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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12월 23일 일요일 오전 11시 48분 42초
제 목(Title): 도정일/ 잘가라 2001년이여 


출처: 한겨레 

잘가라, 2001년이여/ 도정일


 
시간의 흔한 비유는 화살이다. `살 같은 세월'이라는 상투어구는 시간의 빠름에 
대한 주관적 경험을 요약하지만 시간의 `되돌아오지 않음'과 지나간 시간 
속으로 `되돌아갈 수 없음'이라는 의미는 담고 있지 않다. 아닌게 아니라 
불가역성(不可逆性)은 시간과 공간을 갈라놓는 특성 같아 보인다. 서울, 부산 
같은 공간적 지점 사이에서는 얼마든지 반복 왕래가 가능하다. 그러나 만약 
부산이 시간의 한 지점이라면 그 부산으로 우리는 다시 되돌아가지 못한다. 
화살이 되돌아오지 않듯 시간도 유-턴 하지 않는다. 한 해를 보내면서 사람들이 
송년회라는 이름의 보내기 의식(儀式)을 치르는 데는 시간의 이 매정한 
일회성에 대한 아쉬움도 섞여 있다. 

2001을 보내면서 우리는 이런저런 감회에 젖고 기억할 일과 잊어버릴 일의 
목록도 만들어본다. 매체들은 2001년의 최대 사건, 최악의 사건 같은 분류 
범주로 한 해를 정리할 것이다. 금년은 아무래도 `최대 사건'과 `최악의 
사건'이 일치할 공산이 크다. 911 뉴욕 테러가 그것이다. 금년에 태어난 
아이들은 후일 `2001년생'보다는 “넌 말야, 뉴욕 테러 일어나던 해에 
태어났어”로 기억될지 모른다. 우리 국내에서의 금년 최대 뉴스는 무엇이고 
최악의 뉴스는 무엇일까? 

매체들이 결코 선정하지 않을 것 중에서 나더러 국내 최대 사건과 최악의 
사건을 꼽으라면 최대 사건은 `영어 붐'이고 최악의 사건은 영어 잘 하라고 
부모들이 아이들 잡아다 `혀 수술'시킨다는 뉴스다. 내가 이것들을 최대 사건과 
최악의 사건으로 꼽는 것은 거기에 우리 사회의 광기와 착각이 모두 응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광기와 착각의 밑바닥에는 세 개의 핵심어들이 깔려 있다. 
세계화, 경쟁, 시장이 그것이다. 세계화 시대는 `무한경쟁시대'니까 거기서 
살아남자면 `경쟁력'만이 최선의 장비라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광기이다. 이 
광기를 부추기고 뒷받침해주는 것은 세계화, 경쟁, 시장에 대한 `착각'이다. 

착각 1호는 “경쟁이 선이다”라는 주장으로 대표된다. 착각 2호는 “세계화가 
대세이고 대세는 선이다”로, 착각 3호는 “시장시대에 시장 이상의 선은 
없다”로 요약된다. 경쟁, 세계화, 시장이 모두 `선'이므로 그 선을 추구하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옳고 윤리적으로도 정당한 것이 된다. 세계화, 경쟁, 시장에 
이처럼 선의 차원이 부여된 것이야말로 현대 한국인의 가치체계에 발생한 
결정적 변화이다. 시장에서의 성공이 윤리적 정당성을 동시에 확보할 때 그 
성공의 추구는 더 이상 광기나 착각일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런데 그 인식은 착각이고 오류이다. 물론 경쟁은 선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끝없이 추구해도 되는 무한선(無限善)이 아니라 어떤 다른 가치들에 
의해 제한되어야 하고 한계가 그어져야 하는 `유한한 선'(有限善)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빠져 있는 인식오류는 유한선으로서의 경쟁을 무한선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이 착각 때문에 경쟁은 절대선 같은 `폐하'의 위치로 
올라서고 모든 다른 가치, 시민적 덕목, 공동체적 고려사항들은 그 폐하 앞에 
꿇어 엎드려야 한다. 경쟁이 무한선으로 여겨지는 곳에서 `공동체 사회'는 
불가능하다. 그런 경쟁은 반사회적이고 반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경쟁의 이 
파괴력을 인식하지 않는 것이 바로 광기라는 것이다. 광기 사회의 불쌍한 
아이들은 영어를 위해 혀 수술을 받아야 하고 만약 중국어가 세계어가 되면 그 
때에는 또 중국어를 위해 혀 수술, 코 수술을 받아야 한다. 

같은 이야기를 우리는 세계화와 시장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이것들 역시 
무한선이 아니라 제한되어야 하고 현명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한선에 속한다.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지만, 어떤 시간대에 형성된 가치체계는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한 사회 내부에 고착되어 비슷한 고통의 시간들을 반복하게 한다. 
2001과 함께 우리가 떠나보내야 할 것은 우리의 사회적 광기와 착각이다. 잘 
가라, 2001년이여. 

도정일/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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