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3월 13일 화요일 오후 04시 53분 25초
제 목(Title): 조광/ 함석헌, 고난극복 그게 우리 역사야 


[함석헌] 고난 극복, 그게 우리 역사야 

 
-그는 역사학자인가? 


함석헌(1901-1989)은 군사독재로 점철되었던 20세기 후반기 한국현대 
지성사에서 분명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당시 민주운동가로, 
그리고 한 시대의 아픔을 승화시켜 민족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사상가로 
활동했다. 당시 그가 '살아 있는 지성'이었다는 점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의할 
것이다. 

그는 일제하 항일문화운동이 제법 활발히 전개되던 1930년대 시골 중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던 역사 선생이었다. 그는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했는데, 그 시기에 고등교육기관에서 역사학에 관한 전문적 훈련을 받은 
사람은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다. 이 상황에서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집필했다. 이 글은 해방 이후 단행본으로 간행되어 그 영향력을 
증대시켜 갔다. 

함석헌은 자신을 '역사책을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진' 사람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 책의 머리말에서 "본래 이것은 자신 홀로의 탄식이며 
반성이요, 친구에게 하는 위로이며 권면이다. 우리의 기도요 신앙이지 
역사연구가 아니다"라고 자평했다. 이러한 고백으로 인해서, 그리고 그가 
강단의 역사학자가 아닌 `들판의 외치는 소리'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를 
역사학자로 보는 데에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1930년대의 함석헌은 분명 역사학자였다. 단지 험난한 우리 현대사가 
역사책을 빼앗아 갔을 뿐이다. 강요되었던 식민지 지배와 분단시대의 고통은 
그를 거리의 예언자로 내몰았다. 그러나 이 예언자적 삶도 자신의 청년기를 
통해서 형성된 깊은 역사지식과 투철한 역사의식의 산물이었다. 

역사학자인 천관우는 함석헌을 평하며, 우리의 역사를 사료(史料)의 창고가 
아닌 펄펄 뛰는 역사로 만들었다고 했다. 또한 천관우는 함석헌이 하나의 
일관된 사관을 가지고 한국사를 서술한 최초의 인물로 표현한 바도 있었다. 
함석헌이 살던 시대는 그를 역사학자로부터 역사철학자로 성장시켜 주었지만, 
그가 한국사를 연구한 역사학자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함석헌의 역사이론 


함석헌의 역사이해가 가지고 있던 특징은 1930년대라는 시대적 조건과 
무교회주의적 그리스도교 사상이라는 두 가지 축을 근간으로 삼고 있었다. 물론 
1960년대에 이르러 그는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에서 기독교 사상만이 역사해석의 
기준이 되어야 함을 거부했다. 이때 그가 자신의 책을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바꾸었다 하더라도 함석헌의 역사관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함석헌이 살았던 시대는 식민주의 사관이 강요되던 때였다. 당시의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은 반도적 성격론을 통해서 지리결정론을 한국사 해석에 적용하고자 
했다. 그리고 당파심과 사대주의 등을 조선민족의 고정불변한 민족성으로 
규정했다. 또한 조선역사의 타율성을 주장하면서 한국사의 주역은 주변 
강대국임을 강변하고자 했다. 식민지 어용학자들은 한국사의 정체성(停滯性)을 
논하기도 했지만, 당시의 학계에서는 이에 맞서서 반 제국주의 사학이 힘차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함석헌은 세계의 역사는 발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역사란 
인과적 상호관계의 연쇄 속에 있는 생명체의 하나라는 것을 강조한, 일종의 
유기체적 역사관이었다. 그리고 한국사의 전개에 있어서 지리의 중요성을 
논하되, 지리보다는 인간이 역사의 주인임을 밝히고자 했다. 그는 사대주의나 
당파심과 같은 조선의 '나쁜' 민족성을 논하면서도, 민족사의 전개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민중을 역사의 주체요 원동력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함석헌의 한국사서술 


그에 있어서 조선역사의 기조(基調)는 고난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역사는 
고난과 그 극복을 위한 노력의 연속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각 시대사의 서술을 통해 이 점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고자 했다. 우선 그는 
자신의 사관에 따라 한국사의 시대구분을 시도했다. 그는 역사란 발생기, 
성장기, 연단기, 완성기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사의 경우 
삼국시대이래 계속해서 연단기가 지속되고 있고, 완성기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파악했다. 

함석헌은 고구려의 멸망으로 조선의 역사가 연단기(鍊鍛期)기에 들어갔다고 
보았다. 고려왕조와 조선시대도 이 연단기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었다고 
파악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에서는 민족적 자아를 되찾을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그가 자아회복의 
계기로 파악했던 사건은 고구려 옛 땅에 대한 회복 운동이나, 실학운동이나 
서학(西學)의 수용과 같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기 위한 노력 등이었다. 


-사학사상의 위치 


또한 그는 발전이란 개념이 미약했던 민족주의 사관을 극복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민족의 구체적 실체가 민중에게서 확인되며, 이들이 역사의 
주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런 측면에서 함석헌은 당시 민족주의 사관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점을 극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조선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였기에 그는 '유행식의 영광스런 조국의 역사"를 가르치기를 
거부하고 민중을 중심으로 한 고난 극복의 역사를 제시했다. 이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민족과 민족사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려 했다. 

그는 식민주의 사학이 가지고 있던 병폐를 극복하려던 역사가였다. 동시에 그는 
당시 조선의 연구자들이 가지고 있던 실증주의 사학의 폐단을 적시했고, 
계급주의나 민족주의 사학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교적 종말론을 전제로 한 발전론적 사관을 한국사에 본격적으로 
적용시킨 인물이었다. 그는 일제 시대를 살아가며 국가주의적 민족주의가 아닌 
인류의 보편성을 존중하면서 민족에 대한 따스한 가슴에서 우러나는 한국사를 
서술했다. 여기에 식민지 시대 역사학자 함석헌의 사학사적 자리가 있는 
것이다. ■조 광(고려대 교수)



# 조 광 교수 약력--- 

1945년 서울에서 남 

고려대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현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함석헌] [편집자주] 고난 극복, 그게 우리 역사야 

함석헌의 역사가적 면모는 30년대 <성서조선>에 발표한 뒤 60년대 재출간한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이 저술에서 외세침략과 
굴욕의 한국역사를 예수의 고난에 비유하며 세계의 불의를 정화시킬 희망의 
거처로 표현했다. 세계인류의 죄를 지고 고난받는 한민족이 침략과 압제의 
사슬을 끊고 일어서면 세계평화와 구원의 활로가 트인다고 통찰한 것이다. 이는 
신학적 토대에 바탕해 보편적 약자로서의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격상시키는 
의미를 지닌다. 강자의 논리 중심이던 기존 사관에서 벗어나 변화와 생성의 
근원인 씨ㅇㆍㄹ(민중)이 지배층에 맞서 평등 공동체를 세우는 `스스로 함'의 
노력을 역사의 동력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유물사관과 실증사학의 간극을 
뛰어넘으려한 그의 파격적 역사관은 이후 반독재투쟁으로 계승되어 
진보사학계와 민중신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편집자 




[함석헌] 겨레의 큰 사상가 함석헌 선생을 그리며 

 
1970년 대학 1학년 때 풋내기 학생으로서 나는 처음 함석헌 선생의 강연을 
들었다. 70 노인의 꼿꼿한 자세와 날 선 소리는 하늘을 찌를 듯 했고, 비범한 
풍모와 말씀에 감동을 넘어 두려움마저 느꼈다. 50년대 '사상계'에 글을 써 
서울의 종이 값을 올렸고, 나이 70에 '씨ㅇㆍㄹ의 소리'를 창간했던 함 선생은 
무엇보다 `생각하는 이'로 기억에 남아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죽어서도 생각은 계속하라"면서 생각해서 깨달은 진리를 따른 사람! 독단과 
편견을 버리고 민족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정부를 꿈꾸었고 모든 종교를 
아우르는 진리의 세계에서 살았던 자유인! "우리 삶에서 글월이 돋아나지, 공작 
깃 같은 남의 글월 가져다 아무리 붙였다기로 우리 것이 될 까닭이 없다"는 
말에서 나는 우리말로 닦아낸 삶의 철학을 접할 수 있었다. 나는 그를, '나'를 
모든 사유의 중심에 놓는 주체 철학자, 겨레 얼과 혼을 추구한 민족철학자, 
동서문명의 종합을 추구한 세계철학자, 씨ㅇㆍㄹ(民)을 하늘처럼 받든 풀뿌리 
민주주의자로 규정한다. 늘 새 시대를 내다보았고, 80이 넘은 나이에 
재야운동을 계속하면서도 늘 "사람 되어야지!"하며 자신을 다잡은 `젊은이'가 
바로 함 선생이었다. 자연생명과 역사의 원리를 '스스로 함'과 
'자람(새로움)'으로 갈파하며 "지난 5천년 역사가 네 속에 있다"는 말씀이 
지금도 귓전을 울리는 듯하다. 그는 "우리 역사, 우리 문화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 사회의 문화가 크고 하나임을 뜻하는 한에서 나왔고 한을 목표로 하고 
나아간다"고 말함으로써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인 '한'을 세계통일의 근거로 
제시했다. '스스로', '새롭게', '한'(큰 하나)으로 살라는 가르침은 줄곧 
나같이 부족한 사람도 젊은 마음으로 생각하고 애쓰며 살아가도록 이끈 지표가 
되었다고 자부한다. 


박 재 순(신학박사)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