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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3월 21일 목요일 오전 02시 27분 42초
제 목(Title): 박노자/ 달마대사는 서양에도 왔을까 


[ 박노자의 한국과 세계 ]  2002년03월13일 제400호   
 

달마대사는 서양에도 왔을까

불교가 백인들의 ‘정신적 장난감’으로 소비되는 경향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박노자의 북유럽탐험’이 이번호부터 ‘박노자의 세계와 한국’으로 문패를 
바꿔답니다. 박노자 교수는 깊이있는 한국사 연구 경험과 풍부하고 예리한 세계 
현실 분석에 기반하여 우리 사회를 조망할 것입니다. 새봄, 새옷으로 단장한 박 
교수의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성원을 기대합니다. 편집자 


가끔 한국에 가서 불교계와 관련이 있는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할 때마다 탄식의 
소리가 나오지 않는 적이 없다. 꼭 불교계 관계자가 아니라도 텔레비전의 뉴스 
프로그램에?각목을 들고 조계사 앞 길거리【?패싸움하는 승복 입은 사나이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불교계에 얼마나 문제가 산적해있는지를 쉽게 짐작할 
것이다. 세속적인 이득, 원칙상 ‘닭벼슬’만도 못해야 하는 ‘중벼슬’(사찰, 
불교 교단에서의 행정업무)을 놓고 사투를 벌이는 모습도 문제지만, 많은 
불자들의 마음을 괴롭히는 보이지 않는 문제들도 많다. 예를 들어, ‘호국 
불교’의 미명 아래 군대에 끌려간 젊은 승려들을 음주, 사음(邪淫), 폭력, 
그리고 많은 경우 궁극적인 ‘퇴속’(退俗: 환속)으로 이끌었던 군사문화에 
대해서 일언반구의 공개적인 비판도 하지 못했던 기성 교단의 입장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라는 문제다. 


한국 불교계의 한가지 낙관적인 구석 


분명히 한국 군국주의의 피해자인 불교계가 오랫동안 군국주의와 공생해온 것은 
불자들에게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고심거리는, 한국의 
주요 종단들이 명분으로 내세우는 선(禪)불교가 과연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라는, 쉽지 않은 질문이다. “자신과 법(法)을 등불로 삼으라”는 
석가모니의 ‘철학적인 개인주의’와, ‘조사(祖師)들의 가르침’을 절대시하는 
동아시아 선불교의 집단 의존 논리가 과연 같은 범주에 들어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참불교’를 탐구하려는 사람에게는 무척 어려운 것이다. 

한국에서 원효는 불교계뿐만 아니라 민족의 자랑거리다. 그러나 스승도 없이 
정통 교단으로부터 배척당해 민중 속에서 노래와 춤과 쉬운 이야기로 신앙을 
심어주었던 원효와, 교단의 안정된 질서 속에서 스승에게 복종과 존경을 다하며 
추상적인 경전 습득과 화두의 참구(參究)에 정력을 바치는 현재의 전형적인 
승려의 모습이 과연 같은가에 대해서 고심하는 사람들이 있고, 폭력과 불의에 
충만한 시대에 불자가 그것만으로 자리이타(自利利他: 자기와 남을 동시에 
이롭게 해주는)의 행을 삼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고뇌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국내 불교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걱정과 의문과 탄식이 교차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들이 아무리 심각해도 한국 불교계 사람들에게 한 가지 낙관적인 
구석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불교에 대한 서양인들의 커져가는 
관심이다. 불교가 서양 지식인들의 핵심 담론 중의 하나가 되고, 벽안의 
스님들이 한국의 사찰에서 참선을 하고 한국인 속인들에게 다시 불교를 영어로 
강의하는 모습은, 불교계의 ‘미래에 대한 기약’으로 보인다. 말로 그렇게 
표현하진 않지만, 세계체제의 핵심부에서 불교가 ‘공인’된 이상 주변부에서도 
그 맥이 적어도 끊이지 않겠다는 논리인 것 같다. 

불법이 서양으로 흘러들어간 것에 대해서는 필자도 물론 기쁘게 생각한다. 
불교의 자비나 무소유가 자본주의의 내재적 가혹성과 생산·소비의 중독에 
대해서 일종의 해독제 역할을 하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필자의 의문은 과연 서양 불교에 문제점이 없을까라는 데 있었다. 물론 서양의 
사찰 앞에서는 세계적인 뉴스로 방송되는 시가전들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찰 안에서 과연 불교적인 평등주의와 탈속(脫俗)주의, 
자비가 실천되는가? 문제는 많은 경우 서양 불자들이 탈피하고자 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극히 불평등한 소비사회를 그들의 사찰에서도 그대로 따른다는 
것이다. 


미국서 불교공부는 재력이 필요하다 



 
사진/ 구미 사회의 소수자들은 포교 영역의 밖에 있고 재정적 뒷받침이 되는 
자들만이 불교의 문턱에 들어올 수 있는 게 사실이다. 미국의 중국 사찰 풍경.


말 그대로 가장 ‘눈에 띄는’ 문제부터 생각해보면, 한국의 몇몇 사찰에서 
용맹 정진하는 외국인 승려들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들 절대다수가 그야말로 
벽안의 백인들이다. 그들의 배경을 따져보면 대부분이 중산층 이상 가정 
출신으로서 고학력층에 속한다. 백인 중산층 출신의 납자(衲子)들을 선호하는 
것은 한국 사찰의 성향인가?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구미 지역의 빈민이나 
비(非)불교권 계통의 소수민족(특히 흑인)들은 불자들 사이에 비교적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한 통계야 없지만, 불교권 국가 출신을 제외한 미국의 약 80만명의 불자 
중에서 흑인은 불과 몇천명이라는 것이 미국 불교계 안팎의 시각이다. 최근 
흑인 계통의 미국 불자들이 ‘자랑스러운 흑인 불자’라는 
포털사이트(http://www.proudblackbuddhist org)를 열기도 했지만, 불교계에서 
절대적 소수라는 사실에는 변동이 없다. 불교권 국가 출신을 제외한 미국 
‘토박이 불자’들 대부분이 학창 시절에 불교에 흥미를 느낀 대졸 출신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과연 어떻게 해서 일체의 중생이 다 불성(佛性)을 
소지한다는 평등주의적 종교가 백인 엘리트의 전유물처럼 된 것인가? 

이유야 물론 다양하다. 서구에서 비(非)전통 종교인 불교를, 책을 볼 여유가 
있는 중산층 출신의 백인 대학생이 흑인 빈민보다 더 쉽게 탐구할 수 있다는 
것은 무시 못할 현실이다. 그러나 또 한 가지 현실은 구미- 특히 미국- 에서의 
불교 공부가 시간적 여유뿐만 아니라 사실 상당한 재력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약 250∼400달러나 되는 여느 포교센터의 1년 회원권 가격은 미국의 
빈민층에는 작은 돈이 아니다. 

수련비는 그것보다 더 비싸다. 한달간의 기도수련 값이 750달러나 되는 것을 
포교센터(http://www.sirius.com/~smzc/pages/retreats.html)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포교를 위한 재원 마련이 절실하다는 현실은 이해하지만, ‘가격표 
붙은’ 법보시가 적지 않은 사람들을 불교로부터 소외시킨다는 사실은 마음 
아프기 짝이 없다. 결국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자비의 종교를 
누구보다 더 필요로 하는 구미 사회의 소수자들은 포교 영역의 밖에 있고, 
구도(求道)의 열성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자들만이 종교의 문에 쉽게 
들어온다. 그러나 여기에서 발생되는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소비주의 사회의 
관습대로 돈을 주고 산 종교적 경험을 자신들을 위해서 소비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 거주하는 나이가 꽤 든 한 중국인 여성 불자가, 왜 백인 불자와 같은 
사찰에 다니지 않느냐는 종교사회심리학 연구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다. “불자들이 같이 모인 법회에서 안타까운 일이 있었어요. 한 중국인 보살 
아주머니가 과거에 지은 죄와 악업(惡業)에 대해서 크게 울면서 
참회(懺悔)했어요. 우리로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보았지요. 그러나 옆에 앉아 
있던 백인 젊은이들은 그 아주머니를 이상하게 쳐다보기만 했어요. 그들은 
발언할 차례가 됐을 때, 자신들의 생활이 참선의 경험으로 인해 얼마나 
흥미로워졌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어요. 참선을 마치 일종의 음식이나 약처럼 
즐기려는 태도를 진지한 불교로 보기가 쉽지 않았지요.” 


구미 불교의 잠재력에 대한 희망도 



 
사진/ 미국의 중국 사찰 풍경.


참선에 대한 백인 불자들의 태도를 종교적인 향락주의로 보는 시각은 아시아 
불자들에게서 상당히 강하다. 과연 이 시각을 편견으로만 취급할 수 있을까? 
철저한 지계(持戒: 계율 지키기) 정신을 가진 남방 계통의 소승불교보다, 
“참선 속에서 인생의 희열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던 극동 계통의 일부 
선불교 포교 집단들이 백인 불자들 사이에서 훨씬 더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물론 개인마다 종교적 동기와 실천의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는 만큼 ‘모든 중산층 이상의 백인 불자’에 대한 성급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불교가 하나의 상품이 되어 자신의 내면적 문제들을 풀고 좀더 
재미있고 풍부한 생활을 즐기는 데 이용되는 경향이 큰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경향은 일체 현실의 본질을 고(苦)로 보고, 고에 빠진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불교의 본래의 교리와 상충하지 않을까? 

극동 불교권 국가의 역사에서 지배층에 의해서 오랫동안 온갖 방법으로 
이용당한 불교가 이제는 백인 귀족들의 ‘정신적인 장난감’으로 소비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일체의 생명을 
귀중히 보고 전쟁을 최악의 죄로 생각하는 불교는 최근 갈수록 더해가는 미국 
패권주의 횡포를 막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운동이 구미에서 불교 확산의 계기가 됐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상기하면, 
국가적 폭력을 반대하는 운동의 모체로서 구미 불교의 잠재력에 대한 낙관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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