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11월 17일 토요일 오후 12시 07분 00초 제 목(Title): 이정우/ 석도의 화론 출처: 한겨레 21 [ 이정우의 철학카페 ] 2001년11월14일 제384호 막힘없는 붓질로 뜻을 새긴다 이정우의 철학카페4|기운생동(氣運生動)의 미학(II) 동북아의 기학적 미학 드러낸 석도의 화론… 하늘이 내린 감수성에 분별의식 있어야 사진/ 석도 <양쯔강의 가을> 명말 왕부지(王夫之)보다 한 세대 일찍 살았던 석도(石濤)는 기운생동의 미학을 한 차원 끌어올린 독특한 미학 세계를 전개했다. 그가 남긴 <고과화상화어록>(苦瓜和尙畵語錄)은 기(氣)의 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손꼽힌다. 당대는 사혁의 육법이 화단을 지배하면서 그림 그리기가 지나치게 규범적이 되었고, 또 남종화와 북종화의 파벌의식이 강했을 때이다. 석도는 한편으로 기학에 기반하는 일획(一畵)의 미학을 제시해 기의 미학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고, 다른 한편으로 강렬한 개인주의를 주창함으로써 동북아 미학사에서 근대성의 문턱을 넘어선 인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무에서 유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는 절대 무도 상대 무(=부재)도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잠재성으로서의 무이다. 예술은 그 무한한 잠재성의 한 가닥을 끄집어내는 과정이다. 예술은 카오스를 코스모스로 변형시킨다. 그러나 카오스는 무질서가 아니라 무한한 질서이다. 그 무한한 질서의 한 가닥을 잡아내는 것이 예술이다. 마음·몸·붓이 통일된 일획을 위하여 석도는 “太朴一散而法立矣”라 했다. 태박은 또한 ‘太樸’으로서 근원적 카오스이다. 인간의 어떤 작위도 들어가지 않은 통나무와도 같다. 이 상태에는 어떤 규범도 작위도 들어 있지 않다. 그래서 석도는 태고(太古)에는 법이 없었다고 말한다. 거기에 법을 주는 것은 바로 일획(=한번 그음)이다. 일획이란 무한한 잠재성/무로부터 현실성/유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다. 일획을 그음으로써 모든 것이 시작된다. 그래서 그것은 모든 존재들의 바탕이요, 모든 현상들의 뿌리이다. 한번 긋는다는 것은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 즉, 기의 움직임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 움직임의 실마리는 어디에 있는가? 석도 미학에서 긋기는 마음에 따른다. 마음은 일획을 가능하게 하는 동인이다. 마음은 어떻게 일획을 가능하게 하는가? 팔을 움직임으로써이다. 마음이 팔을 움직이고 팔과 손은 붓을 움직이고 붓은 일획을 만들어낸다. 석도 화론은 마음, 몸, 붓으로 전달되는 기의 운동을 통해 성립하며 일획에 모든 기운을 집중시킨다. 그러나 그림은 주관적 계기에 의해서만 성립하지는 않는다. 주관과 객관의 조율을 석도는 “정(情)을 운용하고 경(景)을 본뜬다”고 표현한다. 경은 ‘풍경’(風景)의 경으로서 객체의 모습을 뜻하며, 정은 주체의 감성을 뜻한다. 경은 지각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어온다. 그러나 그 경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기에 이미 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은 우리 마음으로부터 객관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정이 전적으로 순수하게 표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이 이미 거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정과 경의 조율이 그림 그리기의 중요한 측면으로서 등장한다. 이런 조율이 충분해야만 비로소 화가의 뜻(意)이 밝아지고 붓질(筆)에 막힘이 없게 된다. 이렇게 막힘이 없게 되는 경지를 석도는 ‘눈뜸’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어떤 경지에 오를 때 “눈을 떴다”고 표현한다. 일획이 밝아지면 눈에 장애가 없게 된다. 즉, 눈꺼풀에 붙어 있던 무엇인가가 떨어져나가면서 눈은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때 그림은 마음을 따를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눈을 떴다는 것은 ‘눈’과 ‘마음’ 사이에, 보는 것과 아는 것 사이에 가로놓여 있던 두꺼운 장벽이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 눈은 인식 주체가 세계와 만나는 매듭이다. 더 정확히 말해, 인식 주체와 세계는 갈라져 있다가 접촉한다기보다 눈 속에서 이미 하나의 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몸이 형성하는 장과 마음이 구성하는 장 사이에는 충돌이 있을 수 있다. 화가의 눈이 속박에서 벗어날 때 그 충돌은 해소되며 정과 경이 일치하게 된다. 속박에서 벗어나는 눈뜸… 개인의 주체성 강조 사진/ 석도 <물가에 앉아 있는 사람>(위). <하늘의 문으로 가는 돛단배>(아래). 이러한 통일은 또한 묵과 붓 사이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먹이란 하늘이 준 것이다. 붓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따라서 묵과 붓이 통일된다는 것은 하늘과 인간이, 자연과 작위가 통일됨을 뜻한다. 이렇게 마음, 어깨, 손, 먹, 붓 등등이 통일된다는 것은 곧 기(氣)가 막힘없이 흐른다는 것, 마음을 중심으로 모든 기가 물 흐르듯이 흘러간다는 것을 뜻한다. 붓과 먹이 통하면 인온(絪縕)이 된다. 인온이란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 상태이다. 즉, 모든 기가 통일되는 상태이다. 거기에 일획이 가해짐으로써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것이다. 석도의 미학은 이런 기학적 바탕 위에서 예술가 개인의 자각이라는 요소를 수놓는다. 예술에서 전통과 개인은 늘 문제가 된다. 석도는 말한다. “전통을 몸에 갖추되 새롭게 창조하라.”(具古以化) 여기에서 화(化)는 변(變)과 대비된다. 변이 ‘change’라면 화는 ‘transformation’이다. 여기에서 ‘transformation’은 ‘변형’이라기보다는 ‘변환’(變換)이다. 그것은 완전한 재창조이다. 예술가는 전통을 익혀야 한다. 그것도 잘 익혀야 한다. 그러나 사다리를 타고 전통의 높이에 올라간 뒤에는 그 사다리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의 독창성에 몸을 맡겨야 한다. 이런 이유로 석도는 당대의 순응주의와 모방주의를 질타하면서 강렬한 개인주의를 제창한다. “나의 나-되기는 나의 존재가 스스로 존재함이다.”(我之爲我 自有我在) 어찌 옛사람의 수염과 눈썹이 내 얼굴과 눈에 날 수가 있으며, 어찌 옛사람의 오장육부가 그대로 내 뱃속에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인가? 석도는 나의 나-되기를 몸이라는 원초적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 석도는 화가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함으로써 동북아 미학에서의 근대성의 문턱을 밟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체성은 수(受)와 식(識)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석도는 수를 앞에 놓고 식을 뒤에 놓는다. 수는 하늘이 화가 개인에게 준 감수성이다. 이 감수성의 수준이 화가의 수준이다. 스피노자도 감수성을 그토록 중시하지 않았는가. 빼어난 감수성을 지닌 화가를 우리는 천재라 한다. 석도는 동북아적 형태의 천재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감수성이 있고서 분별의식이 있다. 분별의식이란 이미 화가의 감수성이라는 토대 위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별의식이란 분석적 이성이다. 화가에게서는 감수성이 분석적 이성에 앞서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감수성과 분석적 이성(칸트의 오성)이 통합될 때 빼어난 예술이 도래한다. “상상력과 오성의 자유로운 유희”라는 칸트의 생각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혼연일체 순간에 화가 감수성 최상 석도의 화론은 기의 화론이며 일획의 화론이며 감수성의 화론이다. 석도는 화가와 세계가 기의 혼연일체를 통해 통합되는 경지, 그리고 거기에 일획이 가해짐으로써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창조의 순간, 그리고 그런 순간은 화가의 감수성이 분석적 이성을 이끌면서 통합될 때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우리는 석도의 화론에서 동북아 특유의 기학적 미학, 그리고 독창적인 일획의 미학, 그리고 화가의 근대적 주체성에 대한 미학이 수준 높게 수립되어 있음을 본다. 철학아카데미 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