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3월 7일 수요일 오전 03시 23분 21초 제 목(Title): 정운영/ 악당과 토마토 이야기 [독서 칼럼] 악당과 토마토 이야기 -------------------------------------------------------------------------------- 노암 촘스키의 저서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한울 ·1996)에 이런 대목이 있다. “미국이 없애고자 했던 정부나 정치 운동을 소련이 지원하곤 했기 때문에 제3세계에 대한 미국의 간섭은 자칫 핵전쟁으로 번질 위험의 소지가 있었다”(1백21쪽). 그리고 “외교라는 것은 총부리 아래에서 추진되지 않는 한 아주 달갑지 않은 방법이다…협상 과정에서 상대의 이익에 적어도 어느 정도는 부응해주어야 하기”(1백21쪽) 때문이다. 이 둘을 조합하면 다음의 결론이 가능하다.국제 분쟁에서는 뭐니뭐니해도 말보다 주먹이 효과적인데,예전에는 힘센 방해꾼이 있어서 자칫하면 둘 다 죽기 십상이었다. *** 국제 분쟁엔 말보다 주먹이 그러면 그 방해꾼이 사라진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촘스키는 이렇게 대답한다.1990년 걸프 위기처럼 “부시 행정부가 제재나 외교의 방법은 제쳐놓은 채 군사력만을 주요한 정책 수단으로 택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1백22쪽). 전쟁의 정당성이나 도덕성과는 무관하게 걸프전은 다국적 군대까지 동원된 아주 ‘굉장한’전쟁이었다. 그러나 전혀 굉장하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는 흔히 카다피와 그의 국제 테러리스트 집단, 그라나다와 그의 꺼림칙한 공군 기지,텍사스로 행진해오는 산디니스타,교활한 미치광이 노리에가가 이끄는 스페인계 마약 밀매업자,미친 아랍인들로 설정된”(1백24쪽)사실이 그러하다. 인구 10만의 그라나다를 침공하면서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소련이 서유럽을 침공할 경우…카리브에서 서유럽으로 가는 원유 공급을 방해할지 모른다”(42쪽)는 기막힌 이유를 들이댔다. 니카라과에서의 산디니스타 축출과 관련해서도 “차로 이틀밖에 안 걸리는 텍사스의 할링겐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쳐들어오고 말 것”(42쪽)이라는 공상 만화 같은 주장을 앞세워 비밀리에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던 것이다. 미국이 두려워한 것은 소련의 군사력보다 정치력이었다는 관찰이 옳다면 군사적 위협이 없는 경우는 어떠한가? 여기는 ‘바이러스’이론이 따른다. 이를테면 미국은 “호치민이 카누를 타고 와서 캘리포니아에 상륙할”(45쪽) 위험 따위를 믿어서가 아니라,독자 노선을 취하는 베트남의 ‘악성’바이러스가 인접국을 감염시키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전쟁이라는 강력한 예방 접종을 택했다는 말씀이다. 국 정부가 작성한 ‘악당 열전’은 불복종의 죄를 저지른 사담 후세인으로 일단 끝이 난다.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 아들 부시가 북한을 그 열전에 올리고,국가미사일방위(NMD) 구축을 서두를 참이다. 미국 정부가 만든 악당 열전이 촘스키한테는 미국의 ‘범죄 열전’인 셈이다. 미국 정부의 악당 사냥이 사실상 미국의 대외 정책이 저지른 범죄의 산물이기 쉽다는 그의 주장은 우리 귀에 불충을 넘어 ‘매국’으로까지 들린다. 군부는 “라틴 아메리카에 존재하는 정치 집단 가운데 반미 활동을 하지 않는 유일한 세력이기”(37쪽) 때문에 미국은 이 지역의 군사 독재 정권을 도왔다는 고백은 얼마나 정직하며,공산당의 “전제 정치가 붕괴되면서 심한 폭력이 벌어졌던 유일한 동유럽 국가는 바로 소련의 영향이 가장 적게 미쳤고,우리의 영향이 가장 크게 미쳤던 루마니아였다”(1백16쪽)는 지적은 또 얼마나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가. 무력은 최후의 수단으로서 “할 수만 있다면 IMF를 이용하는 것이 해병대나 CIA를 끌어들이는 것보다 비용 면에서 훨씬 효과적”(1백23쪽)이라고 촘스키는 주장한다. 이제 그의 경제로 넘어가자.국내 역서로는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모색·1999)가 집힌다. 먼저 그는 미국이 수출하는 ‘시장경제의 가치’를 아주 의심스럽게 바라본다. 오늘의 세계화와 시장경제를 떠받치는 신자유주의 개념이 잉태된 19세기초에 벌써 “고통받는 대중을 위해 베풀어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은 그들에게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망상을 버리게 하는 것”(93쪽)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대외 경제 정책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고발한다. 예컨대 레이건 정부는 타국에 대고는 자유방임을 칼 같이 강요했지만 자국은 “1930년대 이래 가장 큰 폭의 보호무역으로 선회하는 모순을 보여주었다”(1백4쪽). 나프타 협정으로 멕시코 토마토가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오고,이에 플로리다 농민들의 불평이 거세지자 클린턴 정부는 멕시코에 압력을 가해 선적을 막았다.관세를 올리면 협정 위반이므로 ‘보이지 않은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그리고는 “멕시코 토마토는 값이 싸다. 소비자들도 멕시코 토마토를 원한다.시장경제는 원칙대로 운영된다.다만 결과가 바람직하지 못하다. 어쩌면 토마토가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1백35쪽)고 둘러댔다니,이번에는 악당 대신 토마토를 내세운 것인가? *** CIA보다 효과적인 IMF 촘스키가 정의롭지 못한 세계 정치와 공정하지 않은 경제 질서에 분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그렇다고 ‘궐기하라’ 따위의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기껏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라는 그의 당부는 한편으로 초라하게까지 들린다.그의 정직만큼이나 현실적인 호소대로 “당신이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면,더 나은 사회로의 발전은 없을 것이다”(23쪽).선택은 각기 자신의 몫이라는 뜻일 텐데, 그래 무엇을 더 바라랴. 정운영 <논설위원> |