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12월 4일 화요일 오후 12시 37분 40초 제 목(Title): 박노자/ 서구중심의 문화의식 출처: 한겨레 21 [ 박노자의 북유럽탐험 ] 2001년11월28일 제386호 제국주의가 강요한 서구 중심의 문화의식… 우리는 과연 평등한 세계로 갈 수 있을까 사진/ 서구 이외의 지역을 무조건 '아래로 보는' 서구인들의 오만한 문화의식은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SYGMA) 한 사회의 대외관(對外觀)을 보면, 그 사회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 적지 않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구미인들을 우대하는 반면 대다수 아시아 나라 출신들을 '아래로 보는 ' 현재 남한의 일반적 대외관에서, 전통시대 중국 중심의 화이(華夷) 구별 의식과 현대 미국식의 서구 중심주의·인종 차별주의등, 한국인들이 내면화한 역대 헤게모니 세력들의 헤게모니가 만들어낸 외부세계 서열화의 패턴은, 결국 새로운 패권 세력인 미국에 의해서 그대로 재활용된 셈이다. 마찬가지로 건국 초기부터 비잔틴제국의 문화·종교적 헤게모니를 인정한 러시아도, 18세기 초에 이미 굳어진 서열적인 세계관을 다시 서구 중심의 세계체제를 그대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활용했다. 서구에 대한 문화·경제적 열등감을 전혀 극복하지 못한 러시아 지배층의 비(非)서구지역들에 대한 태도는 체첸족에 대한 민족말살정책과 같은 대형 제국주의적 범죄에서 잘 나타난다. 20세기 초의 노르웨이와 한국 노르웨이도 과거 한국이나 러시아처럼 해당 문화권의 주변부에 처해 있었던 만큼, 그 지배층의 대외관은 애당초 '변방' 으로서의 열등의식과 '중심부' 문물 제도에 대한 흠모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년 전 바이킹시대 노르웨이 추장들이 가장 흠모했던 서구가 아닌 비잔틴제국과 아랍세계였다. 삼한시대의 족장들이 한나라의 구리거울과 동전, 인장들을 권위의 상징으로 여겼듯이, 바이킹의 우두머리들이 아랍의 금속공예품과 동전을 최고 가치의 위신재로 여겼다. 아랍과의 교역이 활발했던 바이킹시대가 막을 내린 뒤에 노르웨이 지배층들이 '문명의 모범' 으로 삼은 새로운 준거(準據)집단은 북부 독일과 네덜란드 등의 신흥 상업지역들이었다. 현 노르웨이 국어사전에 들어있는 단어들의 약 40%가 독일어에서 차용된 것은, 몇백년 전 노르웨이 식자층의 대독관(對獨觀)을 잘 보여준다. '선진문화'를 수입하는 데에서 중개 역할을 했던 것은 19세기 초까지 노르웨이를 정치적으로 지배했던 덴마크였다. 19세기 초 노르웨이의 지성인이란 프랑스와 독일 철학자들의 원서를 교양으로 삼고, 프랑스어와 독일어, 영어에 능통하고, 프랑스·독일에서의 외유를 즐기며, 덴마크어로 쓴 자신의 논문이나 책을 덴마크에서 내는 '국제인'이었다. 그들은 노르웨이의 '후진적인' 현실을 언제나 서구의 계몽주의·낭만주의 등 보편적 가치의 입장에서 엄격히 질책하곤 했다. 이와 같은 종류의 문화적인 '중심부 지향주의'는, 같은 시대에 청나라의 언어와 문물을 철저히 습득·흠모하고 청나라 여행 기회를 귀중히 여기고 청 지식인과의 교류를 가장 즐기고 조선의 '비루함'을 통렬히 비판했던 박제가(朴齊家)류의 북학파 정신세계와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그러나 20세기 초 노르웨이와 한국 역사는 서로 완전히 다른 길로 가게 된다. 제국주의 세력의 각축장이 된 한반도에서 전통적인 대중(對中) 흠모의식의 젊은 개화파들의 대미·대일 흠모·열등의식으로 대체되어 그 변질된 형태로 오히려 고질화되는 시기에, 노르웨이 자본주의는 고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의 대외교섭권이 박탈된 1905년에 노르웨이는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했다. 한국 역사의 '암흑시기'로 남은 1910년대에, 제1차 세게대전에서 중립을 지켰던 노르웨이는 양쪽과의 활발한 무역을 통해 상당한 부국(富國)이 됐다. 제3세계는 '위험·불법·비위생' 사진/ 재노르웨이 아프리카청소년단체 사이트. 별다른 제도적인 차별을 당하지 않는 그들은, 그래도 아직까지 '남'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와 같은 차이의 연장선상에서, "조선인의 열등한 형질과 성격, 풍습을 개조하자"는 열등감 짙은 운동을 벌였던 1910~20년대 조선의 근대 지향적 지식인들과는 대조적으로, 그 시기 노르웨이의 보수적인 지식인들은 우월심에찬 배외(排外)의식을 보이기 시작했다. 세계대전이 끝난 뒤 빈곤에 허덕이고 각종 혁명에 휩싸였던 유럽은, 더 안정된 노르웨이의 보수적 부르주아·지식인들에게 이제는 '위험'과 '동요'로 여겨졌다. 특히, 노르웨이 부르주아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노르웨이 이민은 엄격하게 규제됐다. "노르웨이는 노르웨이인들을 위한 나라"와 같은 표어들을, 1920~30년대의 보수 일간지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5년 이후 노르웨이에는, 미국의 헤게모니로 인하여 자본주의 존속이 보장되고 혁명이 차단된 서구가 '위험지역'이 아닌 '동반자'로 비치기 시작했다. 노르웨이 수출의 77%를 받아주고 대부분의 노르웨이인들이 2~3주씩 휴가 때 가서 쉬는 유럽연합(EC)은 이제 '남'이라기보다 노르웨이인들의 생활·경제 공간의 일부가 됐다. 그러나 노르웨이가 갖고 있던 기존의 배타적 의식은, 이제 제3세계를 상대로 분출됐다. 물론 노르웨이에서는 10년 동안 100여명의 아시아·아프리카인들의 신나치로부터 살해·부상당한 독일처럼 길거리에서 파쇼들의 공격이 일반화된 것도 아니다. 또한 제도적 차별 장치들이 특별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비서구 계통의 외국인들에게도 예절을 지키는 대다수의 노르웨이인들은, '그들'을 '위험', '불법', '비(非)위생'과 동일시하려는 내면적 경향이 매우 강하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50% 이상의 노르웨이인들은 "비서구 계통의 이민자들이 범죄를 더 많이 저지른다"라고 생각한다. 노르웨이인이나 서구인들의 짐은 보통 검사하지 않는 노르웨이 공항의 세관 관료들이 '제3세계의 국민' 으로 보이는 여행객들의 하물은 열심히(?) 조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근거있는 일일 수 있으나 병원마다 "유럽연합 이외의 국가로 여행할 때는 예방주사를 꼭 하고 가세요!"와 같은 플랜카드를 볼 때마다 '동양'과 '비(非)위생', '질환'을 동일시하는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이 어느정도 강한지 실감한다. '어리석은 세계의식' 을 고치자 사진/ 노르웨이에서도 인기를 모은 나이지리아 가수 펠라 쿠티에 대한 노르웨이 사이트. 그러나 이와 같은 경우는 아직까지 예외에 속한다. 비(非)서구지역을 '위험과 불안정의 공간'으로 보는 대다수 노르웨이인들은 전통적인 서구 중심의 문화의식을 지니고 있다. 독일·오스트리아의 고전음악이나 덴마크·스웨덴의 문학, 프랑스의 미술을 자기 나라 것처럼 익히 아는 노르웨이인들은, 비(非)서구지역에 '근대적 문화'가 있다는 사실 자체에 거의 전적으로 무지하다. 필자가 크게 놀랐던 일은, 다름 아닌 동양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1910~20년대 동아시아의 문학적 근대의 모색을 이야기하면서 일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중국 루쉰등 2명의 대표적인 동아시아 현대 작가를 언급했을 때, 학생들 중에 이 작가들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없었다. 물론 한국문학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는 사람이 전무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일이다. 한때 노르웨이 문호 입센(Ibsen)을 애독했던 아쿠타가와 루쉰, 그리고 웬만한 유럽인보다 유럽문학을 더 아끼는 현재의 많은 동아시아 지식인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 무언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금치 못한다. 서구 이외의 지역들을 '아직 근대가 없는 위험하고 비위행적인 주변부' 정도로 파악하는-그러면서도 수많은 비(非)서구인들의 흠모와 선망의 대상이 되는- 대다수의 노르웨이인들은, 문화·의식 차원의 오리엔탈리즘을 넘지 못한 측면에서 대다수의 서구인과 과연 다른가? 이처럼 오만하다고 할 정도로 자기 중심적인 국민들을 '중심부'로 인정하는 세계체제는, 과연 미래에 좀더 평등하게 재편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되려면 적어도 세계 체제의 주변부·준(準)주변부에서부터, 서구를 무조건 우대하고 나머지 지역- 그리고 특히 자신들의 문화유산- 을 '아래로 보는' 제국주의에 의해서 강요된 어리석은 세계의식을 하루빨리 고쳐야 할 것이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