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3월 31일 토요일 오후 05시 30분 18초 제 목(Title): 노형석/한겨레 영산강 고대문화 주인은 누� 출처: 한겨레 [학술] 영산강 고대문화 '주인'은 누굴까 '나주 복암리 3호분 발굴보고서' 고분 구조·무덤양식등 분석 6세기 이후 백제민의 지배 아닌 토착세력과 공존 사실 드러나 곡창지대로 유명한 전남 영산강 주변의 너른 나주벌은 고대사 분야에서 아직 밭갈이가 한창인 미개지다. 흔히 백제 땅으로 넘겨짚기 십상인 이곳 유적이나 유물들은 정작 백제 것과 크게 다르다. 답사객들은 경주, 부여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옛 무덤(고분)이 부지기수로 널려있다는 데 놀라고, 거대한 옹관을 관으로 썼다는데 다시금 놀란다. 학자들이 영산강 고대문화의 주인공을 백제인과 다른 토박이 세력이라고 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해상무역 거점으로서 일본, 가야 등과도 교류가 잦았다는 이곳 옛 사람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안개 속이다.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조유전)가 펴낸 <나주 복암리 3호분 발굴보고서>(전 3권)는 영산강 고대문화의 의문과 연관해 몇가지 단서들을 내놓았다. 지난 96년부터 98년까지 진행된 복암리 3호분 발굴은 일제시대 발굴한 반남면 고분에 이은 이 지역 최대의 발굴이었는데, 조사결과 눈에 띄는 새 사료들을 많이 건져올렸다는 평가다. 한변 길이가 40m, 높이 10여 m로 정사각형 모양을 한 복암리 3호분은 오늘날 눈으로 보면 다분히 엽기적인 구조다. 하나의 무덤언덕(분구)안에 옹관묘, 구덩이식 돌덧널 무덤, 굴식 돌방무덤, 앞트기식 돌덧널무덤, 돌넛덜 무덤 등 각양각색 모양을 지닌 41개의 무덤방이 벌집처럼 촘촘이 들어차있어 발굴팀을 놀라게 했다. 한 무덤언덕 안에 여러개의 무덤구덩을 파는 다장(多葬)은 이 지역만의 독특한 매장방식. 더욱이 한 무덤에 당시 영산강 일대의 온갖 묘제양식이 다 들어찬 것은 유일해 지배양상 변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됐다. 무덤형식과 크기로 권력을 과시하는 것이 고대문화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분석결과 영산강 유역 지배자가 토착세력에서 6세기 이후 백제중앙관료로 바뀌었다는 기존 학설은 일부수정이 불가피해졌다. 복암리 3호분의 경우 3세기 옹관묘부터 7세기 석실묘까지 한 무덤언덕 안에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어 백제 멸망 때까지 이 지역 토착세력이 백제의 도움아래 지배자로서 권세를 누렸다는 사실이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부 석실분에 옹관이 함께있는 색다른 형태가 최초로 발견되고 백제 관리에게 주는 금은제관식 등도 나와 백제가 토착세력들을 지방관 삼아 통치를 대행하게 했다는 추측을 뒷받침한다. 재미있는 것은 함께 출토된 각진 머리칼(규두대도)은 고대 일본열도에서 유행했던 칼양식이고 말에게 씌우는 마구나 토기의 문양은 신라와 가야의 양식에 더 가까와 해석을 알쏭달쏭하게 한다는 점이다. 연구소 김낙중 학예사는 “백제영향권이었음에도 일본, 가야, 신라와도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이밖에 사람뼈와 토기 속 유기물질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고대인들이 모계혈통으로 근친혼을 했다는 것과 생선류를 부장품으로 썼다는 사실도 새롭게 밝혀졌다. 복암리 고분 3호분의 전경(위)과 돌방(석실) 속에 놓여진 옹관유물(아래), 함께 출토된 규두대도. 수수께끼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다. 토착세력이 백제이전의 마한세력인가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발굴은 뚜렷한 단서를 제공하지 못했다. 또 고대 일본양식과 비슷한 일부 유물들을 통해 당시 일본과의 관계를 밝히는 것도 주변에서 발견되는 일본양식인 장고모양 고분의 성격논쟁과 더불어 첨예한 쟁점으로 남아있다. 최성락 목포대 교수는 “지나친 추론보다 드러난 발굴성과를 장기분석이 필요하며 산성터나 생산유적 등에 대한 연구가 보완되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nuge@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