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izoa (오월의첫날) 날 짜 (Date): 2001년 6월 3일 일요일 오전 11시 26분 09초 제 목(Title): 정진홍/ 둘 이야기 저도 하나 퍼올려 보려고 합니다. 종교학자 정진홍씨의 글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분이지요. --------------------------- 둘 이야기 모든 소리는 흔적을 남긴다. 나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소리를 지니고 있다. 언젠가 친구와 둘이서 동해안을 따라 겨울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내 삶은 암울했고 고독했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불투명하게 겹치고 있었 다. 그래서 떠난 여행이었다고 해도 좋다. 여행은 철저한 도피이 다. 아니면 환상의 추구이다. 우리는 차를 몰고 향방 없는 먼 길 을 달렸다. 나는 그렇게 달리면서 온갖 것을 잊고 싶었다. 그럴 수 있으리라 믿었다. 잊을 것조차 없는 처음 자리, 아예 없음의 자리에 도달하고 싶었다. 해가 지고 겨울밤이 을씨년스럽게 산자 락에 깔리는 즈음이면 바다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별과 파도 소리를 안고 낮선 길을 내내 달렸다. 그렇게 그렇게 달리면 살아 온 모든 시간이 어둠 속으로 잦아들면서 문득 새 시간이 동터올 것 같았다. 나는 그랬다. 그렇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친구는 그러한 내 감상 안으로 뛰어들어 내 질주를 멈추게 하곤 했 다. 어느 날, 밤이 이슥한 녘에 파도가 시끄러운 솔밭 속에서 차를 세웠다. 들리는 것은 파도 소리뿐이었다. 소나무들조차 어둠에 싸여 도무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파도 소리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휩싸고 있었다. 밤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별빛도 그 랬다. 그때 친구는 차의 오디오 세트를 틀었다. 첼로의 가락이 흘 렀다. 파도 소리와 달밤과 별빛과 첼로의 소리와 그것을 한꺼번에 담 아 연출해주었던 고요와 거기 있었던 나와 그 친구와 그러한 정 황이 낳았던 온갖 것. 그때 그 느낌을, 또는 그 경험을, 아직 사라 지지 않은 그 흔적을 나는 지금도 설명하지 못한다. 나는 그것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내가 지금 지니고 있는 것은 다만 '울림'인데, 그것은 이미 소리(sound)가 아니다. 그것은 목 소리(voice)이다. 그래서 소리의 들림은 내게 소리의 의미론을 빚 게 한다. 들린 소리의 울림은 내 안에서 그저 소리로 남지 않는 다. 그것은 목소리가 되어 내게 울림을 남긴다. 그 목소리의 파고 듦. 음악은 어쩌면 '소리의 목소리화'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금속과 현과 나무의 울림은 뜻과 생각과 그것들이 가진 결과 색깔과 모습을 담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드러내면 서 '사람 소리 답게' 내게 전해진다. 그것은 허성이 아니 다. 속속들이 꽉 들어찬 얼의 소리, 목소리이다. 나는 첼로의 선울을 들었다. 아니, 그것은 선율이 아니었다. 그 것은 절규였다. 꺼질 것 같은, 그러나 끝없이 무겁게 무겁게 내려 앉다가도 그 하강의 정서를 조금도 흩트리지 않은 채 다시 상승 하는 절규에는 발언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내가 외면하기에는 너무 절실한 직접적인 와 닿음이었다. 파도 소리로 하여금 그 절 규에 응답하도록 하고 말기에는 그 발언은 너무 분명한 언어였 다. 아니, 파도는 이미 첼로의 선율과 더불어 하나의 소리, 하나 의 목소리였다. 고요가 그렇게 그 절규를 무심하게 수용하고 있 는 것도 나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고요마저 내 편으로 만 들 수는 없었다. 고요도 첼로와 파도의 소리를 위해 벌써부터 소 리 바탕으로 있어왔다. 나는 초조했다. 나는 응답해야 했고 메아 리쳐야 마땅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소리도 발언하지 못했다. 발언할 수 없었다고 해야 옮다. 나는 미처 몫호리를 내지 못했다. 나는 겨우 침묵을 간신히 발언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데 그것 은 나도 모르는 언어를 쏟고 있었다. '너 왜 그러니' 내 발언되 지 않은 소리는 그렇게 울부짖으며 전율하고 있었다. '도대체 내 가 나를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러나 이 뒤의 발언은 실은 침묵 하는 발언에도 담지 못한 발언 이전이었다. 소리의 끝에는, 그래서 목소리의 끝에는, '너'가 있었다. 소리 는 실은 '너'의 발언이었다. 그래서 목소리였던 것인데, 그런데 그것은 낯선 만남이었다. 이미 소리가 목소리가 되었을 때부터 목소리는 언어였던 것인데, 그런데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온 갖 소리는 '너의 발언'임을, 그래서 언어 끝에는, 목소리 끝에는, 소리 끝에는, 언제나 '너'가 있음을 짐작도 하지 못했다. '너 왜 그러니?' 나는 그렇게 메아리친 것이었지만 나는 내 발 언이 어떤 논리적 필연에 의해서 생산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 렇게 응답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나도 모르게 소리지를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그것은 내 응답이었고, 내 언어였으며, 마침내 소리와 목소리와 그 끝에 있 는 '너'를 향한 것이었다. '너'에게 한 발언이었다. 너는 내게 내가 듣는 언어의 끝에 있다. 너는 내게 내가 듣는 목소리의 끝에 있다. 그렇게 너는 내가 듣는 모든 소리의 끝에 있 어 그 소리의 발화자이다. 나는 너를 그렇게 만난다. 네가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런 소리도 없다. 목소리가 있을 까닭이 없다. 내 발 언이 요청될 까닭도 없다. 발언하지 않는 침묵, 침묵하는 자아, 그것은 이미 살아있지 않다. 네가 없으면 나는 그렇게 없다. 너 와 나, 비로소 나는 내 존재를 확인한다. 그러므로 너의 출현은 갑작스럽게 내 앞에 전개되는 관계의 확 인이다. 벌써부터 그랬을 것인데 이제야 드러나는 새로운 지평이 다. 그 사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비롯하여 나는 홀로이기를 그 만둔다. 나는 하나이기를 그치는 것이다. 네가 있어 나는 비로소 현실을 빚는다. 하나란 하나이어서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언제 나 스스로 절대적이지만 아무런 실제성도 갖지 못한다. 그렇게 때문에 사실 하나란 비현실적인 것이다. 그러한 것은 없다. 그것 은 환상이다. 현실에 대한 어쩌면 일그러진 상이다. 있는 것 은 너 있어 있는 나이다. 나는 그렇게 실재한다. 그러므로 둘은 존재의 처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존재의 끝이기도 하다. 관계 를 배제한 존재란 없다. 둘을 벗어난 존재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나는 마침내 현실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둘이다. '내가 있는 것은 다만 네가 있기 때 문'이다. 그러므로 둘은 내 존재의 근원이다. 둘은 내 존재의 서 술 근거이고 그래서 존재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둘은 모든 존 재의 근원이기도 하다. 그런데 너와 내가 하나이기를 나는 바란 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네가 생가가고, 내가 바라는 대로 너도 바라고, 내가 행동하는 대로 네가 행동해주기를 바란다. 그러한 바람을 가지는 것은 나만이 아니다. 둘을 인식한 모든 인식주체 가 도달하는 필연이라고들 말한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진술에 동의한다. 분리를 전제하는 둘을 서술하는 것은 분열증이라고 말 하기도 한다. 나는 그렇다고 동의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내 경 험이 이를 증언하는 것을 나는 거역하지 못한다. 메아리는 발언 된 언어의 되울림이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너 있어 나 있음' 을 훨씬 넘어 '너와 나의 하나됨'을 과시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그렇다고 공감한다. 그러므로 둘은 현실적으로는 존 재의 처음이고 또 마침이어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여야 한다고 주 장하기도 한다. 나는 그러한 주장을 존중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 는 내 경험에서 그렇다고 하는 것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음을 확 인한다. 그런데 이 맥락에서 어느 틈에 나는 '하나와 둘의 소용돌이'에 깊숙이 빠져 허우적거린다. 나는 나의 현실이 비롯하는 둘의 현 존, 그런데 그 둘을 넘어서고 싶은 하나에의 희구, 이 소용돌이를 벗어나고 싶다. 둘과 하나, 어쩌면 찌들 대로 찌든 해묵은 갈등, 그러면서도 바로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새로운 인식의 갈등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는 그러한 내 소원이 왜 어떻게 비롯 했는지 모른다. 다만 나는 사람이, 그래서 삶이, 그러한 둘과 하 나의 논리로 다듬어질 만큼 소박한 것이 아님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일 텐데, 이것도 부족하다면 '나는 그렇 게 소박하고 싶지 않은 자존을 숨쉬고 있다'고 항변할 수 있을 뿐 일 텐데, 이러한 덧붙임이 앞의 설명을 더 모호하게 하고 말뿐이 리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뚜렸하다. 답답한 일이 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답답함 때문에 나는 '어림없는 소리'조차 짐짓 목소리와 언어를 빙자하여 발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나는 짐짓 이렇게 말하고 싶다. 둘은 셈하는 수가 아니다. 그것은 관계를 묘사하는 수사이거나 은유라고 해야 옳다. 무론 처음의 처으믄 하나였을 것이라고 예상해온 인간의 긴 역사 를 나는 간과하지 못한다. 문화사는 그러한 사실을 뚜렷하게 서 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신앙이라 부른다. 그리고 신 앙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삶의 경험을 어쩔 수 없어 몸부림하다 고백한 몸짓이라고 한다면 그 처음의 처음이 하나라고 하는 이야 기는 실은 둘이 둘이지 않기를 바라는 신화라고 해도 좋다. 신화 는 어치파 역사가 기술하는 한 편의 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 다면 근원이 둘이라는 주장이 수를 세는 언어가 아니듯이 처음이 하나라는 언어도 수를 세는 것은 아니다. 그 '하나'는 '둘'이 관 계 정황을 지칭하는 불가피한 수사적 언어이듯이 그 둘 에 관한 서술이 끝에 이르러 드러낼 정황을 묘사하는 '다른' 언어 이다.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고 하는 귀한 말씀을 나는 알고 있다. 그 수사적 서술은 셈하는 수사 자체의 상징성을 고갈시키기에 알맞을 만큼 분명하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들으며 내가 경험하는 것은 수사의 상징성이나 그 의미론 이 아니다. 나는 그 언어와 목소리와 소리의 끝에 있는 '너'를 만 난다. 그리고 나는 발언한다. 너의 발언에 내가 메아리한다 해도 좋다. '너 왜 그러니?' '내가 도대체 나를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나는 너와 더불어 둘이 되어 비로소 있는데, 그 둘은 둘이 아니 다. 그러나 그 둘은 둘이 아니되 하나도 아니다. 나는 그렇게 되 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어림없는 일이다. 아니, 그것은 하나, 둘, 셋, 넷, 하는 하나도 둘도 아닌 것인데 내 의식이 자꾸 그렇게 그 러한 쪽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만나는 너는 수가 열이어도 스 물이어도 천이어도 만난 것이면 너인데, 그래서 너와 나는 둘인 데, 그래서 만남은 어떤 경우에는 둘이고 둘이어야 하는데, 그래 서 둘만 있는 것이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라면 그 둘은 하나인데, 너 있어 나 있는 경험만이 내 삶을 이루는 것이라면 그것은 둘이 되 하나이고 하나이되 둘이다. 그러나 그 둘은 둘이되 수는 아니 며, 하나이되 그 하나도 수는 아니다. 이 정황에서 나는 마침내 너를 만난다. 아니, 나는 너를 만나 이 정황을 빚는다. 그렇게 너를 만나면서 바로 그 상황에서 나는 '사랑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것은 나도 모르게 내 안에 비장되어 있던 내 마지막 발언이다. 소리와 목소리와 언어의 끝에서 만나 는 너를 통해 나를 확인하면서 나는 그렇게 말한다. 나는 그 언어 이외의 어떤 내말한 언어도 이제는 내 속에 더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내 마지막 발언이어서 나 이전이고 나 이후이며, 인간 이 전이고 인간 이후이고, 삶 이전이고 삶 이후이며, 신 이전이고 신 이후이다. 아니 신도인간도 삶도 나도 그 안에 있다고 해야 옳 다. 존재는 둘의 상황 속에 있다. 그리고 그 상황을 사랑이라 이 름한다. 그래서 둘은 하나이다. 나는 너 있어 있다. 나는 그 상황에서 '사랑한다'고 말한다. 고 통도 거기 있고 즐거움도 거기 있다. 그 발언 속에 있지 않은 고 통이나 즐거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한 고통과 즐거움이란 없다. 있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다. 참 딱한 착각이다. 때로 나는 그 속에서 삶을 수줍게 만난다. 사물을 그렇게 만난다. 둘이면서 둘 아닌, 그런데 하나이면서 하나 아닌 그것 안에서 그렇게 만난 다. 회상은 그 속에서 내가 비롯한 아득한 처음 때에 이른다. 그 안에서는 신화가 읊어진다. 비롯함의 이야기들이 넘실댄다. 그 이야기는 젊어지는 샘물로 삶을 키우는 여울을 이루어 흐른다. 시간을 역류하는 신비 속에서 나는 지금을 되시작한다. 나는 그 속에서 겨우 생각난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는 소박하다. '너 없 으면 나 없다'고 말한다. 그리움도 그 안에 있다. 갈등도 그러하 다. 별리의 아픔이 죽음을 안고 몸부림하지만, 그래서 찢긴 상처 가 되돋고 되돋아 달빛조차 위로하지 못하지만, 그 아픔조차 그 안에 있어 오히려 새로운 '너'와 만난다. 나는 둘을 이야기한다. 나는 홀로이지 않다. 나는 너 있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은 하나이다. 소리의 흔적은 내게 이렇게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