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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3월 21일 목요일 오후 06시 19분 15초
제 목(Title): 이정우/ 마티스 


출처: 한겨레21

[ 이정우의 철학카페 ]  2002년03월20일 제401호   
 

절제된 힘을 만끽하라!

이정우의 철학카페 21 l 마티스 

세잔과 쌍벽을 이루는 미학적 성취… 구조적 안정감에 율동적 화면 배치 



 
사진/ <붉은 조화>(1908).
<붉은 조화>에서 마티스는 현실에서 관찰한 대상들의 일관성을 장식적 추상성과 
조화시켰으며, 육체성이 결여된 선을 무게 및 양감과 조화시키기 위해 
조심스럽게 색을 사용했다.

담론의 역사는 구조와 힘의 길항 관계를 드러낸다. 플라톤은 그의 형상들이 
너무 정적이라고 생각했기에 그것들에 힘(dynamis)을 부여했다. 라이프니츠와 
뉴턴은 데카르트의 기계론에 힘이 결여되었다고 보았기에 힘 개념을 도입했다.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구조주의에 힘이 결여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역시 
힘(역능, 권력, 욕망 등)을 도입했다. 왕부지는 리(理)가 기(氣)의 힘을 
닫아버린다고 생각했기에 기 일원론을 추구했다. 그러나 힘을 집중적으로 
강조할 때 합리적 법칙화는 포기되며, 때문에 플라톤은 이미지의 흐름을 멈추게 
할 형상들을 생각했고, 데카르트는 르네상스적인 힘(유비, 조응 등) 개념을 
극복하기 위해 기계론을 구성했고, 구조주의자들은 베르그송의 지속철학을 구조 
개념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담론사의 이런 길항 관계는 결국 구조와 힘의 그 
어느 쪽도 궁극적 승리를 얻지는 못하리라는 짐작을 가져다준다. 구조와 힘, 
공간과 시간은 마치 타원의 두 초점과도 같다. 


빛에 도취되고 색의 아름다움에 빠져 


인상파 회화가 힘을 추구했다고 말한다면 다소 부정확할 것이다. 인상파는 
사물의 내적 힘이 아니라 표면의 흐름을 중시했기에 말이다. 그러나 운동 
개념은 늘 다소간은 힘의 뉘앙스를 함축한다. 힘이라는 존재를 생각하지 않고서 
운동을 생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상파에서 힘은 응축된 
모습보다는 흐트러지는 모습으로만 나타난다. 힘은 빛에 굴복당하며 모든 것은 
표면의 이미지들로서 빛난다. 힘은 이미지들 속에서 산일(散逸)되며 따라서 
문자 그대로의 ‘힘’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은 약화된다. 세잔은 빛 속에서 
흐물거리는 루앙 성당을 공간 구조에 대한 집념어린 탐구를 통해서 생빅투아르 
산으로 바꾸어 놓았다. 마티스는 세잔과 거의 정확히 같은 맥락에서 현대 
회화의 지도리를 열었으나, 그가 선택했던 것은 타원의 다른 한 초점이었다. 
그것은 곧 힘의 회복을 통한 강도(intensit % t뒤에 맥킨토시로 e 위에 
악상떼기 표시 )의 추구였다. 

대부분의 유럽 예술가들이 그렇듯이 마티스 역시 지중해에 도취되었다. “나는 
현혹당했다. 모든 것이 빛났다. 모든 것이 빛이었다.” 또 마티스는 빛 
못지않게 색에도 도취되었다. “때때로 꽃은 나의 망막 위에 얼얼하리만큼 
지워지지 않는 색의 인상을 남겨 놓습니다.” 그러나 마티스는 인상파와는 다른 
길을 걸어갔다. 마티스의 초기작들 중 하나인 <호사, 평온, 관능>(1904∼05)은 
명백히 점묘법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그의 색깔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같은 시대의 작품들인 <콜리우르의 실내>(1905)나 <콜리우르의 열린 창>에서는 
이미 빛은 그의 사유 속에서 다분히 정제되어 있다. 여전히 점묘법적인 
요소들이 남아 있으나 그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측면들로 축소되어 
있으며, 방안의 채색들은 모두 색의 정체성을 그 자체로서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마티스는 색을 빛으로 끝없이 분할해 흐트러트리기보다는 “색이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고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우리는 콜리우르를 그린 두 그림에서 이런 이행을 뚜렷이 읽어낼 수 
있다. 


배경과 전경의 고전적 역할 전복 



 
사진/ <콜리우르의 열린 창>(1905).
“이것이 외부세계와 바다와 내부세계를 결합할 수 있었다면.” 마티스는 
<콜리우르의 열린 창>을 이렇게 평했다. “그것은 풍경의 분위기와 내 방의 
분위기가 바로 하나였기 때문이다.”


마티스는 세잔의 <목욕하는 세 여인>(1879∼82)을 매우 중시했다. 빛 속에서 
사물이 흩어지는 인상파 그림 대신 세잔의 이 그림은 화면의 견고한 구성과 
기하학적 구도, 배치를 통해서 세계의 본질을, 그러나 재해석되고 입체화된 
본질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마티스는 바로 색을 통해서 그 일을 하려 했다. 
더 정확히 말해 색이 내포하는 힘을 통해서. 색의 힘을 마티스만큼 강렬하게 
표현한 경우도 드물다. 인상파에게 여전히 남아 있던 명암의 요소는 거의 
사라진다. 화가는 빛에 빨려들기보다는 그것을 절제시키고 응축한다. 마티스의 
이런 색깔은 <붉은 조화>(1908) 같은 작품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붉은색은 배경과 전경이 행하는 고전적인 역할을 완전히 
전복시킨다. 배경색인 붉은색이 그림의 주인공으로 자리잡고, 그 안에 그것과 
보색을 이루는 다른 색들이 배치되어 있다. 마티스의 그림은 간명함을 특색으로 
하지만, 그 간명함은 구조의 간명함이기보다는 색의 간명함이다. 그것이 그의 
그림에 힘을 주고 있다. 이런 그의 그림이 일본이나 이슬람의 미술과 
상통한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세비야 정물>이나 <스페인 정물>의 색은 
너무나도 강렬해 마티스 자신의 표현처럼 눈을 얼얼하게 만든다. 

모더니즘 예술은, 물론 장르에 따라 다 다르지만, 냉혹하면서도 심오한 
주지주의를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함축한다. 엘리엇의 시가 그렇고,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이 그렇고, 쇤베르크의 음악이 그렇다. 예술은 탈감정화된다. 
미이스 반 데어 로에의 말처럼 “더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다(물론 오늘날 
우리는 이 신고전주의에 대비되는 네오바로크의 시대를 살고 있다). 피카소가 
세잔의 뒤를 이어 이런 주지주의를 추구했다면, 마티스는 예술의 또 다른 축 즉 
감정의 축을 택했다. 그러나 그의 감정은 일상적인 감정은 아니다. 그것은 
감상(感傷)이 덕지덕지 달린 신파조 감정이 아니라 간결하고 강렬하며 지적인 
그런 감정이다. 마티스의 회화가 풍기는 강렬함은 고도의 감각성과 추상성이 
결합한 강렬함이다. 바흐의 <파르티타>를 듣는 듯한 그럼 감정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잔의 그림이 색의 강렬함을 통해 힘을 얻은 구조 즉 결코 메마르고 
공허한 구조가 아닌 생동감 넘치는 구조를 보여주었다면, 마티스의 그림은 
지적으로 파악된 배치를 통해 구조적 안정감을 얻은 힘 즉 결코 산만하고 
부담스러운 힘이 아닌 절제되어 있고 깔끔한 그런 힘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두 사람이 타원의 두 초점을 이룬다는 것을 바로 이 점을 말한다. 


베르그송 철학이 그림으로 되살아나 



 

사진/ <춤Ⅰ>(1909).
“아뇨, (춤의) 주제는 벽에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1951년의 인터뷰에서 
마티스는 말했다. “나는 남달리 춤을 좋아하고 춤을 통해서 많은 것을 
본답니다. 표현력이 풍부한 움직임, 율동감 있는 움직임, 내가 좋아하는 음악 
따위를요. 춤은 내 안에 있었습니다.” 마티스는 1909년 3월 유채 스케치, 
<춤Ⅰ>을 그린 데 이어 이듬해 봄에는 같은 주제를 좀더 강렬하게 그렸다. 

마티스 그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음악성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잔의 비음악적인 그림 대신 마티스의 그림은 율동적이다. 
1909년 이래의 <춤> 시리즈나 1909∼10년의 <음악>은 이런 특성을 유감 없이 
보여준다. 화면은 간결하게 구성되었으며 두개의 배경색(녹색과 파랑을 
사용함으로써 특유의 안정감을 주고 있다)과 인체를 이루는 피부색 및 
머리카락의 검은색만으로 구성된 이 그림들은 마티스 미학의 한 정점을 이룬다. 
손을 맞잡고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림 전체에 율동미를 한껏 부여하고 
있다. 

물질은 이완이다. 기억과 생명은 응축이다. 이것은 베르그송 철학의 기본 
원리들 중 하나이다. 생명은 응축이며 강도이며 잠재성이다. 그것은 힘 그 
자체이다. 마티스는 바로 이런 힘을 추구했으며, 그렇다면 그가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에 심취한 것은 조금도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서구 존재론의 
두 초점이 플라톤과 베르그송이듯이, 세잔과 마티스는 20세기 회화의 두 초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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