.(이 종교는 또한 오르페우스적-피타고라스적 뿌리와 
상통한다) 그노시스교는 육체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정신만이 존재하는 세계로의 
초월을 꿈꾸던 종교로서 ‘말세’의 시대에는 늘 등장하는 종교의 한 형태다. 
칸딘스키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종말’로 받아들였고, 
말세론에 기반해 초월을 꿈꾸었다(1995년 사린가스 살포 사건으로 말세의 
분위기가 팽배했을 때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겔리온>은 말세론을 
형상화했다. 이 애니메이션의 화면 곳곳에서 칸딘스키적인 분위기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초월은 원래 형태의 초월, 즉 
완전한 초월이 아니라 과거가 쓸려나가고 새롭고 희망찬 미래가 도래하리라는 
낙관주의적인 말세론이었다. 화가가, 물질을 사용해 형상을 창조하는 화가가 
어떻게 절대적 초월을 꿈꿀 수 있겠는가. <최후의 심판>(1912)은 이런 분위기가 
강렬하게 나타나는 작품이다. 

그러나 칸딘스키에게 초월은 또 하나의 사상적 축, 즉 피타고라스-플라톤적 
축을 가진다. 피타고라스-플라톤 철학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는 
오르페우스에게서 유래하는 종교적 측면과 소크라테스에게서 유래하는 이성적 
측면이 놀랍게도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두 모순된 측면은 
칸딘스키에서 고스란히 발견된다. 초기의 표현적 추상주의가 
유태-기독교-오르페우스적 특징을 강하게 드러낸다면, 후기의 기하학적 
추상주의는 피타고라스-플라톤의 합리주의적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플라톤적 존재론은 현대 과학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과학은 더 이상 현상 
세계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식이나 추상적 모델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저 먼 미시세계, 또는 거시세계를 가르쳐준다. 

 
사진/ <검은사각형 내부를 위한 습작>(1923). 수채, 36×36cm, 파리, 
카를플링커 다큐멘트 갤러리. 
칸딘스키는 현대 과학의 이런 형태변이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물론 칸딘스키는 
화가다. 화가는 형태를, 물감(을 비롯한 재료들)을 떠날 수 없다. 때문에 
그에게 회화란(멀리 이데아를 굽어보는) 기하학적 형태들을 기반으로 하는 
행위가 된다. 이로부터 <검은 사각형 내부를 위한 습작>(1923)이나 <구성> 
시리즈 같은 걸작들이 탄생했다. 


완벽한 상응을 위한 이원적 일원의 사유 


칸딘스키가 화가인 한 그는 초월에 대한, 정신적인 것에 대한 자신의 갈망을 
형태와 색으로 나타낼 수밖에 없다. 이로부터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초월과 현실 사이에 거대한 ‘상응 체계’(corresponding system)를 구축하려는 
노력이 생겨났다. 피타고라스 학파나 음양오행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상응체계가 칸딘스키의 경우 형태와 색과 관련해 나타난다. 원은 영원, 파랑, 
둔각, 아디지오, 맥박수 50. 정사각형은 대지, 빨강, 지각, 모데라토, 맥박수 
75. 삼각형은 속세, 노랑, 예각, 알레그로, 맥박수 130과 상응한다. 칸딘스키의 
거대한 상응체계는 초월, 정신적인 것을 현실, 물질적인 것으로 표현하고자 한 
노력이었다. 

칸딘스키에게 기표는 반드시 기의에, 그것도 정확히 일 대 일 대응해야 했다. 
물질적 기표와 정신적 기 사이에 완벽한 상응체계를 수립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의 사유는 이원적 일원(二元的一元)의 전형적인 형태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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