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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landau ()
날 짜 (Date): 2001년 6월  2일 토요일 오전 12시 00분 28초
제 목(Title): Re: 징병-모병제에 관한 기사...



딴지의 그 기사나 몇몇 글들은 주로 국방력 강화 측면에서 징병과 모병을 
다뤘습니다. 그것도 한가지 접근법이긴 한데, 징병-모병 문제에는 사회
경제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징병제에 필요한 세금을
낼 돈이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복잡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인 이야기란 책을 읽다 보면 원래 징병제였던 로마가 (물론 오늘날의
국민 개병제와는 많이 다릅니다.) 모병제로 전환되는 과정이 3권 마리우스
편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기술하는 로마제국의 징병->모병으로의 
전환과정에서 보면 중요한 몇가지 사회변화가 나타납니다. 

한가지는 그 전까지 주로 자작농 중심의 농업국가였던 로마가 대농장주 
중심으로 개편되었다는 것이고, 국가가 커지고 로마가 중심이 되면서 
점점 통상이나 정치,행정 서비스 같은 고차원적인(?) 산업으로 중심이
넘어간다는 점이 두번째 입니다. 포에니 전쟁에서 정복한 카르타고와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값싼 농산물이 마구 들어와서 당시까지 로마사회의
허리역할을 했던 자작농 계급이 몰락해 버렸죠. 

이러한 변화의 결과로 로마의 사회구조가 크게 변했는데, 이전까지는
소수의 상류층과 로마군의 중추였던 자작농 계급 그리고 적절한 수의
무산자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던 것이, 소수의 부유층과 대다수의 
하류층으로 나뉘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결과 병사들의 재산정도가 
급격히 떨어진 군대가 만들어졌고 남겨두고온 가족들의 생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되어서 로마군은 연전연패 전투력이 급격히 
저하되었습니다. 아울러 몰락한 자작농들이 로마로 몰려들어 도시빈민층을
형성하고 그들에 대한 구호대책이 심각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장군출신의 마리우스 (줄리어스 시이저의 고모부)가 나서서 
당시까지 징병제이던 로마군을 모병제로 전환해 버렸습니다. 이 방법이
의외로 효과를 거두어서, 전쟁을 직업으로 하는 직업군인들인지라
로마군의 전투력도 크게 향상되었고 징병이 실업자 구제책으로도 큰 힘을
발휘했으며, 더더욱 놀라운 것은 아무런 사회적 저항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란다우 개인적으로는 위의 로마사 부분과 현재 모병제가 주로 산업선진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징병제가 모병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사회경제적인 필요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첫째로 모병제를 실시하는 국가가 그 당시의 기준으로 보아서 높은 
경제 수준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모병제에 필요한 돈을 국민이
부담하려면 국가가 (혹은 국민이) 그 돈을 지불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높은 경제수준이 요구되는 것은 지불능력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높은 경제수준의 나라일수록 징병의 대상인 국민 개개인들이 병역때문에
손해보게 되는 기회비용이 커지면서 모병제에 대한 욕구가 커지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전국민이 농사 짓거나 고기 잡으면서 살 때보다는 
경제가 고도화 되어서 엔지니어, 증권맨, 전문직업인, 상인들이 늘어났을때가 
군대를 감으로써 보는 손해가 점점 더 커지고 아까와 지는겁니다. 

그러나 전국민이 다 잘먹고 잘살게 되어서 군대가기 싫어진 상황이라면
모병제로의 전환이 어렵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돈많이 버는 국민을 직업군인
으로 유혹하려면 높은 경제적 대우를 주어야 하는데, 개개인의 군인에게
높은 보수를 지급하려다 보면, 국가에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주게 되거나
군인의 숫자가 줄어서 국방력이 일정정도 약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직업군인을 명예롭게 여기는
나라는 많지만, 직업군인이 고액연봉자인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위의 로마사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것중의 하나는, 모병제를 위해서는
대규모 실업자 계층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많은 경우 실업자
층이 빈민층 하류층에 해당되기는 하지만,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사에 나오는 실업자 층은 몰락한 자작농 계급이 도시빈민으로 전환된
사람들이었고, (역사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당시 군인의 급료는 징병제
시절에 징집병들에게 지급되던 수당수준에 불과했지만 분명히 도시빈민의
수입보다는 나았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또 정복전쟁에서 이겼을 경우 
경제적인 보상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빈민층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경제적으로 수지맞는 장사였다고 짐작됩니다. 상류층이되 실업자라는 
특수한 경우는 흔히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대명사로 들먹여지는 영국 귀족층을
들 수 있습니다. 영국의 상류층은 철저하게 장자상속제의 원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귀족이나 상류층의 차남 삼남들은 상류층이긴 한데 재산도 없고 
그렇다고 신분때문에 공돌이나 장사치가 될 수도 없는 일종의 예비 실업자
군이었습니다. 군대의 고급장교는 이 예비 실업자들에게 매력있는 직업이었고 
(봉급은 그저 그래도 뽀다구도 나고, 명예롭게 여겨지고, 놀면 또 뭐합니까)
식민전쟁 시대라서 운좋으면 한몫 잡을 수도 있는 매력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모병제를 택하고 있는 나라들 중에는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위의 두가지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돈 잘버는 나라들이다 보니 어느정도 크기의 직업군인 집단을 먹여살릴
수 있고, 중류층 이상의 국민들이 병역의무를 매우 부담스러워 합니다. 

반면에 고도 산업사회의 결과로 높은 실업률이 나타납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빈부격차도 심해지고 실업률도 높아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이런 사회구조에서는 직업군인이 고액연봉자가
아니어도 충분히 경제적인 유인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IMF 시절
한때 프랑스 외인부대 입대열풍이 불었던 것을 기억해 보십시요.

참고로 말하면, 대부분의 국민이 다 잘먹고 잘 살아서 돈은 있는데 
군대에 지원할 실업자 층이 부족한 경우에는,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에서
보듯이 돈을 주고 외국인을 군인으로 고용하는 용병 시스템으로 빠지는
수도 있습니다. 

순전히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논한다면, 모병제는 돈으로 말하는 
고도화된 사회에서 승리한 계층이, 경제적으로 소외된 실업자층을 돈으로
군대에 고용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꼭 정의로운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지금 한국사회의 변화방향은 분명히 모병제에 유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적어도 지난 30년간은 한국경제가 빠른 속도로 고도화 되었기
때문에 (실속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병역의 의무는 점점 더
부담스러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반면, 사회 구조는 갈수록 서구 선진국을
닮아가서 실업자 층이 점점 더 두터워지고 사회적 빈부격차 또한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추세로 계속 나아간다면 언젠가는
모병제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러나 가까운 장래에 모병제에 필요한 사회경제적인 조건이 충족될 수 
있을지는 좀 더 따져봐야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지금 한국의
경제수준이 모병제 군대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인가? 모병제의 인적자원
이라고 할 수 있는 실업자 층은 충분히 형성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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