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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12월 24일 월요일 오후 07시 04분 07초
제 목(Title): Re: anony 보드의 명성황후 쓰레드...


몇가지 자료들을 읽었습니다. (아래에 퍼왔습니다)
정난정이 굵직한 중/명종 조의 사건에 개입했다기 보다는 
그의 부군 윤원형과 그의 누나,문정왕후가 부정부패의 화신이라는 점에서 
여러 정난정에 관련한 야사와 설화가 발생한 이유인 듯 싶습니다. 

왕조실록에 어찌되었든 이름이 남겨지는 경우는 대단한 
경우일텐데, 정난정의 이름이 남겨지게 된 계기는 
윤원형이 세도를 상실한 후에 고발된 '처첩갈등' '첩의 정경부인 사건'
에 보다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고 추측되어지는군요. 


------------------퍼옴시작 

제 13대 명종실록

■ 눈물의 왕 명종의 등극과 끝없는 혼란 

인종이 죽자 12세 밖에 안 된 경원대군이 왕위를 이었다. 그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학문을 좋아하고 총명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모후 문정왕후의 
극악스러움에 눌려 평생 눈물로 왕위를 지켜야 했다.
명종은 중종의 두번째 계비 문정왕후 윤씨의 아들이다. 이름은 환, 자는 
대양이며 태어나자마자 경원군에 봉해졌다. 이후 인종이 즉위하자 1544년 
경원대군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인종이 재위 9개월 만에 병사하자 왕위를 
이었다.
명종은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8년 동안 모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대신하게 되자 
조정의 대세는 윤원형 일파에게 돌아갔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친동생으로 
1537년(중종 32년) 김안로가 실각한 뒤 등용된 인물이었다. 그는 중종 시대부터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 일파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세간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고 했다.
인종 즉위 당시에는 한때 대윤파가 득세하여 이언적 등 사림 세력을 등용하여 
기세를 떨쳤으나,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사태는 
반전되었다. 윤원형은 명종이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윤임 세력의 제거 작업에 
착수했다.윤원형은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을 사사케 하고 사림세력들을 
유배시켰다. 명종 즉위년인 1545년에 일어난 이 사건이 을사사화이다.
을사사화로 조정을 장악한 윤원형은 미처 제거하지 못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 '양재역 벽서 사건'을 일으켜 또다시 사림 세력 20여 명을 
유배시켰다. 중종의 아들 봉성군을 역모와 연루되었다고 무고하여 사사시키고 
사건 조사 과정에서도 많은 인물들을 희생시켰다.
윤원형 일파가 이렇게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자 
이른바 '외척 전횡 시대'가 도래했고, 이때부터 명종은 그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윤원형은 권력을 독점하게 되자 문정왕후의 세력을 
등에 업고 온갖 횡포와 부의 축재에만 열중하는 등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윤원형의 이런 세도가 명종이 친정을 한 이후에도 계속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명종은 드디어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친위 세력을 형성하려 했다. 
명종이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중용한 인물은 이량이었다.
이량은 명종의 비 인순왕후 심씨의 외숙이었다. 하지만 이량 역시 세력을 
기르고 정치를 농단하기 시작했으며 축재에도 열을 올려 호랑이를 내쫓으려다 
호랑이 한 마리를 더 키운 격이 되어 버렸다.
이처럼 권신들의 횡포에 시달리고 있는 명종에게 설상가상으로 문정왕후도 
자신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면 왕을 괴롭히는 등 왕권을 쥐고 흔들었다.
왕의 권위는 이처럼 땅에 떨어지고 조정대신들은 권력을 독점하며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해 있었기에 자연히 사회는 어수선하고, 민심은 병들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년이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민간의 
태반이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고, 나라 구석구석마다 도적떼가 난립하였다.
특히 양주의 백정 출신 임꺽정이 난을 일으켜 도적떼의 두령들을 끌어 모아 
관군을 괴롭혔고, 그 때문에 관리들은 그를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백성들 사이에서 의적으로 통하고 있었기에 그를 잡으러 다니는 관군이 
오히려 민간의 원흉으로 취급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사회가 이렇듯 
혼란스러운 지경에 이르자 자연 국방이 허술해졌고, 그 틈을 타서 왜구가 
기승을 부렸다.
이 같은 조선 혼란의 근본 원인은 문정왕후에게 있었다. 그녀는 '여왕'으로 
불리울 정도로 왕권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었다.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친정 
동생 윤원형의 폭압적인 권력 독점과 남용을 후원하고 있었고, 유교 사회를 
표방하고 있는 조선에서 승복을 입은 승려를 병조판서에 올릴 정도로 정사를 
개인적인 감정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가 죽기 전에는 조선사회가 제 
위치를 찾을 가망은 전혀 없었다. 때문에 명종을 포함해 대부분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그녀가 죽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상태였고, 마침내 1565년 그녀가 
죽자 조선은 급속도로 평화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녀가 죽자 가장 먼저 철퇴를 맞은 것은 승려 보우와 윤원형 일파였다. 승려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죽었으며 윤원형 역시 그의 애첩 정난정과 함께 
강음에 유배되었다가 자살하였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가 사라지자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고 선정을 
펴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자 조정은 안정되고 사회도 점차 질서를 되찾아갔다. 
하지만 명종은 그 동안 너무 국정에 시달린 탓인지 병을 얻고 말아 문정왕후가 
죽은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명종의 나이 불과 34세 밖에 되지 않았다. 
명종은 인순왕후 심씨에게서 순회세자를 얻었으나 그는 13세의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아서 중종의 아홉째 아들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하성군의 즉위로 조선은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얼 출신인 방계 
혈족이 왕위를 잇는 상황에 처해졌고, 이 때문에 이후부터 왕의 권위는 한층 
떨어지게 되었다.




■ 명종시대의 주요 사건들 

* 을사사화
을사사화는 무오, 갑자, 기묘사화와 더불어 조선 4대 사화 중 하나로 
1545년(명종 즉위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 윤임과 소윤 윤원형의 반목으로 
일어나,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이 정계 전면에서 후퇴하자 심정, 이항 등의 세력과 김안로 
세력이 치열한 권력 다툼을 일으켰다. 이때 김안로는 심정의 탄핵으로 귀양을 
갔으나 다시 정계에 복귀했다. 정권 장악에 성공한 김안로 일파는 반대파를 
몰아내고 권세를 부렸으며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그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몰아 내겠다고 위협해 조정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들은 문정왕후를 몰아내려고 
음모를 꾸미다 문정왕후의 숙부 윤안임의 밀고로 발각되어 유배된 뒤 
사사되었다. 김안로가 실각한 뒤 정권 쟁탈전은 권신에서 척신으로 넘어갔다.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낳자 그녀의 친형제인 윤원로, 윤원형은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계략을 세우지만 세자의 외숙 윤임이 이를 저지해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윤임(대윤)과 윤원형(소윤)의 대립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때문에 조신들 또한 각각 대윤파와 소윤파로 갈라지게 됐는데, 이 
양세력의 다툼은 날로 심해져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인종의 외척인 대윤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종은 즉위 9개월 만에 세상을 떴으며, 12세 밖에 안 된 명종이 왕위를 
이어 받았다. 명종은 나이가 어린 탓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고, 
때문에 조정의 권력은 자연히 소윤파에게 돌아갔다.
소윤파는 윤임 등이 역모를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여 대윤파를 궁지로 
몰아넣어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이 때의 사건을 흔히 을사사화라 하는데 
그것은 윤임 일파에 사림 세력이 몰려 있다가 한꺼번에 참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윤원형은 이 사건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양재역 벽서 사건'을 
기화로 다시 정미사화를 일으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 후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은 1565년까지 약 20여년 동안 왕권을 능가하는 권세를 
부리며 온갖 학정을 자행하게 된다. 

* 양재역 벽서 사건
양재역 벽서 사건은 을사사화의 2년 뒤인 1547년에 일어난 것으로 윤원형 
세력이 윤임파의 잔당과 사림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정치 쟁점화 
했던 정적 숙청 사건이다.
1547년 9월에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구너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하여 임금에게 보고했다. 윤원형 일파는 이 
사건이 윤임파에 대한 처벌이 미흡해서 생긴 사건이라고 주장하며 그 잔당 
세력을 척결할 것을 간언했다. 이 말을 들은 문정왕후는 명종으로 하여금 
윤임의 잔당 세력과 정적들을 제거하도록 한다. 또한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완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사사되었다. 그러나 1565년 문정왕후가 죽고 
소윤 일파가 몰락하자 이때 희생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신원되었으며 이 사건 
자체도 소윤 일파의 무고로 처리되어 노수신, 유희춘, 백인걸 등 유배되었던 
사람들이 다시 등용되었다.
이 사건은 사실 익명으로 쓰여진 벽보를 소윤 일파가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다지 대단치도 않는 일을 소윤 일파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의로 확대시킨 사건이었다. 

* 을묘왜변
을묘왜변은 1555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왜구가 전라남도의 강진, 진도 일대에 
침입하여 약탈과 노략질을 통해 민간에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조선과 일본의 원활하지 못한 외교 관계와 일본 내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발생했다.
1555년 5월 왜구는 선박 70여 척을 앞세우고 전라남도 남해안 쪽에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였고, 또한 어란도, 장흥, 영암 일대를 횡행하면서 노략질과 약탈을 
감행하였다. 이에 조선은 왜구 토벌대를 전라남도로 급파하였지만 패전하고 
말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조정은 토벌대를 다시 급파했고 이들에 의해 
왜구가 섬멸되자 대마도와의 무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 을묘왜변을 기화로 도요토미가 일본을 통일시키자 왜구는 단순한 노략질 
차원을 넘어 대규모 전쟁을 감행해왔다. 이것이 곧 임진왜란이었다. 이 난 이후 
조선과 일본 양국 간의 통교는 거의 중단되고 말았다.




■ 명종시대를 이끈 사람들 

* 주리철학의 선구자 이언적
이수회의 손자이자 이번의 아들인 이언적은 1491년(성종 22년)에 태어났다. 
본명은 적이었지만 중종의 명으로 '언'자가 더해져 언적이라 하였으며 호는 
회암, 주희의 학문을 따른다는 의미에서 회재라고 하였다.
그는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이조정랑, 사헌부장령, 
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에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한 뒤에 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이조, 예조, 
형조판서를 거쳐 1545년에 좌찬성이 되었다. 이 해에 윤원형 등의 척신 세력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사림들을 심문하는 추관을 맡았으나 자신도 이때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6년을 보내다가 1553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을사사화와 같은 시련기에 이언적은 판의금부사라는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 
윤원형 일파에 의한 사림의 피해를 막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힘이 
부족하여 자신도 결국 사화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이를 두고 이이는 그가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하지 못했던 점을 들추면서 절개를 지키지 못한 
우유부단한 학자로 비판하고 있지만,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강구하던 치밀한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조의 성리학을 정립한 선구적인 인물로서 유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스승도 제대로 없던 그는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확립하였으며, 이황의 성리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영남학파를 
이루는 근거가 되었다. 그는 만년의 유배 생활 동안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큰 
업적이 되는 중요한 저서들을 남겼다. 「구인론」, 「대학장구보유」, 
「중요구경연의」, 「봉선잡의」 등이 그것이다. 

* 조선 성리학의 큰 산 이황
이황은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지금의 경북 안동시)에서 좌찬성을 지낸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러나 후실이었지만 현부였던 생모 박씨의 가르침으로 총명한 자질을 
키워나갔다.
27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34세(1534년)가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사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 놓았으며 39세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김인후가 낙향하는 것을 보고 성묘를 핑계 
삼아 사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 뒤에도 그는 몇번에 걸쳐 임관의 명을 받게 되자 중앙을 떠나 지방으로 
외직을 지망하여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 경상도 풍기군수 등을 지냈다. 
풍기군수 시절에는 백운동서원에 서적, 편액, 학전 등을 마련할 것을 조정에 
청원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하지만 49세가 되던 해에 그는 다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을 짓고 다시금 구도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에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자 취임하였다. 이후 홍문관 부제학, 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고, 낙향하여 도산서당을 짓고 학문 정진에 
전념하였다. 이때 그는 아호를 도옹이라고 개칭하고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 수양, 저술 등에 매진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명종은 그의 
학문과 인품을 높게 보고 자주 그에게 조정으로 나올 것을 종용했지만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이후 명종이 돌연 병사하고 선조가 즉위하여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사경 및 
예조판서에 임명했으나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여러차례 
고사 끝에 선조의 간청을 물리치기 어려워 68세의 노구에 대제학, 지경연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통치 철학이 되는 「무진육조소」를 올렸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논어집주」, 「주역」 등을 강의했고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 「성학십도」를 저술해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번번이 사직을 
간청하여 마침내 낙향을 허락받았다. 낙향한 후 이듬해 11월 평소에 아끼던 
매화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세상을 떴다. 이때 그의 나이 70세였다. 그가 죽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면서 그를 영의정의 예로 장사 지내도록 했다.
이황이 남긴 저서로는 정지운의 「천명도설」을 개정하고 「연평답문」을 
교정하였으며 노수신의 「숙흥야매잠주」에 관한 논문을 썼고 
「역학계몽전의」를 완성하였다. 그리고「주자서절요」 및 「자성록」을 거의 
완결하게 서문으로 썼다.
이황은 젊어서는 학문을 위한 준비에 게으르지 않았고 중년에는 스스로의 
가치관을 실천했으며 노년에는 이를 바탕으로 학문을 쌓고 제자를 길러 맹자가 
말하던 인생삼락을 철저히 즐긴 사람이었다. 그의 학풍을 따른 학자로는 당대의 
유성룡을 비롯하여 김성일, 기대승, 조목 등을 위시한 260여 인에 달하고 
나아가서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 사류 모두이다. 이는 조선 주리 철학의 한 
산맥을 형성하였으니 실로 한국 유학 사상 일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이황의 산은 골이 깊고 봉우리가 높았던 것이다.
산이 높아야 골이 깊고, 골이 깊어야 넓은 강을 낼 수 있다는 이치가 바로 
이황에 적합한 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명종의 가족들 

명종은 부인이 인순왕후 1명 뿐이다. 게다가 자식도 순회세자 하나 뿐이었는데 
그마저도 13세에 요절하여 결국 후사를 잇지 못했다. 

* 인순왕후 심씨
인순왕후 심씨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1532년에 태어나 14세 나던 1545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1551년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그는 13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더 이상 후사를 이을 왕자를 낳지 못했다. 이후 1567년 명종이 죽자 대비가 
되어 16세 된 선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였다. 하지만 1568년 선조에게 
친정을 시키고 물러났으며, 1575년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 순회세자
순회세자는 1551년 명종과 인순왕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부, 아명은 
곤령이다. 1557년 일곱 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윤원형의 추천으로 
참봉 황대임의 딸과 혼담이 오갔으나, 그녀가 병약하여 1년이 넘게 가례를 
미루자 1559년 호군 윤옥의 딸로 세자빈이 교체되어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순회세자는 가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사도 잇지 못하고 1563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 때문에 명종의 대를 이어 중종의 서손자 
하성군이 대통을 이어야 했다.




■ 이 시대의 재미있는 이야기 (야사) 

윤원형이 문정왕후의 세력을 등에 없고 권력을 독점하게 되자 그 동안 자신에게 
불만을 토로하던 친형 윤원로를 유배시켜 사사시키는가 하면, 자신의 애첩 
정난정과 공모하여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노비 출신인 그녀를 정경부인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또한 정난정은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부를 축적하였다. 이 때문에 윤원형의 집에는 뇌물이 폭주하여, 한성 
내에 집이 15채나 됐으며 남의 노예와 전장을 빼앗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고, 죽고 사는 것이 그의 손에 달렸다는 말이 오갈 지경이었다. 당시 
권력을 탐했던 조신들은 정난정의 자녀들과 다투어 혼인줄을 놓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정난정은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병조판서직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불교가 융성하기도 했다.
이런 세력의 발원인 문정왕후는 툭하면 떼를 스며 왕을 괴롭혔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종이에 적어 보냈다가 그것이 수용되지 않으면 왕을 불러 
면상에다 대고 반말로 욕을 해대는가 하면 심지어는 말을 듣지 않는다고 왕의 
종아리를 때리거나 뺨을 때리기도 했다. 이렇듯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약 20년 
동안 왕권을 능가하는 권세를 부리며 온갖 학정을 자행했다.




SBS 사극 「女人天下」 주인공 文定王后는 누구인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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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

朝鮮을 피로 물들인 權力의 化身
백성도 도탄에 빠져 임꺽정이 등장한 시절 이야기

李相欣 月刊朝鮮 기자(hana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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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모순이 충돌하던 시대 / 선비가 없는 자리에는 권력투쟁만이 

주요내용
사회적 모순이 충돌하던 시대 / 선비가 없는 자리에는 권력투쟁만이 
모함과 무고…「乙巳士禍」 / 「花無十日紅」 
 
 
SBS의 TV사극 「女人天下」의 시청률이 40%대를 넘고 있다. 극중에서 
文定王后(문정왕후·전인화 扮)를 모시고 있는 엄상궁(한영숙 扮)의 팬클럽까지 
생겼다. 팬클럽 회원만도 1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TV드라마 여인천하는 鄭蘭貞(정난정·강수연 扮)이란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史實(사실)만 놓고 볼 때 蘭貞은 조연에 불과하다. 
당대의 주인공이 될 사람은 단연 文定王后다.

文定王后는 어린 명종을 대신해 垂簾聽政(수렴청정)을 하였다. 朝鮮시대를 
통틀어 볼 때 文定王后 외에도 攝政(섭정)을 한 왕비가 여러 명 있었다. 영조의 
妃인 정순왕후는 순조(23대 왕)를, 순조의 妃인 순원왕후는 헌종(24대 왕)을 
대신해 정치를 하였다. 그러나 文定王后처럼 사람들의 머리에 각인된 섭정 
왕후는 없다.

文定王后는 권력을 잡자마자 乙巳士禍(을사사화·1545)를 일으켜 政敵(정적)을 
제거하고 수많은 선비를 죽였다. 요직을 독식한 그의 친인척과 權臣(권신)들은 
나라의 주인행세를 하며 조선을 주물렀다. 안으로는 임꺽정이라는 무시무시한 
도둑이 3년 간이나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휘젓고 다녔고, 밖으로는 오랑캐와 
倭가 국경을 無時로 들락거렸다. 이 와중에 전염병과 가뭄이 전국을 휩쓸었다.

당시 朝鮮은 건국 이후부터 내려오던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이 서로 충돌하는 
시기였다. 특히 朝鮮개국 때부터 권력을 잡아 온 훈구세력과 권문세가들의 
專橫(전횡)이 극심했다. 새로운 정치를 해보겠다고 조정에 들어오는 士林들은 
번번이「士禍」(사화)라는 철퇴를 얻어맞았다. 文定王后는 조선이 「士林의 
세상」으로 가는 과도기에 집권하였다. 그는 士林이라는 새로운 기운을 
억누르고 친족들의 세도를 방조함으로써 백성의 원성을 샀다. 

선비가 없는 자리에는 권력투쟁만이

중종 14년(1519) 연산군을 쫓아낸 반정공신인 沈貞(심정), 南袞(남곤) 등에 
의해 신진사림인 趙光祖 일파가 축출되었다. 조정은 다시 훈구세력으로 가득 
찼다. 권력을 움켜쥔 훈신들은 이제 자기들끼리 피나게 싸웠다. 이 와중에 공신 
沈貞과 敬嬪(경빈) 朴씨, 敬嬪의 아들 福城君(복성군) 등은 세자(인종)의 
외숙인 尹任(윤임)과 그 일파인 金安老(김안로)에 의해 제거되었다(灼鼠의 
變·1527). 권력을 놓고 벌이는 이들의 싸움은 나중에 文定王后가 아들(명종)을 
낳자, 왕후의 외척까지 가세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된다. 이 모든 정쟁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文定王后가 있었다.

文定王后는 중종의 繼妃(계비)다. 중종이 반정에 성공했을 때 조강지처인 
愼씨가 있었다. 그러나 반정세력들은 愼씨가 『연산군 때 좌의정을 지낸 역적 
愼守勤(신수근)의 딸』이라 하여 7일 만에 私家(사가)로 쫓아 버렸다.쫓겨난 
愼氏는 영조 때 端敬王后(단경왕후)로 추증이 되지만, 200년 뒤의 일이다.

그 다음 왕후로 책봉된 사람이 章敬王后(장경왕후) 尹씨였다. 그는 大尹의 
우두머리라 불리게 된 尹任의 누이다. 그러나 章敬王后는 元子(인종)를 낳은 후 
산후병으로 일주일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1515). 뒤이어 왕후에 오른 인물이 
영돈령부사 윤지임의 딸인 文定王后(1517). 이때 文定王后가 왕비가 될 수 있게 
힘을 쓴 사람이 훗날 왕비에 의해 제일 먼저 제거되는 尹任이었다고 한다. 
文定王后와 尹任은 같은 坡平(파평)尹氏로 尹任이 왕후의 9촌 아저씨뻘 된다.

文定王后는 왕비에 오른 지 17년 만인 중종 29년(1534) 
慶源大君(경원대군·명종)을 낳았다. 이렇게 되자 세자(인종)의 외삼촌인 
尹任과 金安老 등 소위 세자파들은 왕후를 견제하였다. 세자가 매우 
병약했으므로 왕후라고 야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왕후는 오빠 尹元老(윤원로)·동생 尹元衡(윤원형·女人天下에선 이덕화 扮) 두 
형제와 결탁하여 慶源大君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갖가지 공작을 시작했다.

두 외척의 대립이 팽팽하였다. 사람들은 세자를 중심으로 뭉친 尹任 일파를 
「大尹」이라 하였고 文定王后를 등에 업고 세력을 키운 尹元老·尹元衡 일파를 
「小尹」이라 불렀다. 이제 싸움은 권신들끼리의 싸움에서 외척 간의 싸움으로 
변하였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등극하자 大尹의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大尹의 득세는 짧았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은 것이다. 당시 
임금이 죽으면 屍身을 먼저 殯殿(빈전)에 두고 상주는 이곳에서 복상을 해야 
했다. 

그리고 5개월 후 屍身이 완전히 肉脫(육탈)이 되면 능을 만들어 묻었다. 이를 
因山(인산)이라 한다. 

인종은 父王 중종이 죽자 빈전에 조야로 上食을 올리고 곡을 하였다. 효심이 
깊고 병약한 인종은 이 과정에서 병을 얻어 1545년 31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조선의 임금 중에는 嫡子(적자)나 長子(장자)가 왕이 된 
경우가 거의 없다. 설사 왕이 되어도 일찍 죽거나 불행했는데 인종도 그러했다. 
 
 
SBS 사극 「女人天下」 주인공 文定王后는 누구인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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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함과 무고…「乙巳士禍」 / 「花無十日紅」 

주요내용
사회적 모순이 충돌하던 시대 / 선비가 없는 자리에는 권력투쟁만이 
모함과 무고…「乙巳士禍」 / 「花無十日紅」 
 
 
野史나 「女人天下」에서는 앞서 일어난 「작서의 변」이나 인종이 갑자기 죽은 
것 모두 文定王后와 蘭貞의 흉계로 그리고 있다. 야사에 따르면 왕후와 그 
세력들은 밤낮없이 인종이 죽기를 기원하고 동궁에 불까지 질렀다. 인종은 
두말없이 『이복동생인 慶源大君에게 왕위를 물려 주라』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繼母인 文定王后에 대한 孝道를 다 하였다.

인종이 죽자 이젠 小尹의 세상이 되었다. 뒤이어 등극한 명종의 나이가 
12세밖에 되지 않아 국정을 돌볼 수 없자 이제는 大王大妃(대왕대비)가 된 
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인종의 屍身이 궐 밖에 나가기도 전에 尹元衡은 
大尹인 尹任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수를 썼다. 尹元衡은 병조판서 李(이기), 
호조판서 林百齡(임백령), 지중추부사 鄭順朋(정순붕) 등과 결탁하여 大尹을 
일시에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

1545년 9월 尹元衡은 그의 첩 蘭貞을 시켜 文定王后에게 『尹任 등 大尹 일파가 
역모를 꾀했다』고 무고케 했다. 이 사건은 순전히 大尹을 제거하기 위한 
小尹의 무고였다. 小尹은 『尹任이 영의정 柳灌(유관), 이조판서 
柳仁淑(유인숙)과 공모해 桂林君(계림군:성종의 셋째아들인 계성군의 양자)이나 
鳳城君(봉성군:중종의 8남)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고 주장했다.

이 소식을 들은 桂林君은 당황한 나머지 강원도 安邊(안변) 황룡산으로 도망가 
중으로 가장하여 숨어 있다가 잡혔다. 죄를 자백한 꼴이 되었다. 모진 고문으로 
애꿎은 사람이 줄줄이 잡혀왔다. 尹任은 물론이요 그의 세 아들과 기묘사화 
이후 겨우 등용되었던 사림파인 柳灌, 柳仁淑 등이 賜死(사사)되고 수많은 
선비와 가족이 화를 당했다.

尹任, 柳灌, 柳仁淑은 유배지에 도착도 하기 전에 사약을 받았다. 이를 
「乙巳士禍」라 한다. 乙巳士禍 2년 후인 1547년 良才驛(양재역:경기도 
과천)에서 文定王后를 비방하는 壁書(벽서)가 발견되자, 尹元衡은 이 사건을 
확대시켜 남아 있던 大尹 세력과 잠재적 저항세력인 士林의 다수를 제거했다. 
鳳城君도 이때 죽었다(丁未士禍).

尹元衡 일파는 명분도 이념도 없이 오직 私的인 복수와 권력을 위해 모함과 
무고를 일삼았다. 이런 현실정치에 염증을 느낀 많은 士林들이 草野(초야)에 
내려가 서원을 세우고 후학을 길렀다. 이는 조선 성리학의 발달로 이어졌다. 
李滉(이황), 曺植(조식)같은 성리학의 거물도 이때 나타났다.

권력을 놓고 집안끼리 물고 싸우니 민심이 흉흉하고 人道가 땅에 떨어졌다. 
충청도 충주에서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형이 동생을 밀고하는 일까지 생겼다.

당시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영월에 귀양 가있던 李洪男(이홍남)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尹任의 사위인 동생 李洪胤(이홍윤)이 양재역 벽서사건의 
범인이라고 고발을 했다.

이 사건으로 충주를 비롯 충청도 일대의 선비들 상당수가 잡혀와 치죄를 
당했다. 尹씨 일파는 『역적이 많은 충주의 「忠」자를 붙일 수 없다』하여 
충청도를 청주-홍주(홍성)의 淸洪道(청홍도)라고 개명했다. 충주는 
惟新縣(유신현)으로 강등시켰다. 

「花無十日紅」

이들은 반대파를 제거한 후 그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논공행상을 하였다. 
처음엔 保翼功臣(보익공신)이라고 하다가 그것도 부족해 
衛社功臣(위사공신:사직을 지킨 공신)으로 승격시켜 일등, 이등을 자기들끼리 
나누어 가졌다. 尹元衡과 文定王后는 乙巳士禍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자기와 권력다툼을 하던 형 元老까지 죽여 버렸다(1547).

文定王后는 명종 8년(1553) 수렴청정 8년 만에 還政(환정:섭정을 그만둠)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권력은 그의 손에 있었다. 그는 불교에 심취하였다. 중 
普雨에게 벼슬을 내리고 궁궐까지 출입시키며 그의 불교부흥을 도왔다. 이는 
유생들의 극한 반대를 불러왔다.

유생들은 절을 부수고 승려를 폭행하며 普雨를 斬刑에 처하라고 상소를 올렸다. 
普雨를 탄핵하는 상소가 6개월 간 400여 건이나 쏟아져 들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文定王后는 요지부동이었다. 普雨도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佛法이 
사라진다』면서 유학자들의 저항에 맞섰다. 

모든 권세를 누린 文定王后에게는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 중종과 따로 묻혀 죽어서도 繼妃의 신세로 남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경기도 고양 章敬王后 옆에 있던 중종의 陵을 성종의 능(宣陵) 부근으로 
遷葬(천장)하고, 자신이 그 옆에 묻히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새로 옮긴 
그곳(중종 능:靖陵)은 지대가 너무 낮아 침수가 잦았다. 文定王后는 결국 중종 
곁에 묻히지 못하고 泰陵(태릉)에 묻혔다. 후에 명종의 아들인 
順懷世子(순회세자)가 요절하여 代가 끊기자 사람들은 文定王后가 중종의 陵을 
잘못 건드려 화를 입은 것이라고 수근거렸다.

명종 20년(1565) 4월 文定王后가 20년의 권세를 뒤로 하고 죽었다. 날개를 잃은 
尹元衡과 蘭貞은 士林의 탄핵을 받아 황해도 江陰(강음)에 유배당했다. 
형조에는 元衡과 蘭貞이 정실부인 金씨를 독살했다는 고발도 접수되었다.

세상이 자기들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을 안 元衡과 蘭貞은 碧蹄館(벽제관) 
역졸에게 금부도사가 그곳을 지나면 알려달라는 부탁을 했다. 11월 어느 날, 
마침 평안도를 가기 위해 碧蹄館을 지나는 금부도사가 있었다. 元衡과 蘭貞은 
자신을 죽이러 오는 줄 알고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普雨는 삭탈관직당한 후 
제주로 유배를 갔으나 제주목사 邊協(변협)이 杖殺(장살:때려죽임)을 해버렸다. 
文定王后 사후 士林들이 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이후 조선은 士林의 나라가 
되었다.● 
 
 

우리 가문을 빛낸 인물  / 정대년(鄭大年)
 

1503(연산군 9)∼1578(선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로(景老), 호는 사암(思菴). 전( * )의 아들이다. 
                                
1531년(중종 26)사마시에 합격하고 1532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관직이 
예빈시 주부를 거쳐 지평·장령·부교리·집의·직제학에 이르렀다. 1542년 
감찰로서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이듬해 부제학이 되고, 우승지 등을 거쳐 명종 때 황해도관찰사 
·형조참의·병조참의·경기도관찰사·호조참판·한성부우윤·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때 형조참판·한성부판윤·호조판서를 지내고, 1578년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청백리(淸白吏)로서, 권신 윤원형(尹元衡)이 첩으로 정부인(正夫人)을 삼은 데 
대한 사실 여부를 밝히라는 왕명을 받들고 조사하던 중 윤원형이 이를 알고 
뇌물로 이를 무마하려 하자 완강히 거절하여 사람들이 후사(後事)를 두려워한 
일도 있었다. 선조 초에 육조의 장을 추천하라는 왕명이 있자 모두가 서슴없이 
그를 추천할 만큼 명망이 있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사진은 그의 필적.  

참고문헌 : 中宗實錄,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鄭旿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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