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12월 1일 토요일 오후 07시 16분 10초 제 목(Title): 이정우/ 선과 악의 양극화 출처: 한겨레 21 [ 이정우의 철학카페 ] 2001년11월28일 제386호 초월을 꿈꾸는 악몽의 판타지 이정우의 철학카페 6|선과 악의 양극화 그로테스크문화의 원조로 꼽히는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극단적 화풍 사진/ <세속적 쾌락의 동산>, 220×195cm,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전통적인 윤리와 도덕은 선(善)을 추구해왔다. 선이 ‘옳음’으로 이해될 때 도덕이 성립하고, ‘좋음’으로 이해될 때 윤리가 성립한다. 각 시대, 각 문화는 자신들의 선 개념을 절대시했지만 오늘날 문화 상대주의, 시대 상대주의는 상식이 되었다. 선은 다양한 의미를 띠고서 문명사를 수놓아왔다. 선이 일정한 형태로 규정되려면 악 역시 규정되어야 한다. 선이 옳음으로 규정되면 악은 그름이 되어야 하고, 선이 좋음으로 규정되면 악은 나쁨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선의 개념과 악의 개념은 맞물려 성립한다. 선악이 날카롭게 맞선 기독교문화 선의 개념이 절대화되면 그에 맞물려 악의 개념 역시 절대화된다. 선과 악의 거리는 함께 맞물려 작아지기도 하고 커지기도 한다. 문화에 따라 선과 악의 거리는 다르다. 좋음과 나쁨 정도의 관계로 비교적 짧은 거리에 놓이기도 하고, 옳음과 그름으로서 더 먼 거리에 놓이기도 한다. 선이 절대시되면 악 역시 절대시된다. 선과 악 양자를 모두 절대시할 때 선과 악의 거리는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없는 최대치에 달한다. 이렇게 선을 절대시함으로써 악 역시 절대시하고, 그래서 선과 악이 절대 모순의 관계에 놓이는 문화, 흑과 백처럼 선악이 절대적으로 날카롭게 대립하는 문화, 그런 문화의 대표적인 형태는 바로 기독교문화이다. 신과 신의 선함, 신의 섭리가 절대화되면 그 짝으로서 악마, 사탄의 이미지도 절대화된다. 따라서 세계는 여호와와 사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인식되고(물론 최후의 승리는 여호와로 이미 정해져 있지만), 세상의 모든 더럽고 추한 것들은 악마라는 존재에게 귀속된다. 즉, 세상의 모든 악들이 그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악마라는 어떤 단일한 존재에게 귀속됨으로써 일관성 있게 정리되는 것이다(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 악들의 좀더 실질적 맥락들은 묻혀진다). 중세 말기는 이런 기독교사회가 그 문화를 떠받치던 사상적-문화적 배경에 대해 일종의 피곤함을 느끼던 시대이다. 페스트가 창궐해 무수한 인명을 빼앗았다. 교회에 모여 기도를 드리던 사람들은 바로 그 때문에 더욱 참혹한 피해를 입곤 했다. 십자군 전쟁은 ‘승리’에 대한 (너무나도 당연했던) 기대를 번번이 무너뜨리곤 했다. 당시에 유행하던 ‘순례자’의 이미지가 보여주듯 인생이란 힘겹고 고달픈 여행으로 표상되었다. 악마의 얼굴이 갈수록 인생의 한가운데에서 어른거리곤 했다. ‘죽음의 무도’가 유럽 곳곳에서 발생했다. 죽음, 악마의 유혹, 최후의 심판(“심판의 날이 다가왔노라!”), 육욕(肉慾)에 대한 공포, 지옥의 비명소리, 병과 전쟁, (17세기까지도 계속된) 마녀사냥이 삶을 짓눌렀다. 인간의 본질은 ‘어리석음’으로 표상되었다. <바보들의 배>(브란트)가 말했듯이, “온 세계가 어둡고, 맹목적과 죄악이 끊이지 않고, 거리마다 바보들로 가득하다.” 메디치가의 우아한 문화와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휴머니즘에도 불구하고 중세 말기와 르네상스시대는 힘겨운 시대였다. 너무나도 기괴해서 도덕적인 그림들 사진/ <바보들의 배>, 1485~1505, 57.8×32.5cm, 파리 루브르미술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그 기괴하고 흉측한 그림들, 비위 약한 사람이 처음 보았을 때 점심 식사를 거르거나 잠을 설치게 만드는 그 기괴한 그림들은 이런 시대의 현실과 그 현실에 대한 과도한 비판, 그리고 그 현실을 초월하고 싶은 과도한 열망이 뒤덮인 악몽의 판타지를 표현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쉬의 그림은 그 외관과 달리 지극히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그림일 것이다. 극한에까지 이른 악을 보여줌으로써 역으로 그 악의 반대편에 있는 선을 지향하는 것, 그것이 보쉬 그림의 핵심이 아닐까. 아니면 진정 보쉬는 악마가 더 주인공인 이단 사상에 심취했던 것일까? 어쨌든 설사 그의 의도가 도덕적인 데 있었다 해도, 그의 그림은 결국 삶의 공포와 악마의 힘을 표현하는 데 더 뛰어났고 또 그렇게 영향을 끼쳤다고 해야 하리라. <마지막 에반겔리온>의 그로테스크한 그림들은 보쉬를 연상시킨다. <광기의 역사>(푸코 지음)에서도 몇번 언급되는 <바보들의 배>는 성직자 계급의 타락상을 그대로 드러낸다. 배는 순례로서의 인생을 함축한다. 베긴 수도회의 수도사와 두 수녀가 주지육림의 쾌락에 빠지고, 르네상스 시절 신성한 광기와 어리석음을 함께 담지했던 광대가 우스꽝스러운 현실을 풍자한다. 깃발에는 십자가가 아니라 투르크풍의 초승달이 그려져 있고, 음탕한 노래가 질펀하게 흐른다(음악은 전희를 상징한다). 구워진 거위가 안주가 되었고(칼 오르프의 극음악 <카르미나 부라나>에 등장하는 거위를 연상시킨다), 어떤 사람은 술잔을 들고 헤엄치면서 배를 따라온다. 겉으로는 신앙심과 도덕을 외치지만 그런 가치에 심한 권태를 드러내면서 쾌락에 몸을 내맡기는 나약하고 모순된 인간 군상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육욕으로 가득 찬 세상을 그린 <세속적 쾌락의 동산>은 온갖 형태의 섹슈얼리티가 난무하는 거대한 동산을 나타내고 있다. 거품 속에 갇혀 발버둥치는 남녀, ‘조개’ 속에 숨어 불륜을 저지르는 남녀, 다양한 변태적 행위들이 묘사된다. 마치 현대의 도색 잡지에서 묘사되는 혼음(混淫)장면을 연상케 한다. 음부를 손으로 잡은 채 물 속에 거꾸로 박혀 있는 남자, 상대방의 엉덩이에 꽃을 집어넣는 여자 등도 등장한다. 이렇게 온갖 육욕에 취한 인간 군상이 현실의 악을 그린다면, 최후의 심판을 그린 여러 그림들은 그러한 죄들이 심판받는 장면들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지옥을 그린 몸서리치는 그림들 역시 이런 갖가지 죄들에 대한 신의 엄벌을 그린다. <일곱 가지 큰 죄와 네 가지 종말> <지옥에서 벌을 받는 저주받은 자> <지옥의 콘서트> <희생자를 꼬챙이에 끼워 굽는 악마> <지옥의 나무 인간과 불타는 건물> 같은 무수한 그림들이 이런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신의 심판을 묘사하는 잔혹의 미학 사진/ <죽음의 승리>,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다른 문명들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악은 대개 이방인들이나 동물들로 표현된다. 다른 것, 타자, 낯선 것에 악한 것이라는 이미지가 투영된다. 그래서 보쉬에게서도 우리는 늘 악한 것이 이국적인 것, 동물적인 것과 굳게 결부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보쉬의 상상력은 놀랍다. <산해경>을 장식하는 기괴한 존재들도 보쉬 그림에 등장하는 괴물들에 비하면 차라리 귀엽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그의 상상력은 끝닿은 데 없이 기괴하다. 보쉬의 이런 그림들은 뒤에 많은 아류를 낳지만 브뢰겔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후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브뢰겔의 <죽음의 승리> 역시 르네상스의 잔혹함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그뒤 숱한 모방 작품들을 낳곤 했다. 만일 오늘날의 시대를 장식하는 한 흐름이 그로테스크문화라면, 보쉬야말로 그런 흐름에 상상력을 불어넣는 ‘원조’가 아닐까. 철학아카데미 원장 pathos77@hot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