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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오전 10시 20분 12초
제 목(Title): Re: [질문] 일본은 침입을 받은적이 있나?


몇년전에 주제관련글이 기억나서 긁어봤습니다. 


1443   kkkb    (혁이랑한방)10.8   136 [문의] 몽고의 일본침략
1444   xena    (warrioress)10.9   161 Re: [문의] 몽고의 일본침략
1448   kkkb    (혁이랑한방)10.9   122 Re: [문의] 몽고의 일본침략
1460   yan     (          )10.13  120 Re: [문의] 몽고의 일본침략
1461   artistry(설운도    )10.13  145 Re: [문의] 몽고의 일본침략
1480   guest   (guest     )10.20   81 Re: [문의] 몽고의 일본침략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kkkb (혁이랑한방)
날 짜 (Date): 1998년 10월  8일 목요일 오후 06시 39분 10초
제 목(Title): [문의] 몽고의 일본침략



 고려시대때  몽고군에 의해 침략받았던 당시 (아마 1260경) 

몽고와 고려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하려다 실패한 과정을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일반적인 책에서는 그냥 태풍(카미카제)에 의해서

 실패했다고 하는데 일본본토까지 상륙을 한 상태에서 어떻게 그런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xena (warrioress)
날 짜 (Date): 1998년 10월  9일 금요일 오전 09시 00분 52초
제 목(Title): Re: [문의] 몽고의 일본침략


제가 알고 있기로는..

당시 원의 황제가 유명한 쿠빌라이였죠..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도 
나오는...

그 사람은 비교적 온건한 사람이어서 처음에는 일본에 대해 회유책을 쓰려 
했죠.

그래서 고려 조정에 명하여 원의 뜻을 일본에 전하게 하였는데, 고려에서 몇번 

사신을 보내도 일본에서 시큰둥하게 나오자 쿠빌라이가 열을 받아 공격을 
명합니다.

주로 몽고병들로 이루어진 원나라 군대는 수전 경험이 없고, 선박에 대한 
지식도 

부족하여 고려에게 배 900척을 만들어내라고 요구하죠.

당시 고려는 몽고와의 전쟁이 끝나고 삼별초의 난까지 겪어 사정이 말이 
아니었는데

이를 감안하여 원나라에서 필요한 물자 지원을 해주었다고는 합니다.

그런데 정월에 배 건조 명령을 내리고 가을에 출병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몇달만에 

900척을 만들어 내는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당시 감독으로 파견된 원 
장수가 

하도 달달 볶아서 결국 완수해냅니다. 그 감독관의 아버지가 몽고 침략때 제일 

먼저 몽고에 귀화한 고려 장수이자 역적이었으니 그도 고려인이었죠.... 그런데 

고려에서 원나라와 사이가 좋아진 후 원 조정에 부탁을 하여 그 귀화한 감독 

아버지를 사형시키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 감독이 그렇게도 들들 볶은 
것이었지요. 

암튼 원의 2만 오천과 고려에서 차출된 8천 병력은 엄청난 전쟁물자와 함께 

구백척의 배에 나눠 타고 일본을 향합니다. 일단 쓰시마에 상륙하여 그곳 
영주의 

수비대를 전멸시키고 이끼섬도 박살낸후  일본 본토 섬중 하나인 큐슈에 
상륙하죠.

상륙한 그날 큐슈의 일부 지역을 그냥 휩쓸어 버립니다. 전술면에서는 일본은 
그런 

종류의 대규모 침략을 받아본적이 없어서 제대로 저항도 못했죠.

그날밤, 일단 확보한 땅에 진지를 구축하고 속전속결로 밀고 나가자는 고려군 

주장이 원나라 출신 사령관에 의해 묵살됩니다 

야습을 염려했기 때문인데. 원나라 군대가 바다를 건너 큰 규모의 상륙작전은 
아마 

처음 해봤기 때문이었는지 불안해 했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군사를 일단 모두 거두어 배위로 철수시켰는데 마침 그날밤에 갑작스런 

태풍으로 반 이상이 난파하여 죽습니다.

그래서 살아남은 잔존병력은 완전히 철수 합니다.

그 이후 몇년간 쿠빌라이는 다시 사신을 보냈는데, 자신감에 도취한 일본 

막부에서는 사신들을 오는 족족 참수해 버리고, 크게 노한 쿠빌라이는

엄청난 규모의 침략을 준비합니다.

고려에 다시 900척의 병선을 건조하게 하고, 4-5만의 원, 고려 연합군이 
고려에서 

출발하고 망해버린 남송의 군대로 구성된 10만의 별동대가 남쪽에서 출발하여 

합류하기로 합니다.

원, 고려 연합군은 먼저 도착을 하여 기선제압을 위한 공격을 감행하는데, 때가 

여름이어서 전염병이 돌고, 또 일본의 준비가 철저했기 때문에 1차때와 같은 

신속한 전진은 못하고 고전을 합니다. 그래서 남송병들과 합류한후 본격적인 
상륙 

작전을 펼치기로 결정하고 이끼섬으로 철수했는데, 남송병의 몽고출신 사령관이 

병으로?인해 교체되면서 출발이 늦어져 약속한 날짜에 도착도 못하고, 항로가 

바뀌는 둥, 통신의 두절로 예상보다  보름정도 늦게 합류하게 됩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다시 태풍이 와서 제대로 상륙도 

못해보고 거의 다 난파당하죠. 기록에는 3-4만명이 겨우 살아 돌아 갔댑니다.

두번의 실패로 어느정도 노하우를 터득한 쿠빌라이는 3차 원정 준비를 하던 
도중

남송 부활 움직임이 엿보이고 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세상을 떠버리고 일본 
정벌 

계획은 취소됩니다. 그래서 결국 원나라와 고려의 막심한 피해로 허무하게 

끝나버렸죠.

그런데 일본이 두번의 침공을 태풍때문에 막아내어 별 영향을 받지 못했다고 

많이들 알고 알려진듯 한데, 일본 내부에서도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고 합니다.

일단 이름뿐이던 조정과 귀족 세력들이 더욱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당시 실권층이던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외부의 

침략이었고, 새로 얻어진 영토가 없으니 전쟁에 참여했던 무사들에게 영토를 

나눠주지 못해서 무사들의 불만이 커진게 원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몇십년간 혼란기를 거치다가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하고 그틈을 
타서 

다시 천황의 세력부흥과 장군들의 이해관계가 뒤얽혀 남북조 시대가 열리죠.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kkkb (혁이랑한방)
날 짜 (Date): 1998년 10월  9일 금요일 오후 06시 37분 41초
제 목(Title): Re: [문의] 몽고의 일본침략



답변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가지 추가 질문한다면 그 당시 일본무사의 전투 형태가 주로 일대일 

대결이었다던데 자세한 전투형식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전투형식때문에 몽고군에게 초반 파죽지세로 밀렸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그리고 고다이고 천황때의 무사인 마사시게가 본래의 이런 일본전투방식

과는 현격히 다른 그러니까 대륙전투방식을 잘 이용했다고 하는데 아울러

마사시게에 대한 정보도 구할수 있었으면 합니다.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yan ()
날 짜 (Date): 1998년 10월 13일 화요일 오후 01시 07분 22초
제 목(Title): Re: [문의] 몽고의 일본침략



일본의 전투형태에 대해 흔한 이야기가 있죠.

두 지역간에 전투가 벌어지면 양쪽에 몇십명의 무사가 대치를 하고

그 주위에는 양쪽 일반 백성들이 에워싼다고 합니다.

무사들끼리 전투를 벌이고 백성들은 응원하다가

한쪽으로 기울어 항복하면 백성들은 승리한쪽으로 우루루 옮겨가는거죠.

친구의 아버지이자 재일사학자인 분으로 부터 우스개 소리 삼아 들었던

이야깁니다.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설운도)
날 짜 (Date): 1998년 10월 13일 화요일 오후 02시 28분 14초
제 목(Title): Re: [문의] 몽고의 일본침략



저도 그런 내용 들어봤습니다.

어차피 내전의 한계를 못벗어나고,
한 지역에 대한 주도권 쟁탈전이기 때문에,

싸움은 무사들끼리, 농민들은 옆에서 모내기하면서 구경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럴경우, 무사들은 갑옷을 화려하게 입고 좋은말 타고 나오면서

나는 ..성의 무사,쓰메끼리다 덤빌테면 덤벼라 
(인디애나 존스지요. 몽고군이 일몽사전들고 해석하면서 싸우는것도 아닌데,
활로 휙~ 쏘면 게임끝인데..:) )
이렇게 말하면서, 삼국지에 흔히 나오는(초기 황건적소탕무렵이지만)
일기토를 장렬하게 벌이는 것이죠.

그런데, 일본에서도 전국시대 접어들면서 총력전의 양상을 띄긴 한것 같아
보이는데, 그래도 이민족에 의한 철저한 파괴,대량학살,초토화는
절대로 겪어보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몽고-고려군에 의한 큐슈 초토화사건을 두고두고 회자하나 봅니다.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guest)  
날 짜 (Date): 1998년 10월 20일 화요일 오전 08시 10분 26초
제 목(Title): Re: [문의] 몽고의 일본침략


일본의 전쟁사를 보면 주로 수백, 수천명 단위의 소규모 전투가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철저한 무사들끼리의 전투였고, 무사 개개인의 능력이 전투 결과를 크게 
좌우했습니다. 또한 전투의 목적이 영지 수호, 혹은 쟁취의 경향이 주를 
이루었으므로 주민들을 전투에 동원한 예를 찾기도 어려우며 위에서도 누군가 
지적하셨듯이 외세의 침략에서 흔히 볼수 있는 무차별적 도륙이나 초토화는 
찾기 
힘들죠.
몽고 침략 당시 일본은 가마꾸라 막부가 통치하던 시절로서
당시의 일본군 무장을 보면 갑옷, 칼, 창, 궁시에 불과 했습니다.
개별적으로 보면 칼(일본도)는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었으나 장식적 성향이 
가장 
강하던 때여서 그 길이도 가장 긴 시기였고, 긴 칼은 소규모 접전에서 유리할뿐 
대규모의 병력이 교전하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방해가 되었습니다.(일본도는 
후기로 
갈수록 길이가 줄어드는 경향을 보입니다. 긴칼이 좋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
갑옷 역시 매우 발달해 있었으나 반면에 장식적 경향이 짙었지요. 그러나 
화려한 
갑옷은 대장만이 착용할수 있었으므로 별 상관은 없겠군요. 
활 역시 기마민족의 전통 궁시에 비해서 휴대에는 불편했으나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가 보병 전력으로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몽고/고려군은 일단 숫적으로 수만명의 단위였으므로 전략/전술 
차원에서 일본군의 상대적인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수만명의 병력을 이용하여 한번에 밀고 들어가는 인해전술은 일본에서 전례를 
찾을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의 무사들의 사기가 떨어질수 밖에 없었지요.
몽고 침략 이전의 일본 내부의 전투들은 어느정도 규칙에 의해서 게임 비슷하게 
이루어져 왔는데 반해 몽고군의 전투 방식은 무조건 상륙, 초토화, 전주민 
도륙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이러한 종류의 대규모 전투 한가운데에서는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는것조차 
쉽지 않은데, 이에 대한 훈련이 부족했다고도 볼수 있지요.
전술면으로 보더라도 몽고군은 이당시 이미 원시적이기는 하나 화약을 이용한 
병기를 운용하고 있었고, 이것이 주는 심리적인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숱한 
정복전쟁을 통하여 기병부대의 운용과 공성전에도 최고의 경지에 달해 있었던 
것이죠. 공성장비와 화약 무기는 송을 멸망시키면서 흡수한 중국 한족의 
기술이었습니다. 
개인장비로 보아도 최대한 휴대의 간편성이 고려되었기 때문에 갑옷은 가볍고 
활동에 편했으며(방어력이 약화된다고 볼수 있는데, 몽고군은 소형 방패를 
휴대했습니다) 도검과 궁시 역시 크기가 작은 편이어서 어지러운 접근전에서 
오히려 간편했습니다. 몽고군을 도와 전쟁에 참여했던 고려군 역시 숱한 침략을 
받아냈던 처지였으므로 병사들의 훈련도가 매우 높았을 것으로 예상할수 
있으며,
치열한 전쟁을 통하여 여러가지 살상 무기들이 발달했습니다. 전투에서는 
도검보다도 편곤(곤봉)이나 대부(전투용 도끼)등이 오히려 편리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여러가지 종류의 휴대용 무기가 발달했지요.
그에 비해 일본의 무사 문화는 그 자체가 귀족 문화였기 때문에 무기 체계에 
있어서도 실용성이 아닌 규율에 입각하여 발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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