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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10월 31일 수요일 오전 05시 56분 29초
제 목(Title): 진중권/ 도올 김용옥이 본 언론 


출처: 조선일보 독자게시판 

작성자 : 진중권 작성자ID : pierot  작성일 : 2001-10-30   
 
 [문화]도올 김용옥이 본 언론 
"전두환의 최대의 업적은? 대통령 개나 소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도올의 명언이다. 하지만 이 괴짜가 가끔 말썽을 피우곤 한다. 철 
없는 애처럼 뗑깡을 피기도 하고, 자화자찬에 논리적 비약을 저지르기도 한다. 
강연을 할 때에는 무슨 대중 선동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텔레비전 방송을 중단한 후 도올의 모습이 달라졌다. 논리도 무르익고, 
자세도 대단히 성숙해졌다. 최근 미국의 테러 사태에 대해 그가 입을 열었다. 
테러에 전쟁으로 보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그는 중국철학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어쨌든 그것이 본지의 일관된 주장이기도 하였기에 
본지에서도 도올의 이번 발언을 환영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도올이 이번에 언론에 대해 입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는 
성숙한 언론의 예로 한겨레와 경향신문을 들었다. 한겨레는 원래부터 뚜렷한 
성향의 독자를 갖고 공신력 1위를 자랑하는 신문이고, 경향은 소유권 문제를 
해결한 후 괄목할 만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도올의 눈이 열리고 있다. 
한겨레나 경향신문이 이 나라 신문의 평균수준이 되는 날, 그때 한국은 비로소 
선진국이라 불리워질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도올이 자신의 글에 붙인 
'추기'다. 

ps. 

군말: 어디서 들은 얘긴데, 불교가 다른 1신교에 비해 덜 공격적이 것은 
사실이다. 서양에서 불교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가 
전쟁을 한번도 치르지 않은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물론 전체 논지에 
지장을 줄 정도의 지적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소한 사실이라도 사실은 
사실이니까... 멀리 갈 것 없이 3국시대와 고려시대의 '호국불교'라는 것을 
생각해 보라. 


.................................... 

<追 記> 



요번 트윈·펜타곤 폭파사건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두 가지 점만을 여기 
덧붙이고자 한다. 제1의 논제는 한국의 언론의 대응이다. 트윈폭파사건이후 이 
세계를 실망시킨 것은 부쉬의 언변의 천박함이고, 또 무엇보다도 천편일률적인, 
자기 반성이 전무한 미국언론의 유치무쌍한 강변과 광변이었다. 이것은 물론 
사태의 심각성과 그 충격의 감정적 반향의 관성체계를 고려한다면 너무도 
당연한 본능적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언론은 최소한 어느 경우에도, 어떠한 
시급한 상황에도, 전체를 생각해야하며, 역사를 리드하는 지도적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전관(全觀)하며 조망하는 거리를 지녀야 한다. 언론은 본능일 수 없다. 

이에 비한다면, 한국언론은 대체적으로 균형있는 거리감각을 가지고 사태를 
정확히 조망하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특히 한겨례신문에 연속적으로 
등재된 논설들은 모두 인류보편사적인 공평한 감각과 인류애와 평화의 염원을 
일깨워 주었을 뿐 아니라 그 논리의 전개도 매우 정연했다. 나는 한국언론의 
성숙한 모습과 희망있는 비젼을 한겨례신문과 경향신문, 두 신문사의 최근 
동향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나의 구구한 논설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껴졌다. 계속 분투해주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사태가 자국에서 발생했다면 한국의 언론이 과연 그러한 
즉각적인 거리감과 균형감을 유지할 수 있겠냐 하는 것이다. 물론 유지할 수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인류애의 보편주의를 떠난 모든 애국주의는 저급한 
테러리즘의 변형일 뿐이다. 나는 이러한 사태를 통해 한국언론이 보편주의에 
대한 감각을 본질적으로 학습해가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나의 두 번째의 논제는 미국사회의 철학의 빈곤성이다. 제1의 논제가 
미국이라는 자유사회에 실제로 언론의 자유가 부재하다는 현상의 고발이라고 
한다면, 나의 제2의 논제는 더 근원적인 문제, 즉 사상 그 자체의 빈곤성에 
관한 것이다. 미국에는 현재 철학이 없고 예술만 있다. 즉 맨하탄에서 활개를 
치는 사람은 예술가들이요 사상가들이 아니다. 그러나 예술가들이란 근원적으로 
인간의 현실적 삶을 엔터테인하는 사람들이요, 이벤트성의 유통구조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며, 인류역사에 대한 근원적인 책임감을 소유한 사람들이 
아니다. 역사적 현상을 후속적으로 진단하거나 해석하거나 심미적으로 표현할 
뿐, 그 역사에 대한 강력한 가치판단을 가지고 그 역사를 리드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역사를 리드한다는 생각은 그들에게는 망념이요 독단이다. 

미국에는 물론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학인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학자들이 미국의 삶이 편하기 때문에, 미국이라는 문화환경이 그들에게 학문을 
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하기 때문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미국이라는 
역사에 대한 책임을 기피한다. 미국이라는 토양은 뿌리를 거부하는데 그 근원적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사상은 있으되 사상가가 없다. 가(家)라는 
구현체를 얻지 못한 추상적 논리체계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서양철학은 어떤 추상적 논리의 감옥에 갇혀버린 시체와도 같은 것이다. 

희랍철학은 근원적으로 전쟁철학이다. 희랍철학으로부터 출발한 서양철학이 
근원적으로 오늘과 같은 사태에 대해 심도 있는 발언을 하지 못하는 현상은 
결국 실체적 사유의 구극적 한계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서양철학은 평화의 
전통을 근원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언론은 매우 편파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편파적 언론이 그 
진가를 테스트받는 것은 오로지 역사의 실천력 속에서 판가름나는 것이다. 
불교는 기나긴 인류의 역사를 통해 대규모 전쟁의 주체가 되어본 적이 없다. 
불교는 종교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스람도 유대교전통의 한 변형이다. 
그리고 기독교도 유대교의 지류적인 변형이다. 우리 인류는 이 헤브라이즘 
전통의 실체주의·초월주의가 저지러온 죄악을 보다 깊게 통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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